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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34화 (34/161)

34화

‘어떻게 한다?’

바라타나티암 원본이 있는 걸 굳이 감출 이유도 없다. 심법이 적힌 필사본은 따로 있으니까.

이미 보타문주와 진서연에게 어떤 스님에게서 다른 진경도 받았다고 했으니, 그때 같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무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말을 틀었다간 더 꼬일지 모른다.

“춤을 묻는 겁니까?”

“그래요. 그대가 가르쳤나요?”

“제가 가진 것 중에 불무 진경이 있는데 내총관이 춤을 좋아해서 주긴 했습니다.”

“그거 어디서 났죠? 혹 그때 그 스님이란 분이 준 건가요?”

“그렇습니다만.”

진서연은 무윤의 시선을 마주했다. 두루뭉술 넘어갈 일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춤은 우리 보타문의 법무진경과 너무 유사해요. 아니, 같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이해할 수 없군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무공서도 아닌 그냥 불무 진경인데.”

은위경도 거들었다.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그건 검각의 무인은 무조건 배워야 하는 불무예요. 초대 검각주의 유훈이에요.”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뭔 소리야? 그 원색적인 걸 검각 여인들이 다 배운다고?’

이러면 물을 수밖에 없다.

“정말 그 춤 전부를 배운단 말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요.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무리 무인이라도 여인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일부만 전한 모양인데.’

바로 확인할 방법이 있다.

“그 불무엔 남녀가 같이 추는 것도 있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당연히 없죠.”

무윤은 생각을 정리했다. 일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

‘원색적인 부분을 뺐어. 그럼 다른 거나 마찬가지지.’

무윤의 시선이 유선을 향했다.

“진경을 가져오세요. 이분들 것과 다른 모양이네요.”

“알겠어요.”

유선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다른 걸 자신도 아니까.

잠시 후, 유선은 옥함에 든 <바라타나티암> 필사본을 조심히 건넸다.

“아주 오래전 겸백으로 만든 거라 부서질 수 있어요. 조심해서 봐 주세요.”

당서하는 눈을 껌벅였다.

“겸백이 뭐죠?”

“예전에 글을 적은 비단을 그리 불렀습니다. 아주 오래전이죠. 죽간을 쓰던 때라 보시면 됩니다.”

“……!”

세 여인은 조심스레 겸백을 살피기 시작했다. 범어로 써진 글이라 내용은 몰랐다. 그런데 그림을 살피던 어느 순간 진서연과 은위경, 두 여인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다만 석려옥은 뚫어지게 그림을 살폈다. 한 장 한 장 꼼꼼히.

은위경은 붉어진 얼굴 그대로 인상을 구겼다.

“이걸 어떻게 불무라고! 나 참!”

“판단은 알아서 하시죠. 어쨌든 이젠 됐습니까?”

진서연도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래된 서책인 건 알겠는데 정말 불쾌하네요. 신성한 불무에다 이런 추잡한 걸 더한 게 지금까지 내려오다니.”

순간 유선은 자신도 모르게 날 선 음성이 튀어나왔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건 추잡한 게 아니에요. 불문에 있어도 될 내용이에요.”

처음엔 자신도 그랬지만 근 삼 년을 해 온 지금은 느낀다. 저 안에 원초적 본능도 있지만, 그걸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바탕 위에 불가의 뜻을 세운 그림이란 걸.

그걸 알아 가는 게 죽기 전 마지막 과제라 여기고 몰두했는데, 보자마자 폄하하는 말에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 건 당연했다.

진서연의 눈에도 불꽃이 튀었다. 자신이 십오 년 넘게 수련한 불무를 더럽힌 그림에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추잡하지 않다고요? 이것과 시전에 떠도는 도색 그림하고 뭐가 다르죠? 그럼 그 도색 그림책도 추잡하지 않다는 건가요?”

진서연이 친언니처럼 따랐던 주태린, 그녀가 해적에게 죽기 전까지 가르쳐 주던 불무다. 언제나 그런 그녀를 떠올려 준 불무라 자신에겐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인데.

유선도 불꽃 같은 정광을 감추지 않았다.

