4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하염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흑!”
저며 대는 가슴이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 숙이게 만든다.
고개 들어 다시 언니가 누운 곳을 바라보기 어렵다.
끝없이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에도 목 놓아 울 수 없다.
자신은 죄인이다.
‘언니!’
그저 지금은 이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야 한다.
누가 뭐라고 욕해도 지금은 그래야 한다.
무윤이 가만히 다가왔다.
처음으로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고개를 파묻은 그녀에게 말하려면 어쩔 수 없다.
얼마 후, 울먹임이 멈추지 않던 그녀의 고개가 가만히 들려졌다. 볼 따라 떨어지는 물줄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격정에 이지러지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제 소려의 유일한 부모가 된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죄송해요.”
무윤의 고개가 가만히 저어졌다. 그 또한 꼭 해 줘야 할 말이 있다.
“본인이 원한 겁니다. 누구 잘못도 아니에요.”
“…….”
“보셨을 텐데요.”
“……?”
“마지막까지 그쪽을 바라보던 미소가 변했습니까?”
“……!”
“그쪽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다른 거면 제가 먼저 말렸습니다.”
“……!”
무윤은 서신 한 장을 건넸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
잠시 후, 그녀의 떨리던 눈이 한 곳을 향했다.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이 글, 몇 번째 다시 쓰는지 모르겠다.
써 내려가다 보니 너무 길더구나. 이제 줄여진 거 같네.
너라면 느꼈을 거야. 이 춤이 가진 의미를.
그걸 소려에게 보여 줬으면 해. 나 대신인 거 알지?
그리고 보고 싶단다. 내가 못 간 그 길을 걷는 네 모습을.
소려를 잘 부탁해. 내 동생 서연아.
밤에 묻혀 밀려오는 쓸쓸한 파도처럼, 떠나간 이의 영상이 어스름 눈가에 물결칠 즈음.
주저앉은 등이 복받치는 감정에 세차게 흔들거렸다.
입 막아 내던 흐느낀 울음이 더는 못 참겠는지 막은 손을 뚫고 튀어나왔다. 울렁이던 가슴이 그제야 한을 토했다.
“크흑! 크흐흑!”
뒤늦은 후회와 한은 멈추지 않는 울음을 끝없이 토해 냈다.
“허어엉! 크흐흑!”
달이 올라오고 별이 떴다.
어둠이 밤의 날개를 내렸다.
그렇게 별들이 허공에 제 빛을 뿌리길 한참.
또르르 굴러 얼굴을 적시던 눈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무렵.
새벽안개를 뚫고 솟은 햇살이 지평선을 타고 올라왔다.
밤을 잊고 숙여 있던 고개가 가만히 들려졌다.
다시 힘을 찾은 눈빛엔 이제껏 없던 열기가 가득 서렸다.
마음으로 파고든 유선의 염원은 격랑이 되어 요동쳤다.
‘언니! ……그럴게요. 약속해요.’
막 떠오른 햇살이 새벽 청초함 담아 그녀의 눈 가득 반짝였다.
* * *
다음 날, 망산(莽山)의 한 봉우리.
공야성은 나직이 말문을 흘렸다.
“이제 내려가자.”
“그래.”
무윤은 다시 한번 봉우리 주변을 둘렀다.
친구 여단(黎旦)을 떠나보냈던 곳.
이번엔 유선 또한 바람에 날려 보냈다.
그녀가 원한 일이다.
얼마 전 그녀가 물었다.
-방주님. 어디 다녀오세요?
-응. 망산에.
-거기 자주 가시네요? 바람 쐬러?
-그것도 있고. 친구도 만날 겸해서.
-친구요?
-거기서 떠나보낸 놈이 있어. 가끔 생각나거든.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가시겠네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럴 거야.
-……!
유선은 무윤에게도 서신을 남겼다.
부탁은 두 개다.
진서연에게 심법을 전해 달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보내 달라고 했다. 친구 찾아올 때 자신도 조금은 기억해 달라고. 그럼 평생 만날 수 있다고.
‘그래. 자주 올게.’
소려의 생부, 하후천기 얘기도 다시 적었다.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또한 그 누구에게도.
그래야 온전히 무윤의 딸로 자랄 수 있다고.
‘나도 그럴 거야. 걱정 마.’
