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진서연은 눈을 껌벅였다.
“왜 그쪽이? ……아!”
짙어진 어둠이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알렸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가 호법을 선 것도.
무윤은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먼저 물을 게 있다.
“조용한 곳이 필요하시면 알려 드리죠.”
“아녜요. 갈무리는 다 했어요. 한데 그분은?”
“계속 있겠다는 걸 들여보냈습니다. 들은 걸로 아는데.”
“아! 걱정하시겠네요. 바로 뵐 수 있을까요?”
“가시죠.”
진서연은 해야 할 말이 있음을 알았다.
“저……. 호법 서 주신 거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랜만에 옛 생각도 나고 해서 괜찮았습니다.”
“……?”
여휘가 전해 준 불무. 그걸 추는 진서연의 모습에 친구의 환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
소축 안, 유선의 침실.
“잘 끝난 건가요?”
“예. 무인에게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닌데 덕분에 소중한 걸 얻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제가 한 게 있나요. 그냥 보기만 했는데.”
진서연은 말 대신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지금은 그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이다.
‘따스하게 절 지켜봐 줘서 얻은 거랍니다.’
그때 그윽한 유선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방주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이분께 제 춤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알아서 해.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래서 말인데. 이분이 며칠 머물 곳이 없을까요?”
“……며칠? 그건 왜?”
“제대로 알려 드리고 싶어요. ……같이 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
무윤의 눈이 커다래질 수밖에 없다.
‘보는 건 몰라도 같이 해 본다고?’
의아한 시선은 바로 진서연을 향했다. 말을 에둘러 물었다.
“……머무를 생각입니까?”
진서연의 귓불이 금방 새빨개졌다. 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니 그게……. 우선 보기로는 했는데 하는 건 아직.”
유선은 쐐기를 박기로 했다. 눈 가득 진정을 실어 보냈다.
“제대로 보고 느끼려면 못해도 며칠은 걸려요. 근데 지금 아니면 전…….”
“……!”
진서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러면!’
유선의 마지막 말. 차마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거기에 해 보고 싶은 생각도 적지 않다.
아까 심상에 들었던 이유.
‘법무(法舞)라는 걸 잊어버렸지. 그래서 가능했어.’
지금은 그다음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든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또한 유선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서연아. 이건 창피한 게 아니야. 그냥 춤이야.’
잠시 후, 굳게 결심한 진서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해 볼게요. 그래요, 해 보죠 뭐!”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내일부터?”
“그러죠. 내일 다시 올게요.”
유선의 환해진 표정이 무윤을 향했다.
“방주님. 괜찮죠?”
“그렇기는 한데…….”
무윤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로 떠오르는 직감.
‘며칠이 아닌데.’
진서연의 법무를 보는 동안 신기심의공이 알려 줬다.
‘마음이 제대로 실렸어.’
심장의 은은한 울림이 춤사위의 장단과 같이했었다. 오랜 노력과 진정이 담겨야만 가능한 경지.
그 실력에 의지까지 더해진 상태. 거기다 같은 형의 춤.
유선이 작심한 바도 대략 짐작이 간다.
‘자신 대신 이어 주길 바라는 거지.’
그건 굳이 말릴 이유가 없고, 걱정은 두 가지다.
유선의 몸 상태. 그리고 또 하나.
‘왔다 갔다 하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자신은 물론 진서연도 곤란해진다.
무윤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유선은 일부러라도 애처로운 티를 내보였다.
“방주님, 부탁드려요. 예?”
잠시 생각하던 무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거절할 수 있는 청이 아니다. 곧 떠날 유선의 염원이 담긴 일인데.
“알았다. 대신 무리하면 알지?”
“그럼요. 걱정 마세요.”
무윤의 시선이 진서연을 향했다.
“거처는 알아보셨습니까?”
“아직요. 여기로 바로 왔어요.”
급한 마음에 바로 오느라 저잣거리 소문도 듣지 못한 그녀다.
“침주에 온 걸 아는 자가 있습니까?”
“여긴 없어요. 문파 어르신께는 말씀드렸고요.”
“그럼 이렇게 하시죠. 여기 있는 걸 남들이 알면 소저도 곤란해질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 정도 숨길 실력은 된답니다.”
