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하후천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탁!
“여기까진 못 들은 걸로 해 주마. 나완 다시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어쨌든 선의로 온 자린데 무윤이 아쉬운 상황이 아니다.
계획이야 일부 변경하면 되고, 하후가 일도 급할 게 없다.
어차피 더 아쉬워질 놈은 하후천기고.
그때 하후모인이 불쑥 들어왔다.
“허허! 소가주. 벌써 얘기가 끝난 게요?”
“나눌 얘기가 없습니다.”
하후모인은 속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찌 저리 아둔할꼬! 듣고 나서 저래도 될 것을. 이러니 그 꼴인 게지!’
하후모인은 소가주 하후천기를 지지한다. 맘에 들어서가 아니다. 둘째 가모 서문채령과 서문가의 야심이 걱정돼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
그로선 어떻게든 대화를 풀어야 할 상황. 판단은 듣고 하면 된다.
하후모인은 자신이 직접 묻기로 했다.
“방주. 제안이 무엇인가?”
“소가주께 하려던 제안입니다만.”
“내게 말하시게. 듣고 아니면 잊어버리겠네.”
소가주 하후천기는 몸을 돌렸다.
“전 가 보겠습니다.”
하후모인은 말에 힘을 실었다. 진중함을 담아 시선을 맞췄다.
“듣고 가시게. 조카!”
소가주가 아닌 조카에게 하는 말이다.
하후천기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방주. 이제 말해 보시게. 다시 말하지만 난 듣고 잊어버림세. 가문을 걸고 약속하지.”
이미 하후모인이 어느 편인지 안다.
무윤은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당장은 내일 일을 같이하자는 것이고, 멀게는 같이 갈 방법을 모색하고자 함입니다.”
“뒷얘기부터 듣는 게 순서 같군.”
“아시겠지만 요즘 저흴 노리는 곳이 많습니다.”
“자네 적이 많아졌더군. 그 사업을 계속한다면 더 그럴 것 같고 말일세.”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편을 가를 생각입니다.”
“편을 가른다? 자네가 그런다고 갈라질까? 상대는 자네보다 훨씬 큰 곳이 많네. 지금 힘으로 가능하겠나?”
“그걸 내일 보여 드릴까 합니다.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후에 생각이 있으시면 다시 자릴 마련하시죠.”
“뭘 보여 준단 말인가?”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내일 보시면 압니다.”
“알았네. 하면 내일 같이하자는 건 뭔가?”
“삼만 냥 어치 위조 전표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후모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라? 지금 위조 전표라 했나?”
“그렇습니다.”
하후모인은 한동안 무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지?’
전장에 와서 대놓고 위조 전표를 거론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자가 아닌데. 하지만 눈빛과 표정은 흔들림 하나 없다.
참다못한 하후천기가 나섰다.
“지금 뭐 하는 수작이지? 전장의 장주이신 숙부님 면전에서 그런 말을 내뱉다니!”
“대신 진짜 전표를 담보로 맡기겠습니다.”
“담보?”
“위조 전표는 내일 단 하루만 쓰면 됩니다. 회수하면 그만이고, 혹 그러지 못해 문제가 발생하면 삼만 냥 처분은 소가주에게 맡기겠습니다.”
하후모인이 급히 껴들었다. 당최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허! 뭔 소린지 모르겠군. 회수를 못 하면 물론 사고의 위험은 있지. 하지만 일부러 만든 위조 전표니 그럴 가능성은 낮네. 한데 담보 처분권을 우리에게 일임한다? 그럼 우린 돌아온 위조 전표를 감추기만 하면 삼만 냥을 가로챌 수 있네. 그것도 아주 쉽게. 그걸 잘 알 텐데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겐가?”
“일임한 건 하후가가 아니라 소가주입니다. 본인이 결정하란 뜻입니다.”
하후천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황당한 제안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잠시 생각하다 말문을 열었다. 물을 말은 이렇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지?”
“편을 가르기 위해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걸 내일 확인하고 판단하시라는 겁니다.”
“도대체 내일 뭘 하려는 게지?”
“같은 얘기를 몇 번 하는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말씀 못 드립니다. 보시면 압니다.”
잠시 생각하던 하후천기는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알려 주지 않으면 이 거래는 안 한다.”
