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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42화 (42/161)

4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장원으로 향하는 소로 길.

무윤과 공야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터덕터덕!

문득 담벼락 옆으로 아담하게 펼쳐진 꽃길이 오늘따라 시선을 끈다. 그 나무 사이 비집고 내린 햇살이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흐드러진 꽃길을 뒤로하고 걸어가자 소담한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의 춤도.

사라락!

실바람이 전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여릿여릿 내리는 햇빛 사이로 몸짓을 풀어내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보인다. 귓불 발개진 그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흐른다.

가녀린 바람 한 줄기가 그녀의 몸을 스쳐 갔다.

사라락!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몸놀림이 두 팔을 물결치게 한다. 무릎과 허리 놀림이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거린다. 부드럽게 허공을 쓰다듬은 손끝에 신명이 깃들었다.

휘리릭! 사락!

유선의 춤사위를 지켜보던 진서연은 숨소리를 죽였다.

눈에 서린 열기에 의아함도 점점 더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해. 오늘은 언니가 달라 보여.’

근 한 달, 눈에 익은 그 형(形)은 분명 같다.

하지만 또 달랐다.

다시 만난 그날 이후 유선을 언니라 불렀다. 그 말에 짓던 미소와 볼 따라 떨어지던 눈물 한 방울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아직까지도 너무 잘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 짓게 된다.

그렇게 언니와 동생으로 보낸 한 달.

처음 유선이 춤출 때, 민망한 부분에서 눈을 돌릴까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유선의 결연한 표정엔 어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으니까. 그걸 마주 대하지 못하면 그녀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또 그어 버리는 일이다.

그러다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 돼.’

원색적이란 느낌은 달라진 게 없다. 지금도 그 동작을 보거나 출 때면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달라졌다.

그 얼굴 붉어짐이 이젠 창피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 마음이 받아들였다. 그제야 춤의 형을 올곧이 풀어낼 수 있었다.

춤을 통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낼 뿐이다. 이성에 대한 동경과 갈망도, 색정도 그저 마음속 한 부분이다. 의식과 통념에 사로잡혀 본질 대신 세상의 허울에 집착했음을 알았다.

그 이후 시선을 그대로 춤에 마주했고 자신의 춤 또한 그리했다.

한데 그렇게 만들어 준 언니의 춤이 달라졌다.

진서연의 눈이 점점 깊어져만 갔다.

‘오늘따라 내력을 많이 올렸어. 왜?’

그 의아함 담은 눈이 더욱 빛을 발했다.

같이 생활하고 춤을 춘 게 한 달이다.

무인인 그녀가 유선이 심법을 익히고 있음을 모를 수 없다. 처음엔 건강을 위한 호흡법 정도로 여겼다.

그러다 얼마 전 유선이 알려 준 게 있다.

-내가 심법 익힌 거 알지?

-아! ……예. 그게 알려고 한 건 아닌데.

-알아. 너 정도면 당연히 안다는 거. 무인도 아닌 내가 익혀서 놀랐지?

-예. 조금. 근데 호흡법 정도는 많이 알잖아요. 보니까 춤과 어울리던데 잘 배우셨어요.

-난 잘 모르지만 이건 그냥 호흡법이 아니야. 아주 귀한 심법 같아.

-예? 그런 걸 어떻게?

-누가 가르쳐 줬겠니?

-……방주?

-그래. 사연이 좀 있단다.

유선은 간략히 자신의 사정만 알렸다. 무윤과 관련해서는 가능한 말을 아꼈다.

진서연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이젠 공야성이 대단한 의원인 걸 안다. 담적괴(膽積塊, 간암)가 어떤 병인지도.

한데 길어야 육 개월이라 했는데 삼 년을 버티게 해 준 게 심법 때문이라니.

바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아닐까요? 전 그런 심법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에요.

-아니! 맞아. 내 몸인데 모르겠어?

-……그럼 정말 귀한 심법이 맞겠네요.

-그래. 그런 걸 선뜻 내주신 분이지. 줄 사람이 따로 있는 건데.

-예? 그게 무슨?