“그딴 건 못 봐서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그림은 사람의 본성을 알아 가는 구도의 춤사위예요.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해 보지도 않고 비난하는 건 옳지 못해요.”

“안 해 봤다고요? 전 이 원색적인 부분을 빼고는 다 해 봤어요. 그건 정말 구도의 춤이 맞아요. 하지만 여기 있는 이런 춤이 그럴 리 없잖아요.”

“안 해 보셨잖아요. 전 해 봤으니 드리는 말씀이에요.”

기가 찬 진서연은 눈매를 꿈틀거렸다. 자신에겐 신념으로 달려온 무인의 길 자체가 잘못됐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 참을 수 없는 격한 분노가 입술을 짓씹게 했다. 흉중을 떠난 활화산 같은 분노가 주저리주저리 입에 담겼다.

“지금 나보고 이런 저속한 춤을 추라는 거예요? 아! 그쪽은 괜찮겠네요. 기녀 출신이니까 비슷한 춤도 해 봤을 테고. 아니 더한 것도…….”

“…….”

순간 좌중엔 암흑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얼마 후 유선의 눈가에 촉촉함이 더해 갈 찰나, 당과를 입에 문 소려가 쪼르르 달려왔다.

“응? 엄마 울어?”

유선은 급히 눈을 훔쳤다.

“아,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정말? 우는 거 아니야?”

“그럼. 소려야, 우린 저쪽으로 갈까.”

“응. 그래.”

소려가 사라지자 무운의 묵직한 시선이 진서연을 향했다.

하지만 진서연의 멍한 시선은 갈 곳을 잃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눈빛은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내, 내가 왜 그런 말을…….’

자신이 뱉은 말이 그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그 딸이 오고 있었는데. 그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절로 떠는 사시나무가 돼 버렸다.

그와 상관없이 무윤의 작정한 말이 뱉어지려던 찰나, 당서하가 잽싸게 껴들었다.

“잠깐! 우리 진정 좀 하자고. 서로 오해가 있다 보니 말이 좀 심했을 수도 있고…….”

무윤은 말에 차디찬 한기를 담았다. 이젠 말도 낮췄다.

“이게 그냥 넘어갈 상황 같나?”

당서하도 성난 눈을 마주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그녀가 아니다. 예리한 칼날이 담긴 시선을 그대로 던졌다.

“그럼 싸울까? 뭐, 나야 그런 다음에 말로 해도 괜찮은데, 이게 그럴 일은 아니잖아? 서로 말실수한 건데.”

“서로? 우리 내총관도 말실수한 게 있나?”

“내가 껴들 일은 아닌데, 나도 당가 무공에 저런 게 있어도 된다고 하면 화가 나겠어. 근데 여긴 여인들만 있는 불가 문파인데 그런 걸 해 보라고 한 건 솔직히 내총관도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었어.”

무윤의 고개가 단호히 저어졌다.

“아니! 저건 불가의 법무가 맞다. 천축 왕가에서 내려오는 춤을 법무로 해석한 게 바로 저 <바라타나티암>이야. 우리 내총관은 실수한 게 없어.”

진서연을 애처로이 바라보던 은위경이 나섰다.

“우리 거엔 당연히 그런 게 없어요! 우리 그만해요. 이제.”

그때 석려옥의 눈이 번득였다. 굳게 결심한 듯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며 입술을 짓씹던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아니! 저건 우리 보타문에 있어.”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한동안 멍했던 진서연도 초점 찾은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은위경은 짜증 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사저, 무슨 소리예요? 그딴 게 우리한테 있다니?”

“난 저 진경을 서고에서 봤어.”

은위경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멍하니 벌린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사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떻게 저런 게……?”

“나도 보자마자 잘못 들어온 건 줄 알고 각주께 보고했지. 한데 그러시더라. 초대 문주께서 꼭 보관하라고 하신 거라고.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순간 진서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문득 떠오른 생각.

‘려옥이는 다 배운 후론 저 법무를 하지 않았어. 설마!’

한동안 망설이던 진서연의 말문이 떠듬떠듬 열렸다.

“……정말이니?”

“그래.”

“그래서 넌 그 법무를 안 한 거고?”

