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며칠 후, 늦은 저녁, 청호방 수련장.
“오늘은 이쯤 하자.”
숨을 헉헉대던 하후진은 힘든 얼굴을 더 구겨 댔다.
“뭐야? 아직 반도 안 했는데.”
“할 일이 많아.”
무윤은 말과 동시에 전음을 보냈다.
-오랜만에 날파리가 들었어.
하후진은 놀람 대신 고개만 갸웃거렸다.
-침주에 아직도 똥오줌 못 가리는 놈들이 남았나?
여곽 상단이 커지면서 초반에는 살수나 도둑, 주변을 염탐하는 이가 끊이질 않았다. 커 가는 사업은 물론 방주 침실에 은궤가 있다는 소문까지 더해졌으니.
하지만 오는 족족 무윤이 다 처리해 버리자, 일 년 전부터는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무윤은 내기 막을 약간 두르고는 말을 건넸다.
“오라는 놈은 안 오고 이번에도 엉뚱한 놈들 같은데.”
“오라는 놈?”
“그런 게 있어.”
삼 년을 들락거린 하후진이다. 은궤 소문에 놀라 물었을 때 일부러 흘렸다는 얘기에 짐작했었다.
“적운문?”
“신경 꺼라. 다친다.”
하후진은 말이 나온 김에 묻기로 했다.
“우리와는 어쩔 셈이냐?”
적운문이야 이미 복안을 세운 듯 보여 더 물을 게 없다. 궁금한 건 당연히 가문과의 관계.
최근 하후가에서도 마냥 쳐다볼 분위기가 아니다.
무윤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왜? 싸울까 봐?”
“네놈 속을 모르니 묻는 거잖아!”
대략이라도 알려 줘야 할 놈이다.
“적의 적은 뭐지?”
“……아군!”
“답이 됐냐?”
“뭐 그럼 다행이긴 한데. 분위기 심상치 않은 건 알지?”
무윤도 마침 물을 게 있다.
“그보다 하후태, 그놈이 온다며?”
하후진의 인상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래. 두세 달 후라고 하더라.”
“볼만하겠는데.”
“남의 일이라고 그러는 거 아니다.”
“남의 집 불구경인데?”
“야 인마! 난 이참에 집을 나올까 고민 중이야. 친구라는 놈이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정말 찬성하고 싶은 일이다.
“그래라. 있어 봤자 양쪽 다 널 이용하려고 할 텐데.”
“이용은 무슨!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당길 패 말고 버리는 패도 있다.”
“누가 몰라! 근데 그것도 내가 뭐라도 될 때 얘기지. 삼 년 동안 쥐 죽은 듯이 있던 거 알잖아.”
순간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이제 물을 때가 됐다. 답이 빤해 보이지만 직접 듣긴 해야 한다.
“둘 중에 고르라면 누굴 선택할 거야?”
소가주지만 가문 말고는 세력이 없는 하후천기.
오대세가인 서문가를 등에 업은 둘째 하후태.
하후진은 기도 안 찬다는 듯 바로 답했다.
“그것도 질문이냐?”
“……!”
침주의 정, 사 대표 무가인 하후가와 적운문.
적운문은 시간이 문제일 뿐, 같이 갈 수 없는 상대다.
적운문 또한 지금은 그걸 안다. 그런데도 가만있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무윤의 사업이 계속 커 간다는 것.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언제든 무윤만 죽이면 모든 게 굴러온다는 거다.
물론 무윤이 의도한 계획이다. 총력전은 무윤 외에 이렇다 할 무인이 없어 어떤 피해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래서 찾은 최선.
‘설도승만 죽이면 적운문은 힘을 못 쓴다.’
물론 먼저 설도승을 죽이는 것도 한 방법. 여차하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시전 사업을 생각하면 모든 건 물 흐르듯 인과가 얽혀 처리돼야 뒤끝이 없다. 지금은 유인책이 맞는 전략.
‘급한 놈이 지는 싸움이다.’
한데 일 년 전부터 은궤를 포함해, 매번 혼자 움직이는 것까지 다양하게 떡밥을 던져 설도승을 유인해도 움직일 기미가 없다.
‘정말 욕심이 많은 자야. 심기가 깊기도 하고.’
더 키워서 잡아먹을 욕심인 건 안다. 한데 그러다 놓칠 수도 있는 시기인데.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지. 다른 세력도 있으니까.’
각 지역엔 정사, 흑도 외에도 여러 무인 세력이 존재한다.
표국이 대표적인데 독립적인 곳보다 상단이나 정, 사 무가에 속한 경우가 많다.
그 외 세력은 우선,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
인신매매와 기루, 매음굴을 관리하는 야접.
은밀한 물건, 무공 등 돈 될 만한 것들을 거래하는 흑점.
소금 등 밀매를 주로 하는 염상과 음상.
살수들의 조직 살막.
이들은 지역에 따라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다.