“그쪽이 아니라 여길 드나드는 놈들이 문제죠.”
“……그럼?”
혹시 몰라 마련해 둔 게 있다.
“이 담 너머에 있는 빈 장원도 우리 건데 아무도 모릅니다. 유선이 거처도 옮길 테니까 거기서 같이 머무르시죠. 필요한 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진서연도 무윤이 뭘 걱정하는지 안다.
“잘됐네요. 다른 일은 없으니까 안에만 있을게요. 혹 나갈 일이 있으면 먼저 말씀드리죠.”
“알겠습니다.”
* * *
며칠 후, 하후가 내원.
“어머니, 도대체 다들 왜 그러는 겁니까? 그딴 흑도 놈 하나 가지고?”
하후태는 어제 돌아왔다. 한데 오늘 아침 참석한 가문 회의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설명해 주마.”
“아니 설명이고 뭐고, 솔직히 전 놈이 초절정이란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아니 설사 그렇다고 쳐요. 그래도 흑도 아닙니까? 근데 그런 놈을 보호한답시고 떠들어 대다니. 참 내!”
“말해 준다지 않았느냐!”
하후태는 이것저것 다 떠나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쓰레기라 여겼던 놈이 갑자기 초절정 무인이라니.
그것만 해도 울화가 터지는데, 가문의 어른이란 작자들이 나서서 놈을 보호한다고 떠들어 댔다. 물론 주로 큰형 쪽이긴 하지만 자기편이라 여겼던 이들 중에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기적인 보고를 받아 놈의 사업이 잘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침주 최고인 가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텐데.
세세히 듣고 싶지도 않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바로 쏟아 냈다.
“이럴 게 아니라 제가 아버님을 만나 볼게요. 가서 차근차근 말씀드리면…….”
순간 참다못한 서문채령의 화가 폭발했다.
“이놈아! 네 아버지란 작자가 그리한 게야! 이놈이 어미 속도 모르고 염장을 질러 대면 어쩌자는 게야!”
“……?”
잠시 후, 하후태는 나직이 말을 흘렸다. 어머니의 화가 좀 가라앉아 보인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정을 몰라서 그만……. 한데 아버님이 그랬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너 없는 동안 가문 사업 일부를 천기 놈이 맡은 건 알지?”
하후태의 입이 쫙 찢어졌다. 떠나 있는 동안 가장 기분 좋았던 일이다.
“그럼요. 계속 보고받았죠. 잘되면 어쩌나 했는데 죽 쑤고 있다면서요. 형님 실력에 그럴 줄 알았죠. 크크!”
“예전에 그랬는데 지난 석 달은 아니야.”
“예? 그게 무슨?”
“그놈이 맡은 쌀, 은(銀), 상수(湘繡, 호남 전통 비단), 약초 사업이 대폭 성장했다. 특히 전장(錢場) 수익은 절반이나 늘었고.”
하후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떻게 갑자기? 몇 달 전 보고에도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는데요.”
서문채령의 목소리에 얼음장 같은 한기가 서렸다.
“그게 다 청호방주 그놈 때문이다.”
“예? 그놈이 왜?”
“놈이 적운문과 날을 세운 이후로 천기가 나서서 은밀히 돕는다는 소문이 났어. 아마 둘이 모종의 거래를 했겠지.”
“어떤?”
“알아보는 중이다. 하여간 그 소문에 사람들이 여곽 상단과 거래하는 우리 상점에 몰린 거야. 그게 놈을 돕는 거라고. 전장은 놈이 직접 은 거래를 밀어준 것이고.”
하후태는 한동안 놀란 눈을 거두지 못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사실이다. 그래서 천기 쪽에서 어떻게든 그놈을 보호하려는 게야. 게다가 이젠 사업을 같이하는 것까지 생각하더구나.”
“그건 왜?”
“사업이 계속 커질 거라고 보는 거지. 한데 우리야 누구처럼 대놓고 뺏을 순 없지 않느냐? 그래서 보호해 주면서 거래를 늘리다가 서서히 가지고 오자는 게야. 우리 쪽 사람들도 거기엔 동조하는 편이고.”