이제 세상에 그 사실을 아는 건 공야성과 자신뿐이다.
무윤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떠난 이가 남긴 가슴 가득 따스한 선물.
‘잘 키울게. 두 번 실수는 안 해.’
실수는 이전 생의 월소려, 그녀만으로 족하다.
그러기에 유선에게 꼭 해야 할 약속이자 마음속의 다짐.
‘소려가 진정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게 누구건 묵묵히 지켜봐 주고 응원할 거야. 도와줄 뿐 절대 간섭은 안 한다.’
그게 여휘와 월소려에게 남은 마음을 빚을 갚는 길이기도 하다.
산봉우리를 내려와 산길로 접어들 즈음.
무윤의 눈썹이 매섭게 휘날렸다. 흘릴 수 있는 가장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이럴 때 왔단 말이지!’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지금 은밀히 뒤를 밟는 한 놈.
지금은 그냥 보내 줄 마음이 도저히 안 생긴다.
내력을 올려 집중하던 어느 순간,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뇌리를 타고 오르는 싸한 기운. 삼 년이나 됐지만 잊을 수가 없다. 이건 분명 그때 그것이다.
‘적운문주 설도승!’
지난번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엔 확연히 울림이 온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혼자 오다니 업어 주고 싶네.’
설도승이 없으면 적운문은 바로 구심점을 잃는다. 한데 혼자 제 발로 와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걱정할 이들에겐 알릴 필요 없다.
“먼저 내려가. 난 천천히 갈게.”
공야성은 잠시 멈칫하다 지레짐작했다.
“잘 보냈잖아. 너무 오래 있지는 마라.”
“알았다.”
일행이 내려가자 무윤은 숲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던 즈음, 무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력 기운이 달라.’
뭔가 이상했다. 온몸 내력을 다 풀어 다시 숲속을 살폈다.
위이잉!
분명 서늘한 기운은 설도승에게 느꼈던 그것인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살핀 자의 전신 내력은 다름을 알린다.
숲 가까이 와서야 확신이 들었다.
‘설도승이 아니야. 근데 그와 같은 이 기운은 뭐지?’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삭!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와 주니 고맙군. 업어 주고 싶은 심정이야.”
흑색 무복 차림에 눌러쓴 죽립.
벌써부터 폭풍같이 터져 나오는 기세를 감추지 않는 자.
그리고 그 내력 속에 깃든 알 수 없는 기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죽립을 왜 눌러썼겠나. 빨리 끝내 주지.”
무윤은 잠시 갈등이 일었다. 묻고 팰지, 아니면 패고 물을지다. 답은 간단히 나왔다.
‘둘 다 들으면 되지.’
무윤은 신형을 뒤로 물렸다.
파팟!
“날 찾아온 게 맞긴 한 거야?”
“청호방주라면!”
“그건 맞고.”
“그거면 됐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죽립인의 신형은 바람을 갈랐다.
휘익!
빠름이 상대의 실력을 알렸다.
‘초절정은 확실히 넘었고.’
무윤은 앞을 향한 시선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파팟!
“몇 개만 더 묻자고.”
“문답무용(問答無用)!”
입을 닫겠다는 자를 굳이 떠볼 이유가 없다. 말보다 몸으로 묻는 게 확실하니까.
“그럼 말고.”
“……?”
쫓는 자와 일부러 쫓기는 자 간의 간격 경쟁이 벌어졌다.
쉬익! 파팟! 슈욱!
두 사람의 바람 탄 몸놀림에 스치는 잔가지가 연이어 꺾여 나갔다.
투둑! 틱! 티딕!
쫓는 자의 전신에 둘러진 기세가 한층 더 거세졌다. 한층 끌어올린 내력에 가문의 절기를 더했는데도 반 장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서문염호의 눈이 잘게 떨렸다. 대여섯 장 공간을 요리조리 교차하는 놈의 신형이 예사롭지 않다.
‘역시 좁은 공간에선 빨라.’
들은 대로 내력에 외공의 감각이 더해진 발은 협소한 공간을 자유롭게 누벼 댔다. 그나마 안심되는 건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는 것.
‘경공은 내력이 부족하겠지.’
무윤도 간격을 벌릴 생각이 없다. 입 대신 몸으로 계속 묻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기심의공으로 수십 번 몸 안을 헤집어도 의아한 기운은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다.