무윤과는 뭐든 같이하는 걸 상상도 안 해 봤다. 게다가 뭔가 끌려가는 모양새도 마음에 안 들고, 삼만 냥 처분을 맡긴다는 게 믿기지도 않았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나마 지금까지 소가주 자릴 지킨 힘은 이 꼼꼼함이라 믿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무윤도 더는 참지 못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탁!
“그러죠. 없던 걸로 하시죠.”
상황을 파악할 생각보다 문제가 될 걸 먼저 걱정한다. 자기 입장에서 납득이 안 되면 우선 의심부터 하고 보는 자.
특히 이번처럼 사안의 분석보다 자기감정에 치우친 결정일 때는 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답답한 놈이야.’
이렇게 시야가 좁고 앞뒤 꽉 막힌 자는 함께 갈 상대가 아니다. 당초에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하후태보다 나아서 선택한 것인데.
또 거기에 더해진 한 가지 이유.
‘소려 생각도 해야 하고.’
유선은 하후천기가 소려의 생부임을 알렸다. 당시 힘들어하던 하후천기가 찾아와 속을 털어놓을 때 잠시 연정이 생겼었다고. 하나 그 이후엔 배신감만 안겨 준 자라고, 미련은커녕 후회도 남지 않았음도 알렸다.
그런 자라 설사 문제가 없더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삼만 냥은 무조건 주고, 소려를 낳아 준 마음의 빚은 다 정리하려고 꾸민 짓인데.
‘배려할 가치가 없는 자다. 돈만 아까울 뿐.’
이런 자와는 안 보는 게 정답이다.
무윤은 하후모인에게 정중히 고개 숙였다.
“괜한 일로 심려만 끼쳤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
얼마 후, 전장에 홀로 남은 하후모인은 깊고 장중한 숨을 내쉬었다.
‘이리 끝내선 안 돼.’
굳은 결심 하나가 마음 가득한 걱정과 불안을 억눌렀다.
* * *
그날 밤, 청호방 방주실.
은밀히 찾아온 하후모인은 서약서와 위조 전표부터 내밀었다.
“그 계약, 우선 나와 하지. 모든 건 내가 책임지겠네. 여기 서약서일세. 자네만 날인하면 되네.”
“……소가주는?”
하후모인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왔네.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아이지. 하나 가문에 최선은 그 아이라 믿네.”
“……!”
전장 주인 하후모인은 무윤이 시전에 벌인 일의 가치와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안다.
돈을 만지다 보면 순수한 이상과 멀어지기 마련.
한데 그 간극을 풀어 나가는 해법을 현실에 풀어놓은 자.
‘이런 자라면 흑도라도 한 번은 믿고 가야 한다.’
그 길을 같이 걷고 싶은 마음이 내린 결정이다.
무윤은 짧은 한마디로 심정을 알렸다.
“어려운 결심을 하셨습니다.”
“자네가 그런 결정을 하게 했지.”
이럴 땐 더할 게 없는 지금 눈빛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가식이 없음을 알리려면.
“같이 가 보시죠.”
“그러세.”
이후 한참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문 얘기가 오고 갈 무렵.
무윤은 일어설 때가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응? 너무 늦어서 그러는 겐가? 난 괜찮네만.”
“아닙니다. 말씀드린 일을 할 때가 돼서요.”
“……위조 전표?”
“예.”
“……!”
어쨌든 무윤으로선 가장 적절한 상대를 찾았다.
하후천기가 아닌 하후모인으로.
일도 계획대로 진행하면 된다.
* * *
얼마 후, 침주 시내의 태원 객잔.
“뭐라! 삼만 냥! 확실한 게냐?”
“내 눈으로 은궤를 갖고 가는 걸 봤소. 한데 전장에서 나올 땐 빈손이더이다. 빤하지 않소.”
하조 표국 국주 홍재율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지금 잡으면 삼만 냥까지 먹는다!’
그의 번득인 시선이 가문의 숨긴 패, 셋을 향했다.
“끌 거 있겠냐. 오늘 처리하자.”
“당연한 거 아니오. 그럽시다.”
그때 표두 악지문이 황급히 들어왔다.
“국주님! 놈이 혼자 북쪽으로 은밀히 움직였답니다.”
“뭐라? 이 새벽에 어딜?”
“남은 이들이 따라갔습니다. 한데 이상한 소문이…….”