“……!”
한참을 고민하던 하후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다.
‘보고만 있을 분이 아닌데.’
특히 은밀한 일 처리에 능한 분이다. 따로 서문가에서 보내 준 사람들이 있으니.
‘설사 초절정이라도 한 놈 없애는 건 일도 아닌데?’
그 나머지야 오합지졸 흑도 조무래기라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 궁금함에 바로 물었다.
“어머니, 가만 계신 겁니까? 무슨 이유라도?”
순간 서문채령은 섬뜩한 광망을 뿜어냈다.
“네 아버지와 천기 쪽 놈들이 촉을 세우고 있어. 게다가 놈은 초절정급이 확실해. 그럼 내가 움직일 패야 저들 눈에 빤히 보이지.”
하후태가 바로 떠오르는 건 하나다.
“그럼 외가에 부탁해 보는 게?”
서문채령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오지 않았느냐?”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널 따라온 이들 중에 있느니라.”
“……!”
하후태의 눈이 반짝였다.
서문가에서 보내온 이들과 같이 오긴 했다. 거기에 초절정 무인은 없는데 어머니가 저런다는 건.
‘신분을 감췄어.’
이제 물은 건 하나뿐이다.
“어느 정도 되는 분인지?”
“초절정 중반이라 했다. 걱정할 게 없느니라.”
“……!”
방을 나오는 하후태는 연신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답답했던 속이 확 풀어졌다.
‘그 새끼는 잊어버리면 되고. 이제 형님만. 크크!’
* * *
며칠 후, 청호방 방주실.
장로 하후모인은 티 나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참! 자네 어떤가? 이쯤이면 만나 볼 때도 된 거 같은데.”
“소가주 말입니까?”
“그러지.”
“그쪽은 만나겠답니까?”
“그건 아닌데 자네가 나서면……. 커험!”
하조문 사건 이후, 모든 건 하후모인과 논의해 진행했다.
소가주 하후천기와는 일절 대면하지 않았다.
만나 봤자 잘 진행되는 일만 꼬인다. 물론 지금도.
급한 건 무윤이 아니다.
‘속이 타겠지. 하후태가 왔으니.’
어떻게든 사업에 한 발 더 걸칠 심산. 그런 자 애간장을 더 태워서 손해 볼 게 없다.
게다가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지금이 좋습니다. 장로께서는 제가 불편하십니까?”
하후모인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심기를 건드리자고 꺼낸 말이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내 얼굴 보면 알 거 아닌가. 난 요즘 정말 즐겁네. 시전 돌아다닐 때마다 얼마나 흐뭇한지. 허허!”
“그럼 이대로 가시죠.”
순간 하후모인은 표정을 굳혔다. 이젠 물어야 할 게 있다.
“내 솔직히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죠.”
“자네가 진이와 친한 건 가문에서도 이젠 거의 알지.”
“하후진, 그놈은 친굽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근데 다른 생각이 있을까 봐요?”
“천기 측근 중엔 의심하는 이들이 있네. 난 그걸 불식시키고 싶네만.”
이러면 물을 게 있다.
“가주도 그렇습니까?”
“솔직히 형님 의중은 모르겠네. 그 말엔 그저 웃기만 하시니.”
무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이 아버님이 맞네요.”
“……무슨 소리지?”
“아들을 잘 안다는 말입니다. 제가 꼬드기면 그놈이 먼저 발길을 끊습니다. 그만큼 여린 놈이니까요.”
“……!”
하후모인은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하후모인이 나가자 바로 공야성이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가 보는 게 좋겠다.”
“어딜?”
“유선이 말이다. 너무 무리하고 있어.”
무윤은 유선을 일부러 찾지 않았다. 뭘 하려는지 대략 알기에. 자신이 가면 마지막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의원은 너잖아. 적당히 말려.”
“이놈아! 그게 안 되니까 하는 소리지! 당최 말릴 수가 없단 말이다!”
“그럼 놔둬라. 알잖아.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거.”
공야성은 떨리는 숨으로 말끝을 흐렸다.
“알지. 한데 아까 보니 몸이 너무…….”
“……!”
가 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