침주에는 정파 하후세가의 힘이 커 야접과 살막은 없다.
남은 건 흑점과 밀매 담당인 염상과 음상.
형식적으론 독립이지만 실제 대부분은 적운문 산하다.
이 세 곳이 바로 적운문의 돈줄.
물론 흑도가 시전에서 걷어 상납하는 것도 크지만, 시전은 이 세 곳을 지키기 위한 기반으로서 가치도 크다.
어쨌든 그런 적운문과 이제 부딪칠 시기가 다가온다.
그리고 이곳 최고의 세력 하후가.
적운문을 제압한 이후에도 공생할 곳이다. 무윤의 목표는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하는 것뿐, 세력 확장이 아니니까.
그러자면 관계를 키워 나갈 자를 선정해야 한다.
썩 맘에 드는 자가 없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다.
‘소가주 하후천기.’
쓰레기 같은 하후태를 빼면 남는 건 그놈.
또 하후천기를 선정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 이유를 떠올리자 바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윤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우선 저놈들부터.’
지금은 귓가에 웽웽거리는 날파리부터 치울 때.
날파리치고는 꽤 뛰어나 보이는 자, 그 뒤를 쫓아야 한다.
방으로 들어갔던 무윤의 신형이 슬며시 밤에 스며들었다.
사라락!
* * *
다음 날, 청호방 방주실.
“뭐? 하조 표국?”
“그래. 거기 표국주란 놈하고 한참 쑥덕이더라.”
연사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이상하네. 아무리 사돈지간이라 해도 적운문이 네 일에 거길 끌어들일 리 없는데. 뭐 들은 건 없어?”
“듣지 못했다.”
“전음으로 한 모양이네.”
“아니, 내기 막을 쳤어. 뚫자면 걸릴 거 같아서 관뒀다.”
연사구의 호기심 어린 입꼬리가 올라갔다.
“호! 이거 재밌네. 그 정도 내기 막을 펼칠 자라면?”
“표국주 말고 세 놈 중 하나가 초절정 같았다. 움직임도 그렇고.”
“하조문에 초절정은 문주와 장로 한둘이라고 알려졌어. 그럼 장로 중 하나거나, 숨겨 뒀던 패겠지.”
옆에 있던 공야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또한 시전에 별도의 정보 조직이 있다.
“한데 적운문은 아무 움직임이 없어 보이던데.”
“제가 살핀 것도 그래요. 설진광하고 문주 동생 놈은 오늘도 술만 푸고 있고.”
공야성의 눈이 번득였다. 문주 다음인 두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건.
“하조문이 혼자 움직였겠어.”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공야성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어쩌겠느냐? 예전처럼 조용히 처리할 게냐?”
연사구도 거들었다. 시큰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야죠, 뭐. 적운문이 사주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은 전혀 없다. 지금 무윤의 실력을 가장 잘 아는 두 사람이니까.
그때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드러낼 때가 됐어. 신강에서 했던 것처럼.’
여휘와 신강에 가서 자리 잡았던 방법.
단 이 년만에 척고련을 신강 최고로 만들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딱 두 가지, 아니 정확히는 하나다. 나머진 따라온 것이니.
‘여휘의 압도적인 무력! 그걸로 무인들을 저절로 오게 했지.’
강한 무인은 모든 무사의 경외의 대상. 그것도 젊은 나이일수록. 그 미래가 더 기대되니까.
여휘의 무력과 미래를 본 자들은 제 발로 찾아왔다.
처음부터 모든 걸 드러내진 않았다. 그건 오히려 경계심을 부추겨 적을 모이게 만들기도 하니까.
이 년 동안 상황에 따라 몇 단계를 거쳤다.
물론 여기 침주에선 대상부터 다르다.
무인보다는 시전 사람들,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이들.
즉 여곽 상단이 더 잘되길 바라는데, 최근 적운문과 하후가 때문에 불안해하는 이들.
그걸 해결하고 더 결속시킬 방법.
이 모든 걸 만든 이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면 된다.
심사숙고한 결론을 꺼내 들었다.
“판을 키우자.”
“……키우자고? 어떻게?”
“시전 사람들이 너무 불안해해. 이젠 알릴 때도 됐어.”
연사구의 몸이 벼락 맞은 듯 들썩였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격한 흥분에 솟아오르는 숨을 그대로 입에 실었다.
“너! 정말이지?”
답 대신 무윤의 시선이 공야성을 향했다.
“이번에 은궤 들어올 게 얼마지?”
“그거? 이번엔 몇 달 치라 삼만 냥 정도.”
“그걸로 하자.”
“……?”
얼마 후, 세세한 논의가 끝나 갈 무렵, 연사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이해 안 가는 게 있다.
“이번 일에 굳이 하후천기를 끌어들일 필요 있어?”
“같이 갈 만한 놈인지 살펴볼 때가 됐잖아.”
