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33화 (33/161)

33화

당서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맺혔다. 멸마단에서 그녀와 가장 친한 여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

“진 조장 여기 있었네.”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진서연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많은 여인이 오가는 대문에서 당서하가 나왔다.

“당 언니. 왜 거기서 나와요?”

이미 나오면서 둘이 싸우는 걸 본 당서하다. 평소 성격대로 대놓고 찔러 댔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나저나 둘이 또 싸웠어?”

“아뇨. 싸우기는요. 그냥.”

“너흰 항상 그러다 싸우잖아. 이제 가면 서로 못 볼 텐데 그러지 좀 마.”

눈치를 보던 은위경이 나섰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어 그걸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조장님, 저긴 뭐예요? 여인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데. 기루 같지는 않고.”

“어딜 봐서 기루야. 어린 애부터 나이 많은 분들도 있는데.”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저기 뭐예요?”

당서하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그 다음다음에 할 말 때문이다.

“자수 가르치는 학원이야. 오직 여자들만.”

“그래요? 근데 여기 상수(湘繡, 호남 전통 비단 자수)야 유명한 거 알지만 저렇게 많이 배우는 줄은 몰랐네요.”

“저긴 공짜거든.”

“예? 저 많은 사람을 공짜로 가르친다고요?”

“그래. 무료로 가르치다 실력이 되면 일을 줘. 안 되면 집에 가서 연습하다 다시 와도 되고.”

“와! 누군지 좋은 일 하네요. 여인들 일거리 찾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당서하는 상황이 비슷한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기도 여인들이 많지? 저긴 약초 판별법 가르치는 곳이야. 물론 여인과 아이들은 공짜고.”

“야! 그거 괜찮네요. 다들 아는 것만 캐는데 저렇게 배우면 정말 좋겠어요. 근데 저기도 같은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래.”

“와! 돈이 많이 들 텐데 누가 이런 좋은 일을 하죠?”

“누구 같아?”

“글쎄요. 아! 하후가?”

“아니.”

“그럼 누구예요?”

당서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제 봤던 흑도방주.”

세 여인 모두 눈을 부릅떴다.

“예? 그게 정말이에요?”

대주의 지시는 알릴 게 아니라 둘러댔다.

“어제 술 마시다 보니까 주변에서 다들 그자를 칭찬하는 거야.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많고. 너무 이상하잖아. 그래서 캐물었더니 정말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거야. 그래서 알아보러 나왔지.”

석려옥이 궁금해 나섰다.

“좋은 일이란 게 어떤?”

당서하는 씩 웃어 보였다. 아까 셋이 나눈 대화도 들었고 그 의미도 대략 짐작했다. 그러니 더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궁금하지?”

“예? 그거야…….”

“가면서 얘기해 줄게.”

“어딜?”

“너희 청호방 갈 거였잖아. 같이 가 보자고. 나도 그 자식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거든.”

“……들으셨어요?”

서른다섯인 당서하는 이들보다 한참 위다. 실력도 물론.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렇게 떠들어 대는데 안 들렸겠니? 어디서나 말조심해, 이것들아!”

“……!”

잠시 후, 청호방 장원.

악무길은 어쩔 줄 몰라 눈만 멀뚱멀뚱 떴다. 그냥 아리따운 여인 넷이 아니다. 나름 무공이 늘었다고 자부하는데도 기가 팍 죽어 버렸다.

“저, 방주는 지금 없는데.”

“오래 걸려?”

“아뇨. 광산에 갔는데 한 시진 정도면 올 겁니다.”

“그럼 안에서 기다려도 되지?”

“그, 그거야 괜찮은데 소저들이 있을 만한 데가…….”

그때 옆을 지나가던 유선이 다가왔다.

“부방주님. 방주님 손님이시면 제가 모실까요?”

악무길의 입이 쫙 찢어졌다.

“그래 줄래? 귀한 분들이신데 여인들이라 내가 좀 그래서. 잘 부탁해.”

유선은 다소곳이 고개 숙였다.

“내총관 유선이라 해요. 제가 모실게요.”

“부탁해요.”

유선이 여기 있는 건 몇 명밖에 모른다. 내총관이란 직함은 혹시나 해서 걸어 놨을 뿐이다. 이럴 때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잠시 후, 아담한 정원이 있는 문을 지나자 누군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엄마를 발견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엄마!”

“에고! 우리 딸. 왜 여기 있어?”

이제 두 살이 된 소려는 방긋 웃었다.

“꽃 봤어.”

당서하는 몸을 숙여 소려와 눈을 맞췄다.

“아이고! 예쁜 공주님이네. 이름이 뭐야?”

“소려!”

“그래! 야! 엄마 닮아서 크면 예쁘겠는데!”

소려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지금도 예쁘다고 했는데.”

당찬 무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급히 머리를 굴렸다.

“그럼! 언니 말은 크면 훨씬 더 예뻐진단 소리야.”

“정말?”

“그럼! 이 언니가 딴 건 몰라도 거짓말은 못해. 진짜야.”

“헤헤! 기분 좋다!”

당서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가장 자신 없는 게 우는 아이 다루는 법이다.

잠시 후, 아담한 소축 안 다실.

유선이 차를 내오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당서하가 슬쩍 물었다.

“여길 방주가 쓰나요?”

잘 꾸며진 걸 보니 방주가 기거하는 공간 같은데 다실 내부는 여자아이를 위한 장난감과 그림이 대부분이다.

그림은 소려란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시기마다 그려 걸어 놓은 듯했다.

