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직은 아닐세. 때가 되면 자네도 알게 되겠지.’
아련한 눈빛을 감춘 대주 정원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당 조장이 늦는군. 조사할 게 많은 모양이야.”
“올 때가 다 됐습니다.”
그때 마침 당서하가 들어왔다.
“대주, 저 왔어요.”
“오! 그래 알아보았는가?”
당서하는 조사한 내용을 상세히 알렸다. 물론 어제 청호방에서 있었던 일은 빼고.
잠시 후, 대주 정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허! 대단하구먼. 내 중원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런 방식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하는 건 처음 들어 보네. 그것도 흑도방주가 말일세.”
민초들을 돕는 게 가상한 건 당연지사. 하지만 그러면서도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팽중호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생각도 기발하지만 오래 실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 아닙니까. 지주나 유력 가문, 상단, 게다가 다른 흑도도 다 싫어할 텐데.”
당서하가 거들었다.
“그럼요. 알아보니까 침주에서 방귀 좀 뀐다 하는 곳은 다 싫어해요. 오죽하면 여기 흑도를 관장하는 적운문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겠어요.”
팽중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근데 어떻게 삼 년이나 버텼단 말인가?”
당서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누굽니까? 이 당서하가 그래서 확실히 알아봤죠.”
이젠 저 모양새가 뭘 바라는지 안다.
“그 사람 참! 또 술이 고픈 모양이구먼.”
“역시 대주님 최고!”
“알았네. 말해 보시게.”
“두 가지를 확실히 잡았어요.”
“두 개라?”
“우선 관을 확실히 구워삶았어요. 그리고 소문도 적당히 흘렸고. 머릴 정말 잘 썼더라고요.”
“소문? 그게 무슨 소린가?”
“뇌물을 줬는데 청탁은 아니고 억울한 일만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그랬대요. 근데 그걸 침주 사람들이 다 알아요. 일부러 흘린 거죠.”
“허허! 일거양득이로군. 청탁도 아닌 일에 그만한 돈을 썼으니 다른 곳엔 부담일 것이고, 관료들 또한 그렇겠지.”
팽중호는 다른 하나는 쉽게 떠올랐다.
“다른 건 백성들 지지겠군그래.”
“그렇죠. 우선 먹고 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주잖아요. 게다가 딴 고리대 전장과 다르게, 여긴 돈을 못 갚아도 일은 뺏지 않으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니 여곽 상단 일이라면 다들 발 벗고 나선답니다.”
팽중호는 가장 의아한 걸 물었다.
“세상일을 앞에서만 해결하는 게 아니지. 큰 곳에서 나서면 흑도방주 정도를 없애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그때 당서하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죠. 다른 덴 그렇다 쳐도 적운문이 움직이질 않아요. 빤히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도 안 건드리고 있대요. 문주 지시라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뭐 언젠가는 없앨 거라고 다들 그러긴 하던데.”
“다른 곳은?”
“살수가 몇 번 온 모양인데 별 탈 없는 걸 보면 실력도 꽤 있는 모양이에요.”
팽중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흑도방주가 절정이면 대단하긴 한데, 그 정도 가지고 어떻게?”
당서하의 눈이 빛을 더했다.
“뭔가 있는 거 같지 않으세요?”
“감춘 실력이 있다?”
“전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돼요.”
대주 정원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나도 궁금하구먼. 어차피 광마인 일로 만날 생각인데 가 보지. 진언도 그렇고 나도 궁금하던 차였네.”
“제가 연락할게요.”
“그러시게.”
* * *
같은 시각, 침주 저잣거리.
여인과 아이들이 분주히 오가는 장원. 어제 당서하가 살펴보고 나온 그곳이다.
거길 바라보는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미간을 구겼다.
설해련은 동생 설진광에게 물었다.
“저긴 아직도 잘되는 모양이지?”
그녀는 본가인 적운문에 오랜만에 들르는 길이다.
“예. 최근 들어 더 커졌죠.”
“도대체 아버지는 언제까지 기다리신대?”
소문주 설진광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더 키워서 한 번에 끝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저러다 훅 커 버리면? 아님 다른 곳에 붙을 수도 있잖아.”
설진광의 한숨이 깊어졌다.