“소문?”
“놈이 형주(衡州)의 뇌도문과 은밀히 연락하고 있었답니다.”
“……!”
국주 홍재율은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럼 놈이 전표를 바꾼 게? 이런 시팔! 머뭇거리다간 닭 쫓던 개새끼 신세다!’
형주는 북쪽의 장사(長沙) 다음으로 호남에서 큰 도시.
그곳 최고인 뇌도문은 호남에서도 두 번째로 큰 사파.
자신들과 감히 비교가 안 되는 곳이다.
그런 곳이라면 침주에서 삼백 리 거리는 문제가 안 된다.
“빨리 놈을 쫓아라. 어서!”
세 형제의 대형 홍태형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형님. 너무 걱정 마시오. 우리가 설마 놓치기야 하겠소.”
국주 홍재율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아니! 우리가 알 정도면 적운문도 이미 움직였을지 몰라. 최대한 조심하되 신속해야 한다. 알겠어?”
“그러죠.”
“어서 가!”
* * *
두 시진 후, 침주 북쪽 망산 어귀.
무윤은 격한 숨과 함께 짐짓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헉헉! 너흰 누구냐?”
“호! 이제 포기하셨나? 잘 생각했어. 말만 잘 들으면 털끝 하나 안 건드려. 약속하지.”
“누군지 밝혀라!”
무리의 수장 홍태형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네놈 사는 게 먼저지. 품에 있는 거 내놓고 여기 지장만 찍어. 그럼 곱게 데리고 갈 테니까.”
무윤은 격노에 찬 분기를 참는 듯 나지막이 핏대를 올렸다.
“……적운문 개새끼들이냐?”
홍태형도 끌 시간은 없다.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거긴 아닌데 더 묻지 마라. 이제부턴 묻는 말에 대답만 해. 아니면 몸에 바람구멍 하나씩 늘어날 거니까.”
무윤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
홍태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흘렀다.
‘됐어.’
기가 꺾인 짐승은 더는 포효하지 못한다. 갈가리 찢긴 옷도 이미 검붉은 선혈에 물든 지 오래다.
삼면은 십여 명이 포위한 상황에 뒤쪽은 낭떠러지.
“그래야지. 이제 대화 좀 해 볼까. 우선 전표부터 내놓지.”
무윤은 잠시 고민하다 품에서 한 장을 꺼내 던졌다.
“……만 냥이다.”
“두 장 더 있잖아.”
“너흴 어떻게 믿지? 죽을 바에야 찢는 게 속이나 시원해.”
“크크! 이 바보야. 널 왜 죽여? 다른 지분 가진 놈들 설득하려면 무조건 살릴 수밖에 없어. 안 그래?”
“……누군지 밝혀라. 그럼 생각해 보지.”
초절정인 홍태형은 내력을 다해 서릿발 같은 살기를 뿜어냈다.
우우웅!
흘릴 수 있는 가장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좋게 말하는 건 여기까지. 이제 선택은 네 몫이다. 어쩔래? 네 발로 걸어갈래? 아니면 우리가 들쳐 메고 갈까?”
무윤은 고개를 숙인 채 나머지 전표 두 장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나직한 음성을 흘려 냈다.
“이걸 원하나?”
“그것부터지.”
“그래? 그럼 가져가.”
허공에 전표를 던지는 순간 무윤의 신형이 낭떠러지를 향했다.
휘익! 파팟!
“엇!”
다급한 경악성과 함께 홍태형의 신형이 공간을 갈랐다.
파팟!
하지만 상대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급히 절벽 아래를 살피던 눈이 부릅떠졌다.
‘넝쿨이 있었어.’
절벽 사이사이 공간을 헤집고 내려가는 무윤이 눈 가득 들어왔다.
홍태형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짓씹은 입술로 들끓는 분노를 뱉어 냈다.
“놈! 감히 날 우롱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주마. 기다려라.”
급히 달려온 둘째 홍문천이 물었다.
“형님. 어떡할까요?”
“혹시 모르니 넌 전표부터 국주 형님께 전해라. 나머진 추적한다.”
“예!”
신형을 날리던 홍태형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흘렀다.
이젠 온전히 살려 둘 생각이 없다.
‘선택은 네놈이 했다. 날 원망하지 마라.’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