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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40화 (40/161)

40화

적운문주 설도승은 차가운 시선을 흘렸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시간 끌 게 없다. 이 자리 또한.

“전표도 찾았고 나름 분풀이도 했는데. 이만 정리하지.”

이제 모두에게 확실히 할 때가 됐다.

적을 확실히 해야 아군 될 자도 다가온다. 그것도 침주에서 가장 큰 곳이.

“배후가 있는지 조사가 남았습니다.”

“……배후?”

“소주는 여기서 삼백 리나 떨어져 있는데, 저나 방 주변을 잘 알고 일을 꾸몄습니다. 단독으로 그랬을 리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보지. 이상한 게 있으면 알려 주겠네.”

“저들을 데려가신단 말씀입니까?”

설도승의 표정이 우뚝 굳어졌다.

‘이놈이!’

수천 명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이럴 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바로 내력을 올려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모두에게 보이도록 섬뜩한 안광까지 뿜어냈다.

“크크! 어째 그 말은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소리 같군.”

“잡스러운 의심이 문주님 귀를 어지럽힐까 드린 말씀입니다.”

대답 대신 설도승의 걸음이 쓰러진 이들을 향했다.

타닥!

묵직하게 대지를 긁던 발이 홍가 삼 형제 앞에 멈춰 섰다.

설도승은 도를 뽑아 들고는 광기 같은 살기를 그대로 풀어냈다.

샤아아!

하늘 향한 도신이 햇빛에 번쩍였다. 선명한 칼날이 떨어져 내리자 핏물이 솟아올랐다.

샤아악! 파팟!

연달아 떨어진 목 세 개가 바닥을 뒹굴었다.

툭! 투욱! 툭!

떠들어 대던 좌중이 일순 고요해졌다.

“…….”

설도승은 무심한 눈가에 차디찬 한기만 담았다.

어차피 손을 보려 했었다. 자신 몰래 침주를 건드린 죗값으로.

“이제 그럴 일 없겠지?”

“……그렇겠네요.”

“다음에 보세.”

무윤은 상대를 바라보는 눈에 진심을 실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이전처럼.”

“……연락하지. 오래 안 걸릴 것이네.”

“그랬으면 합니다.”

“……!”

하지만 적운문은 바로 움직이지 못한다.

오늘 일이 벌어진 이상, 적운문이 신경 써야 할 건 자신만이 아니다. 관은 물론이고 하후가를 필두로 한 정파 무가, 그들의 날 선 시선이 가라앉기 전에 움직이는 건 바보짓이니까.

‘계속 미끼를 던져 놓고 살펴야지.’

한데 설도승이 돌아서자 무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아한 게 있다.

‘왜 그때 기운이 안 느껴지지?’

삼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내력이 아님에도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게 만들던 기운. 그때와 비교가 안 되는 자신의 경지임에도, 내력 외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무윤은 떠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도승이 떠나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허! 목을 뎅강 잘라 버리다니! 그것 참!”

“저런 걸 보면 하조문이 혼자 한 거 같은데.”

“저 속을 어찌 알겠나. 하여간 앞으로 시끄러워지겠어.”

“괜한 불똥 튈라. 우리도 몸조심하자고.”

“그래야지.”

“근데 이제 보니 청호방주도 만만치 않아.”

“당연하지. 저 실력인데 누가 건드리겠나. 적운문주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 게야.”

“그나저나 신난 건 하후가뿐이네.”

“당연하지. 아닌 밤중에 횡재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하후모인의 짧은 전음이 소가주 하후천기를 향했다.

-생각해 봤느냐?

-……제가 어쩌길 바라십니까?

-내게 물을 일이 아니다. 결정은 온전히 네 몫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았다. 이제 가자꾸나. 형님을 만나 봬야겠다.

-아버님을요?

-청호방주의 의중을 전해야지. 이 일의 내막도.

-……!

한편 청호방 일행이 거리를 다 벗어나기도 전, 성미 급한 연사구의 전음이 무윤의 뒤통수를 때렸다.

-적운문도 당분간은 몸조심하겠지. 그러다 언제쯤 움직일까?

-내가 점쟁이냐?

-야 인마! 예상이라는 게 있잖아!

-우리 할 일이나 잘하자고.

-……탐색이야 당연한 거고, 다른 건?

-몸을 달게 만들어야지. 급하면 실수가 나오니까.