-이런! 내가 주책이네. 별 소릴 다 하고.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

지금도 방주를 생각하면 정말 모를 사람이다.

처음 만날 때도 그랬지만, 삼 년 만에 다시 만날 때도, 또 지금도 역시 의문투성이인 사내.

궁금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유선도 방주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나중에 소려를 믿고 맡길 사람이라는 정도만 들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이젠 이모라고 부르며 따르는 소려. 하지만 방주를 대하는 미소는 자신을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다.

세 살 아이가 그런다는 건 그만큼 진실한 모습을 보였다는 뜻.

그런 자가 악인일 리 없다.

거기에 시전에 벌이는 일 또한 그렇고.

그런 자가 건네준 심법이 오늘은 그 짙은 향기를 뿜어낸다.

유선의 유려한 발 디딤새가 빨라졌다. 한 걸음 짚어 뗀 다른 발에 온몸이 놀려지자, 드높게 뿌려진 손의 흐느적거림이 허공을 헤집었다.

사라락!

휘도는 춤사위는 어느새 풀어 헤쳐진 머리를 하늘에 흩날렸다. 한층 빨라진 두 팔의 날갯짓엔 조금씩 강해지는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몸 전체에서 뭔가 일렁인다 싶더니 미세한 진기 파동이 무형의 기운을 쏟아 냈다.

우우웅! 위잉!

순간 진서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탁!

부릅뜬 두 눈에 쩍 벌어진 입은 한동안 다물어질 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뇌리를 온통 헤집었다.

‘발경(發勁)!’

오직 그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곧 뒤따라온 의문.

‘……어떻게?’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 상식이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기(氣)를 외부로 표출하는 걸 통칭해 발경이라 한다. 그 종류와 방법은 다양하다.

일반 내공심법은 기를 느끼는 것에서부터 하단전에 쌓는 축기(蓄氣) 과정을 거쳐 발경에 이른다. 보통 일류에 들어서면 어렴풋이 알게 되고, 절정에 오르면 권기나 검기로 실전에 사용하게 된다.

유선이 하단전을 만든 건 안다. 아주 작지만 축기까지 한 것도.

굳이 분류하자면 이류 초입 정도 수준.

그 상태에서 발경도 기함할 일이지만 놀람은 그게 다가 아니다.

‘마치 외공 기운처럼 온몸에서 뿜어져. 게다가 전사경(纏絲勁)처럼 끊임이 없고.’

순간 쏟아 내고 끝난 게 아니다. 면면부절(綿綿不絶) 흐름이 계속된다. 거기에 몇 장 떨어진 자신이 감지할 정도로.

“하! 하아!”

유선의 거친 숨소리는 거의 극한에 달했다. 몸 안에 있는 내력 모두를 끌어올린 탓이다.

삼 년 동안 쌓아 온 바라타나티암 내력, 그간 자신의 생명을 이어 준 근원. 언제나 춤사위를 도와줄 만큼만 풀어냈다.

하지만 오늘은 무녀(舞女)가 아닌 무인이 되어야 할 자리.

유선도 남은 생이 얼마 없음을 안다.

그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고, 또 해야 해서 벌인 일.

‘서연이에게 전하고 싶어.’

이제 마음으로 받아들인 동생 진서연, 그녀에게 이 춤의 정수를 전하는 것.

서연에게 춤을 보여 주고 며칠 지나 같이 추게 됐다. 그러면서 시작된 한 달의 동거. 마음을 열고 서로를 알아 간 그 한 달. 서연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자 결심이 섰다.

‘서연이라면 전해 줄 수 있어.’

자신의 마지막 소원.

‘소려가 느낀다면! 엄마가 췄던 춤이 어떤 것인지.’

이 춤을 소려가 보고 배운다면 느끼리라. 이걸 해낸 엄마의 삶이 의미 있었다는 걸.

한데 자신이 조금이라도 느낀 이 춤의 정수를 소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건 서연밖에 없다.

무윤은 안 된다. 가르칠 순 있어도 남자인 그가 자신이 이룬 걸 보이고 느끼게 해 줄 순 없다.

거기에 또 다른 하나.

심법을 익힌 지 이 년이 넘어가던 어느 날 깨달았다.