“제 말이 그거 아닙니까?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데 더 놔뒀다간 딴 데서 언제 채 갈지 몰라요. 아니면 그놈이 먼저 달라붙을 수도 있고.”
“그런 기미가 있어?”
“티 나는 건 없는데 언제 그럴지 모르죠. 이젠 하후가도 눈독 들이는 판인데.”
“아버진 정말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그 방주란 새끼만 죽이면 끝이잖아. 그다음에 우리가 키우면 되는데.”
“제가 그 말을 왜 안 했겠어요. 근데 우린 그런 능력이 안 된다는데 뭐라고 해요. 참내!”
순간 설해련의 눈이 번득였다. 이번에 찾아온 목적을 슬며시 꺼내 들었다.
“진광아. 안되면 우리끼리 해 보는 건 어때?”
“……우리요? 누구?”
“누구긴. 네 매형하고 일을 꾸며 보라는 거지.”
“매형요?”
침주에서 약 삼백 리 남쪽에 자리한 광동 소주(韶州).
설진광의 매형은 그곳의 사파 무가 하조문의 소문주다.
월검문과 함께 소주의 양대 사파 무가 중 한 곳.
동생 설진광을 설득하자면 사실을 털어놔야 한다.
“사실 요즘 가문이 좀 힘들어.”
“왜요?”
“월검문이 너무 커지고 있어. 견제하려면 무사를 더 고용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하거든.”
설진광은 입을 삐죽이고는 투덜거렸다. 못 먹는 감 찔러보는 누나가 곱게 보일 리 없다.
“누님. 아무리 출가외인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뇨? 지금 내 걸 나눠 달라는 얘기잖아요?”
“야! 매형이 잘되면 너도 좋은 거지 뭘 그래!”
설진광의 휘휘 내젓는 손엔 짜증이 가득 담겼다. 먼저 앞으로 훅 걸어가 버렸다.
“됐어요. 빨리 가기나 해요!”
“야!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됐다고요!”
설진광에게 여곽 상단은 이미 손에 든 감이다. 떫어서 언제 먹을지 모를 뿐이지.
방주 일인 체제나 마찬가지라, 놈만 죽이면 언제든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걸 나눌 이유가 없다.
* * *
얼마 후, 침주 외곽의 산 어귀.
대주 정원은 무윤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자네 입장이 곤란할까 봐 여기서 보자 했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은 가볍게 화제를 풀어냈다.
“마인을 처음 접해서 많이 놀랐을 텐데. 괜찮은가?”
“예. 여기까지 마인이 내려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지. 호남 중북부야 간혹 출몰했지만 여기는 처음이니.”
“요즘 중북부는 어떻습니까?”
“북쪽인 장사나 악양이야 호북 쪽에서 내려오는 마인들이 원래 적지 않았지. 지금도 그렇고. 한데 최근에는 중부 쪽도 가끔 나온다네.”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본가인 뇌양은 중남부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정원은 이 질문엔 말을 돌려야 했다. 형산파 주변에서 자주 발생한다는 걸 알릴 수는 없으니.
“허허!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나. 벌써 발본색원했지. 특별한 징후 같은 건 없네.”
이러면 더 물을 수가 없다. 무윤은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대주께선 마인을 판별하실 수 있습니까?”
“판별? 그건 왜 묻는가?”
“초기에 알아볼 방법이 있나 해서요.”
“음! 마공도 각양각색일세. 최근엔 아주 일부분만 적용하는 사례도 많아서 나라고 다는 모르지. 하나 웬만한 정도는 몸을 살피면 알 수 있다네.”
“절정 정도면 어떻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어렵지 않네. 알겠지만 초절정이야 미세한 흐름까지 조절하니까 감추면 나로서도 찾기 힘들지.”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날 봐 달라고 해도 되겠어.’
하단전 내력으로는 지금 절정 중반 정도.
이 대주라면 자신을 판별할 수 있고 그걸로 대략 증명은 된다.
오면서 당서하에게 광동에 반년 정도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돌아올 때쯤 같이 뇌양으로 가 보는 것도 괜찮겠어.’
이제 뇌양의 상황을 파악할 시점이다. 가족을 만나는 건 아직 고민이지만 마인이 아닌 건 밝힐 때가 됐다.