-어떻게……. 아! 하후가와 친하게 지내서?

-또 하나 있다. 내가 침주에서 사라지면 황당하겠지. 나만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할 텐데.

-뭔 소리야?

-뇌양에 가 볼 때가 됐잖아. 그것도 몸을 달게 하겠더라고.

-그렇긴 하지. 근데 언제 갈 거야?

-멸마단이 몇 달 후에 올 거야. 그때.

연사구는 야릇한 미소를 그대로 흘렸다.

-크크! 거기 정보를 알려면 나도 가야겠지?

-……그 웃음 뭐냐? 갑자기 혼자 가고 싶어진다.

-뭐 별건 아니고.

-말해.

-너희 부모님한테 일러야지. 친구 두들겨 팬 놈이라고. 그럼 크크!

-같이 가도 되겠네.

-응?

-이번엔 살피기만 하고 올 거야.

-……!

한동안 침주 시내는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예의 주시만 할 뿐,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다.

두 달 후, 청호방.

깊게 눌러쓴 죽립에 남장을 한 여인이 찾아왔다.

진서연임을 알아본 악무길은 굳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방주를 찾아오셨소?”

“아뇨.”

“크흠! 다른 일이라면 돌아가 주셨으면 하오.”

“사과하러 왔어요. 조용히 뵀으면 해요.”

진중한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래도 악무길은 물어야 했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사문만 거론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죠. 그럴까요?”

악무길은 잽싸게 손을 내저었다. 그랬다간 나중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소축 안길로 접어들 무렵, 앞서 걸어가는 내내 고심하던 악무길의 신형이 돌아섰다.

“저기, 아무래도 이 말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무슨?”

“유선 누이는 많이 아픕니다.”

진서연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때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던데.”

악무길은 소려를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지어졌다.

“휴! 오래 버텨 왔지요. 한데 이젠 버거운 모양입니다.”

“예? ……그럼?”

“늦게 오셨으면 못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

소축 안 침실.

병색이 완연한 유선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오셨네요.”

진서연은 지을 수 있는 가장 화사한 미소를 애써 꺼냈다. 한참이나 고민했던 첫말이 흘렀다.

“고마워요.”

진서연은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애잔했던 표정도 지워야 하지만 첫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많은 말이 뇌리를 스쳤지만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고민이 사라졌다.

자신을 향한 유선의 미소. 그 미소 덕이다. 거기엔 자신에 대한 미움 같은 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순간 가장 진심을 보여 줄 말은 그냥 떠올랐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저 나름 꽤 하는 무인이에요. 이 정도는 끄떡없답니다.”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아뇨. 와야 했어요. 사과도 해야 하지만 그쪽 말이 맞았다는 걸 알려 줘야 하니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서연의 무릎이 꺾이던 찰나, 유선의 고개가 저어졌다.

“그러지 마세요.”

“아뇨. 사과할 일이에요.”

“이미 하셨어요.”

“예?”

유선의 그윽한 미소가 색을 더했다.

“들어올 때 얼굴에 쓰여 있더군요. 그거면 충분해요. 저도 잘한 거 없는데 그런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

두 사람은 예전 그 다실로 들어갔다.

진서연은 담담히 말을 풀어냈다.

“문주님도 필사본이 있다니까 놀라셨어요. 천 년이나 내려온 진경이 두 개나 있으니.”

“그러셨겠죠.”

“저 부탁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혹 다른 글귀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저희 건 제가 필사해 왔는데.”

이미 무윤에게 언질받은 게 있다.

“그러세요. 가져올게요.”

얼마 후.

진서연은 한 자 한 자 꼼꼼히 살펴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겸백 재질과 색채가 같아요. 아마 둘 다 영흥사에서 필사한 모양이에요. 글씨체를 보니 필사는 다른 분들이 하셨고.”

“다행이네요. 모든 게 확실해졌으니.”

진서연은 찾아온 다음 목적을 이야기하려다 망설였다.

‘무리한 부탁이야.’

이번 일로 느낀 게 많았다. 세상 모든 일을 자신이 설정한 잣대 안에서 움직이려 했다는 걸. 의식의 외연을 스스로 닫아 버렸음을.

그 자각이 깊어질 때쯤 새로운 도전이 떠올랐다.

‘이 춤을 다 춰 본다면!’

몸은 거부했지만 마음은 알았다. 그게 벽을 깨는 최선임을.