“초대 문주가 그러셨다는데 남들한테 알릴 수도 없었어. 나 혼자 알고 있을 수밖에. 근데 그걸 보고 나선 도저히 못 하겠더라.”

“…….”

침 넘어가는 소리 하나 없는 정적이 한동안 방 안에 흘렀다.

얼마 후, 진서연은 무윤에게 다가갔다.

정중히 고개 숙이고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사문에 다녀오겠어요. 사과는 그때 제대로 할게요.”

“…….”

무윤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비장한 표정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멀찍이 떨어져 진서연을 따라가던 석려옥의 굳은 얼굴도 펴지질 않았다. 그녀의 눈 또한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속 깊은 한숨을 남몰래 내쉬었다.

‘려옥아.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한순간 욕심이 결국 그 말을 내뱉게 했다.

소검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진서연. 어릴 적부터 가장 친했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건, 서로 간의 격차를 인지하고부터다.

그때부터 시작된 질투와 시기를 깨닫는 순간 자신이 미치도록 미웠다. 그걸 떨쳐 내려고 드린 백팔 배가 몇백 번인지 모른다.

이제 돌아가면 소검후를 뽑는 경연이 시작된다. 그런데 아까 진서연이 말실수하는 걸 본 순간, 참아 왔던 욕심이 슬그머니 독아를 드러냈다.

진서연이 그 불무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안다. 그런 불무의 근원이 원색적인 것임을 안다면. 그녀를 지탱했던 한 축이 크게 흔들린다. 그걸 깨닫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석려옥의 축 내려앉은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나무아미타불.’

다음 날, 침주 시내의 한 객잔.

“대주.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갑자기 광동으로 내려가라니요.”

“허! 위에도 다 생각이 있겠지.”

탁자 위에는 멸마단 지휘부에서 내려온 서신이 놓여 있었다.

부대주 팽중호는 굳은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주 정원과는 의형제 사이다. 오 년을 넘게 동고동락하며 쌓인 신뢰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의형에게 오늘은 속에 있는 얘기를 일부라도 털어놓으리라 작심했다.

“이번 광마인 일로 내려온 김에 호남 중북부를 조사하겠다고 보고하자마자 온 전갈입니다. 하지 말란 뜻이나 마찬가집니다.”

대주 정원은 옅은 한숨을 흘렸다.

“너무 단정하지 말게. 광동도 전혀 없다고는 못 하네.”

“그렇긴 합니다. 한데 정말 그 뜻이라 보십니까?”

대주 정원의 눈이 깊어졌다.

“할 말이 있는 게로군.”

무림맹 멸마단에는 열다섯 개의 대가 있다. 그중 가장 강한 세 곳을 꼽으라면 무조건 삼대도 들어간다. 대주와 부대주 모두 초절정에 대원 여섯 모두 절정 중상급, 그간 이룬 성과도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 삼대 또한 다른 대처럼 주로 중원 서북쪽에서 활동했다. 신강과 가까운 그쪽에서 주로 마인들이 출몰하니까.

그러다 이번 호남행은 팽중호가 강력히 요청한 것이다.

이번에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다.

‘공야의숙을 조사해 봐야 하는데.’

십여 년 전, 팽가 장로인 아버지 서재에서 우연히 봤던 이해할 수 없는 내용. 그건 장사의 공야의숙에서 왔던 서류다.

뭔지 물었을 때 곤혹스러워하던 아버지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 공야의숙에 가 보려고 한 것인데.

갑자기 마인의 활동이 거의 없는 최남단 광동을 살펴보고 보고서를 올리라니. 그것도 기한은 반년이다.

팽중호는 대주를 바라보는 눈에 진심을 실었다.

“전 호남 북쪽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대주 정원의 눈가에 잠시 아련함이 스쳤다. 지금은 말을 아껴야 할 때다.

“이번 일부터 끝내세. 내 단주께 따로 말을 넣겠네.”

“……알겠습니다.”

멸마단 단주는 소림의 장로 각운이다.

대주 정원은 그에게서 오대세가와 공야의숙에 대한 얘기를 대략은 들어 알고 있었다.

팽가에서 그 일을 담당했던 장로가 의제 팽중호의 아버지인 것도.

또한 세상에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일인 것도.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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