“그건 알겠는데 위조 전표야 우리가 만들어도 되잖아. 그럼 깔끔한데 뭐 하러 거기다 부탁해? 그러다 일이 틀어져서 놈이 삼만 냥 꿀꺽하면 어쩌려고?”
“미끼지.”
“미끼?”
“그 정도 욕심에 잔대가리 굴리는 놈이면 밀어주는 게 아니라 이용할 놈이지. 그걸 알아보자고.”
“야! 그래도 돈이 삼만 냥이야!”
“네가 일만 잘하면 뜯길 리 없잖아.”
“야 인마! 변수 몰라, 변수! 일이 어떻게 딱 계획대로만 되냐고?”
“자신 없어? 그럼 계획 바꿀까?”
연사구의 의아한 시선이 공야성을 향했다.
“아니! 총관님은 왜 안 말리세요? 설마 이런 엉터리 계책에 동의하시는 건 아니죠?”
공야성은 짐짓 헛기침을 흘렸다.
“크흠! 엉터리 같진 않은데.”
“……총관님?”
“시간도 없는데 빨리 시작하지.”
“……?”
공야성은 무윤이 왜 그러는지 안다.
‘하후천기가 삼만 냥을 꿀꺽하길 바라는 게지. 그걸로 마음 빚을 털어 버리려고.’
아무리 친한 연사구라도 못 할 말이 있다. 유선은 무윤과 공야성 외에 소려의 아버지에 대해서 남들이 아는 걸 원치 않는다.
* * *
다음 날, 하후 전장.
전장주 하후모인의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은궤로 삼만 냥이라니!’
전표로 바꾸는 수수료도 적지 않지만, 가지고 있으면 교환가치가 올라가는 은이다. 그것도 삼만 냥이나.
그런 큰 거래를, 그것도 직접 은궤를 메고 온 이에게 환한 웃음은 기본이다. 흑도방주면 어떤가. 장사꾼에겐 돈 벌어 주는 이가 최곤데.
“허허! 오랜만에 오더니 큰 걸 가져왔군. 고맙네.”
“앞으론 자주 찾아뵐 겁니다.”
하후모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여곽 상단이야 주 거래가 성우 전장인데.”
“이제부터 반반씩 할 생각입니다.”
하후모인은 여러 번 눈을 껌벅거렸다.
“……반반? 은 거래량 전부?”
“캐는 양이 갈수록 커지는데 한 곳은 불안해서요.”
장사꾼이라면 이럴 땐 티 나게 웃어 줘야 한다.
“허허! 잘 생각했네. 위험은 분산해야 하는 법이지. 침주에서 우리만큼 믿을 만한 곳이 또 어디 있겠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시게. 내 세심히 살피겠네.”
“전표는 만 냥짜리 세 장으로 주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순간 장사꾼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젠 하후가의 장로로서 상대해야 한다. 상대가 은밀히 부탁한 만남을 주선할 때니까.
“알겠네. 저쪽 방에서 잠시 기다려 주겠나. 금방 처리하겠네.”
“알겠습니다.”
* * *
장원 내, 밀실. 무거운 정적이 한동안 방 안에 흘렀다.
얼마 후, 하후천기는 흉중에 품은 의문을 그대로 흘렸다.
“날 보자 할 줄은 정말 몰랐군.”
“이제 그럴 때가 됐으니까요.”
“그럴 때라? 무슨 말이지?”
“서로 도울 때 말입니다.”
순간 하후천기는 서늘한 눈빛에 섬뜩함을 더했다.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어느새 코웃음이 쳐졌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도움이라! 크크! 이 하후천기가 네놈 눈엔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흑도방주의 도움 같은 게 필요한 자로 말이야. 큭큭큭!”
“세상에 쓸모없는 게 있겠습니까? 쓰기 나름이겠지요.”
하후천기는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놈이 감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맘 같아서는 말보다 앞서 눈을 쳐들지 못할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놈이다. 그런 후에 꿇려서 고개를 조아리게 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이놈 때문에 가주인 아버지에게 들었던 훈계가 몇 번인지 세지지도 않는다.
-배워라. 흑도방주가 한 것이면 어떠냐?
-아버님. 아무리 그렇다고 그런 놈이 한 걸 따라 할 순 없잖습니까?
-허! 못난 놈. 누가 따라 하라 했더냐? 세세히 살피고 분석해서 가문 사업에 맞게 갖다 쓰라는 게지.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배우라는 것뿐이다.
-그래도…….
-이놈아. 왜 이리 아둔한 게야! 널 소가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보일 것을 찾으란 말이다. 그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망설여! 그걸 네 것으로 잘 만들면 아무도 널 흔들지 못한다. 이 아비 말뜻을 정녕 모르겠느냐?
-……!
그런 패배감을 가득 안겨 준 놈. 그런 놈이 서로 돕자고 한다.
저 밑까지 내려간 자존심이 분노로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