남몰래 개인 수련장에서 시도해 보길 수백 번. 하나 혼자임에도 너무나 민망한 부분에선 몸이 절로 멈춰 버렸다.

고민 끝에 떠오른 게 유선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또 그녀와 같이 그 춤을 추는 게 진정한 사과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젠 말을 꺼내면 안 된다. 그럴 몸이 아니니까.

그때 유선의 눈이 반짝였다. 가장 궁금했던 게 있다.

“혹시 해 보셨어요?”

진서연은 진솔한 사과를 위해 털어놓기로 했다.

“휴! 솔직히 많이 시도했는데 잘 안 됐어요. 너무 이상한 부분만 가면…….”

“시도한 게 어디에요. 마음먹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저 스스로 벽을 만든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걸로 깨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불자시니 이런 동작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되긴 어려울 거예요. 기녀인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진서연은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러니까요. 이걸 만든 분은 정말 얄궂은 거 같아요.”

“호호! 근데 해 보면 알아요. 남기신 뜻이 있다는 걸.”

“휴! 그래도 전 더는 어려울 거 같아요.”

진서연을 바라보는 유선의 눈이 깊어졌다.

‘도와주고 싶어. 그게 내 춤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하고.’

보타암이란 큰 문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이라 들었다. 그런 무인이 진심 어린 사과와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마음을 정한 유선은 차근차근 풀어 가기로 했다.

“참! 저도 법무로 추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래요? 보여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죠.”

“고마워요. 그럼 저도 보여 드릴게요.”

진서연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만 할게요.”

“용한 의원께서 적당히 움직이는 건 좋다고 했어요.”

“그래도…….”

“안 되겠네요. 직접 들어 보세요.”

“……?”

얼마 후, 불려 온 공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반 시진은 괜찮습니다. 그 정도 가볍게 움직이는 게 좋기도 하고요.”

유선의 환한 웃음이 진서연을 향했다.

“이제 됐죠?”

“……!”

무윤의 의아한 시선이 악무길을 향했다.

“둘이 후원엔 왜 갔대?”

“나야 모르지. 그렇게만 말하고 갔어.”

“……?”

소축 안 정원.

단아하고 정갈한 춤사위가 후원 가득 너울거렸다.

휘리릭! 휘릭!

법고무(法鼓舞)나 바라무처럼 전형적인 법무(法舞)라 할 순 없다. 불가에서 유래해 속화(俗化)된 다른 춤과도 달랐다.

천축 왕가의 춤 <바라타나티암>이 원형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춤의 형(形)은 중요하지 않았다. 바라보는 내내 불호를 읊조리게 만드는 춤사위.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의식도량(儀式道場)을 정화하는 뜻이 그대로 담겼다.

진서연은 하늘 높이 쳐든 손을 이리저리 흩뿌렸다.

사라락! 사락!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절로 흘렀다.

‘몸이 너무 가벼워.’

몸 따라 마음도 그랬다.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 버렸으니.

오랜만에 찾아든 편안함이 흐름을 돋우는 장단이 됐다.

휘릭! 사라락!

몸에 새겨진 춤의 형이 의식할 필요도 없이 흘러나왔다.

불심의 흥이 절로 돋았다. 한순간 춤이란 걸 잊어버렸다.

따라 흔들리는 소맷자락도 간지러운 바람 속삭임에 장단을 맞췄다.

사르르! 사락!

그저 춤사위의 흥겨움만 올곧이 심상에 머물렀다. 그 마음 이어받은 발도 사뿐히 지면을 스쳤다.

그렇게 뿌려진 손이 한동안 허공을 넘실거릴 즈음, 간결했던 춤사위가 서서히 허우적거려졌다.

흐트러진 자세지만 몸짓은 날아갈 듯 가벼워 보였다. 생각 자체를 잊어버린 듯, 의지에 따라 움직이던 손발이 그저 마음대로, 호흡대로 움직였다.

순간 지켜보던 무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심상에 들었어.’

무상한 열반을 꿈꾸듯 진서연의 눈이 몽롱해진 게 확연히 보인다.

가만히 정원에 내기 막을 둘렀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가려던 유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대로 있어. 가만히.

유선은 눈빛으로 물었다.

-……?

-좋은 일이야.

-……!

소복이 내리쬐는 햇살 따스함이 정원 가득 봄 향기를 뿌렸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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