‘몸을 만져 봐야겠어.’
생각과 동시에 훌쩍 공간을 벌렸다.
쉬익!
동시에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흘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서문염호는 흐뭇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생각 잘했다. 결판을 보는 게 답이지.”
“맞는 말이야.”
서문염호는 바로 장중한 기세를 일으켰다. 정순한 내공이 물밀듯 단전에서 뿜어 나왔다.
우우웅!
무형의 힘이 전신을 달구고 그 힘 더한 진각을 깊게 밟으려는 순간, 상대의 신형이 먼저 짓쳐 들었다.
파팟!
서문염호로선 고마울 따름이다. 나름 배려하기로 했다.
‘고통 없이 죽여 주마.’
들불처럼 일어난 진기를 검격에 담아 상대를 마주했다.
한데 그 순간 서문염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방금 떠올랐던 옅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저, 저게?’
처음 간격을 좁힌 빠름은 무인의 투기를 끌어올릴 딱 그 정도였다. 한데 다가오는 자의 손 주변에 흐르는 폭풍 같은 기세는 입을 쫙 벌리게 만든다.
엄청난 위압감에 저절로 몸이 후들거렸다.
절로 터진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서, 설마!”
허공에 치켜든 손에 시퍼렇게 흘러나온 빛의 일렁임. 그 농밀함을 더해 가던 기파가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내력의 발경을 통해 뻗어 나온 기운의 유형화, 한데 권기가 아니다. 발현된 빛이 조금씩 줄어드는 만큼 기의 응집은 대기를 요동치게 했다.
우우웅!
거친 파도에 휩쓸리듯 주변 대기를 이지러트린 기운이 목표를 향했다.
위이잉!
서문염호의 눈은 부릅떠졌다. 짧은 경악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권강!”
뿜어진 채 하늘거리는 강대한 기운. 그 정체는 강기다.
모를 수가 없다. 자신 또한 강기의 요체를 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가문의 어른들과 숱한 격전을 치르며 봤던 그것이다.
순간 드는 생각.
‘놈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무인의 본능에 따라야 할 때.
순간 환영처럼 흐린 잔상이 인지의 한계를 넘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빠름이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헉!’
그제야 알았다. 처음 짓쳐 들던 속도는 속임수다. 발을 빼지 못하게 하려는.
무자비한 전율이 등골을 시렸다.
‘피한다!’
방어 자세를 취할 새도 없었다. 이미 타오르는 들불처럼 피부를 따갑게 하는 기운. 할 수 있는 거라곤, 신형을 뒤로 빼며 검을 뻗어 내는 것뿐.
쉬익!
하지만 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시퍼런 빛이 시야를 가리는 순간.
퍼억! 슈우욱!
권강을 두른 주먹이 아니다. 거기에 집중하느라 시야를 벗어난 다른 손.
그 주먹이 전한 엄청난 격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허탈함이 밀물처럼 몰아닥쳤다.
‘이렇게 당하다니.’
강기의 형태도 다양하다. 크기나 응축이 얼마나 됐는지에 따라 경지도 천차만별이고.
놈은 순식간에 강기를 끄집어냈다. 그 빛 또한 선명하고.
그간 봐 온 사문의 어른들과 비교해 보면.
‘초절정 상.’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두 눈이 멍하게 풀려 가며 의식을 잃었다. 순간 쓰러지던 그의 눈에 상대의 모습이 스쳐 갔다.
묘하게 쳐다보는 눈가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자신을 알아보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입을 닫는 것 외에는.
투욱!
얼마 후.
서문염호는 등이 전한 바닥의 한기에 눈이 살짝 떠졌다.
‘여, 여긴!’
눈꺼풀 사이로 아까 보았던 놈의 얼굴이 보였다.
아득한 상상의 어둠이 눈자위 위를 다시 뒤덮었다.
기억은 현실이다.
‘아!’
가슴이 턱 하니 막히고 눈은 저절로 감겨 버렸다.
이제 남은 일은, 과정은 몰라도 그것뿐이다.
온갖 소회가 물밀듯이 밀어닥칠 즈음, 통렬한 후회 하나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더 살펴봤어야 했는데.’
서문채령의 말을 너무 믿어 버렸다.
거기에 최근 가문이 준 약으로 한 단계 뛰어오른 경지까지.
물론 다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