상황을 봐서 대주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자면 올 때 꼭 들르게 만들어야 한다.
“그땐 정확하지 않아서 말씀 못 드렸는데, 생각해 보니 진언이 효과가 있는 거 같습니다. 혹 다음에 오시면 더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원은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가장 궁금했던 건데 먼저 좋은 답이 나왔다.
“오! 그런가. 나도 그게 아닌가 싶었네. 세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니 잘 연구해 보시게.”
“그러겠습니다.”
“허허! 올 때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군.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가지진 말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럼 우린 가 봐야겠군.”
“다음에 뵙겠습니다.”
잠시 후, 일행 뒤를 쫓아가던 당서하가 슬쩍 다시 돌아왔다.
“참! 이거 내가 끼어들 건 아닌데.”
무슨 얘긴지 대략 짐작이 간다.
“그럼 말씀하지 마시지요.”
“무슨 남자가 속 좁게 그래? 서연이 그런 애 아니야. 다시 오면 감정적으로 대하진 말아 줘. 걔도 충격이 컸을 테니까.”
“속에 쌓아 둔 건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럼 됐고. 아! 근데 그거 알아?”
“어떤?”
“그때 옆에 있던 단목가 무인 말인데. 다친 사람도 그렇고 옆에 있던 이도 조용히 갔어.”
“그 얘긴 왜?”
당서하는 야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냥 생각나서 해 본 소리야. 혹 신경이라도 쓸까 봐.”
“싱거운 분인 줄 몰랐네요.”
“하여간 간다. 참! 그 진언,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 노력은 해 줬으면 해.”
“그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예.”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어쨌든 마인은 신기심의공 기운에 반응했고, 내력이 더 커지면 여휘처럼 제어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지금 중요한 건 판별의 가능성이다.
은밀히 뿌린 내력에 미세한 반응이 있다면.
‘나만 마인을 알아볼 수 있지.’
물론 한 번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살펴볼 가치는 있다.
진언에 내력을 더해 읊조리면 달리 의심할 여지도 없고.
뇌양의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유용하게 쓰일지 모른다.
‘더 연구해 봐야겠어.’
* * *
며칠 후, 광동 소주의 하조문.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니까요. 아버지는 더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고, 진광이 놈은 그런 아버지를 거역 못 해요. 이번에 가서 세세히 살폈는데 지금이 딱 가로챌 기회에요.”
“정말 방주 한 놈만 잡으면 된단 말이오?”
“지분 사 할이 그놈 거예요. 지장만 찍게 하면 끝이죠.”
소문주 홍사준의 눈이 타올랐다. 아닌 밤중에 굴러떨어진 횡재다. 하지만 먼저 확인할 게 있다.
“크흠! 그래도 장인어른이 아시면…….”
설해련은 눈을 부라렸다. 남편 속이야 훤히 보인다.
“지금 나 떠보는 거예요? 그럴 거면 왜 말을 꺼냈겠어요! 이 사람이 정말!”
“크흠! 그렇긴 한데. 그래도 걱정이…….”
“할 때만 안 들키면 돼요. 이미 넘어왔는데 딸하고 사위를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리고 우리까지 낀 걸 알면 나머지 육 할 가진 놈들도 겁나서 더 빨리 내놓을 텐데 그걸로 무마해 봐야죠. 정 뭐라 하시면 나중에 뭐든 도와준다고 하면 돼요.”
“뭐 그렇다면…….”
설해련은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 들었다.
“근데 그 새끼 절정은 족히 넘었대요. 주변을 살피고 몰래 잡으려면 웬만한 자들론 안 돼요. 게다가 한동안은 우리인 걸 몰라야 하고. 가능하겠어요?”
홍사준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어디나 감춰 둔 패는 있기 마련.
“가문의 일을 몰래 처리하는 숙부님들이 계시오. 마침 우리 표국이 침주에 갈 일이 있는데, 그 틈에 도울 자 몇도 섞으면 깔끔하게 끝낼 수 있소.”
이쯤에서 설해련도 꺼내야 할 말이 있다. 빤히 보이는 일이지만.
“참! 근데 아버님이 허락하실까요?”
“큭큭! 그분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말은 이럴 때도 쓴다.
다음 날, 침주로 향하는 표국 인원이 늘어났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