쌓인 내력을 춤사위 밖으로 끌어내면 무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감히 상상도 못 했던 힘이 뿜어졌다.

다음날 바로 무윤에게 보여 주고는 물었다.

-저도 이런 게 되다니 놀랐어요.

-그러게. 나도 발경까지 갈 줄은 몰랐어. 진즉 무인이 됐으면 강호에 대단한 여협(女俠) 하나 나오는 건데 아쉽다.

-호호! 제가 아니라 이 심법이 훌륭한 거죠.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렇긴 해. 내 친구지만 대단한 놈이 만든 거니까.

유선은 문득 그동안 생각지 못한 게 떠올랐다. 그 친구가 왜 여인을 위한 심법을 만들었을지 이제야 감이 왔다.

무윤이 혼자 추는 춤의 위력을 똑똑히 본 그녀다. 비슷한 경지의 여자 무인이 같이 춤추는 모습이 바로 연상됐다.

-친구분이 이걸 만든 게, 누구한테 주라는 거였죠?

-하여간 웃긴 놈이야. 지 앞가림도 못하는 놈이 무슨.

유선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런 걸 제게 주신 거예요?

-신경 쓰지 마. 닳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생길 때 주면 돼.

유선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빤하게 상상되는 모습에 갑자기 장난기가 올라왔다.

-언제요?

-응?

-그래 가지고 언제요? 만날 생각도 없으시잖아요? 아녜요?

-……그거야 지금은 할 게 많잖아.

-그거 끝나면 만날 생각은 있고요?

-이거 왜 이래! 나도 남자야.

-남자 나름이죠. 여인 대할 땐 늙은 노인 같으시면서. 이러다 소려도 시집 안 보내는 거 아녜요? 걱정되네.

-뭔 소리야! 내가 못 해도 열은, 크흠!

-에고! 그 주변머리에 무슨! 하나만 건져도 다행이지.

-두고 보라니까! 보면 알잖아.

-딱 봐도 그때까진 불가!

-……!

연인에게 줄 걸 자신에게 전한 무윤.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무윤에게 작게나마 보답할 방법을 찾았다. 무공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한 건 안다. 하지만 그런 무윤도 할 수 없는 게 있다. 혼자이기에 못 하는 것.

남녀가 같이 추는 부분. 그걸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역부족인 걸 바로 절감했다. 서로의 기운을 뿜어내 교류할 수준이 안 된다.

‘서연인 다르지.’

소검후 후보까지 오른 서연에게 심법을 전한다면 감당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무윤의 성격상 그냥 두면 평생을 노인같이 살 게 빤하다. 그 끝은 모르지만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역할이라 여겼다.

이제 진서연의 눈빛이 달라진 지금 더 힘을 내야 한다. 무인으로서 그녀의 열정을 깨워야 하니까.

다시 하늘 향한 두 팔이 힘차게 뿌려질 찰나.

공야성은 다급한 음성을 나직이 흘렸다.

“말려야 하지 않겠어?”

무윤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는 유선의 표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그 눈빛이.

-아니. 이대로 두자.

“……!”

공야성도 입을 다물었다. 무인이 아닌 그도 느껴진다.

‘남기고 싶은 거야. 자신의 춤을. ……삶을.’

아직 어둠이 덜 깃든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별빛들. 그 빛 다 모은 것보다 더 환한 광휘로 다가오는 몸짓.

그건 몸짓이 아닌 몸부림이다. 마지막 불꽃을 환하게 불살라 새로운 불씨를 만들려는 염원이다.

그래서 지켜봐야 한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처럼 스러지더라도.

지금은 그래야 한다.

염원을 뿌려 내는 이 순간이 끝이라도.

묵묵히 그 끝을 지켜봐 줘야 한다. 소중한 인연을 함께 나눈 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다.

한참이나 정원에 빛을 발하던 불꽃이 조금씩 그 크기를 줄여 갔다. 온 세상 밝히던 따스함을 주변으로 다 흘려 냈다.

얼마 후.

스러지던 불꽃이 명멸해 들었다.

툭!

“언니!”

진서연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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