유선은 다소곳이 미소 지었다. 어떤 여인들인지 들은 터라 언사에 신중해야 한다.

“사실 여긴 청호방 장원이 아니에요. 방주께서 저와 제 딸이 있을 곳으로 마련해 주셨죠. 근데 다른 곳은 여인분들이 계시기엔 마땅치 않아서 이곳으로 모셨는데. 혹 불편하시면…….”

“아, 아녜요. 좋아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근데 방주하고는 어떻게?”

유선은 살포시 웃음 지었다.

“전 그냥 내총관이에요. 아시겠지만 여긴 거친 곳이라 제 딸 때문에 방주님이 배려해 주신 것뿐이랍니다.”

이러면 물은 자가 켕기는 법.

“흐흠! 뭐 그걸 물은 건 아닌데.”

그림을 유심히 보던 석려옥이 물었다.

“이 그림 누가 그린 거죠?”

그림에 자질이 있고 좋아하는 그녀라 보는 안목만큼은 자부하는데 선과 색감이 보통 솜씨가 아니다.

“방주님이 그리셨어요. 딸아이 커 가는 모습을 남긴다고.”

석려옥의 눈이 커다래졌다.

“방주가 직접 그렸다고요? 정말인가요?”

“예. 전 나가 있을게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부르세요. 그럼.”

“아! 예.”

유선이 나가자 당서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인인 걸 보니 방주 애인 같은데 친딸은 아닌 모양이네.”

“그러게요. 기품도 있어 보이는 게 보통 여인 같진 않은데.”

“근데 어디 아파 보이지 않아? 혈색이 안 좋던데.”

“그리 보였어요.”

“뭐 기다려 보자고. 아! 술이나 좀 달라고 할까.”

은위경은 눈을 살짝 흘겼다.

“언니!”

“아! 알았다고. 그냥 있지 뭐.”

얼마 후, 장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은위경은 창을 조금 열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머! 그 내총관인데 춤을 잘 추네요.”

“춤?”

“참 보기 좋네요. 소려라 그랬나. 딸이 참 좋아하네.”

“그래? 나도 좀 볼까?”

그런데 춤사위가 한동안 계속될 무렵, 한참 포근한 미소를 짓던 당서하가 눈을 껌벅였다. 옆에 있는 은위경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아서다.

“위경아. 왜 그래?”

은위경은 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라앉은 음성을 흘렸다.

“두 분 사저! 저것 좀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왜?”

“와서 보세요. 아니, 보셔야 해요.”

“……?”

의아한 진서연과 석려옥도 창가로 향했다.

잠시 후, 셋을 연달아 훑어보던 당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위기가 왜 이래?’

경직된 세 여인의 표정은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녀들이 뚫어지게 보는 건 내총관이란 여인의 춤.

‘뭐가 있나?’

엄마의 춤이 끝나자 소려의 앙증맞은 손이 움직였다.

짝짝짝!

“우리 엄마 춤 최고!”

유선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괜찮았어?”

“그럼! 보기 좋아. 헤헤!”

딸 소려의 머리를 쓰다듬던 유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후! 이젠 한 번도 힘들어.’

갈수록 힘들어지는 몸이 느껴진다. 공야성이 지어 준 약과 무윤이 가르쳐 준 심법, 그리고 가끔 해 주는 진기도인으로 버티고 있지만 남은 생이 얼마 없음을 여실히 느낀다.

물론 이것만도 큰 행운인 걸 안다. 무윤을 만나지 못했다면 딸 소려가 태어나지도 못했을 텐데. 하지만 딸이 커 가는 모습을 단 하루라도 더 보고 싶은 갈망은 어쩔 수가 없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딸 소려가 조금 더 커서 직접 하는 걸 보기만 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은데.

애처로운 시선이 저 먼 하늘로 향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게 해 주세요.’

그때 다실의 문이 열리고 넷이 걸어 나왔다.

유선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진서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굳은 표정으로 진중한 음성을 흘렸다.

“뭐 좀 물어볼게요.”

“예. 그러세요.”

“그 춤 어디에서 배웠죠?”

“……춤이라면?”

“지금 한 거, 그걸 묻는 겁니다.”

순간 유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말해도 되나?’

무윤이 감추라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천 년이나 된 귀한 것인데 함부로 알릴 수도 없다.

게다가 무윤이 전한 심법의 가치는 그녀 몸으로 느낀다.

처음 공야성은 아이는커녕 반년도 어렵다고 했다. 한데 삼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매번 아쉬워했다. 조금만 일찍 발견하고 심법을 익혔더라면 완치까지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유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지만 살핀 네 여인은 무작정 해코지할 자들이 아니다.

“왜 그러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물은 그대로예요. 그 춤을 어떻게 알았죠?”

잠시 생각하던 유선은 적당한 답을 골랐다.

“전 원래 춤과 노래를 하는 기녀였는데 어떤 분이 책자의 그림을 보여 주시고는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게 누구죠?”

“저 왜 물어보시는지부터 말씀해 주시면…….”

진서연은 사실대로 알리기로 했다. 그래야 답도 요구하니까.

“그대가 춘 춤 우리 것과 같아요.”

“……춤은 비슷할 수도 있는데.”

“아뇨. 비슷한 게 아니라 같다고요. 전체 순서도 동작도 완전히 같아요. 이게 무슨 얘긴지 이해가 안 되나요?”

유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 년 전 것이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어졌을 수 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됩니다. 우리 문의 것인데 그게 유출된 거 같으니까요. 아니 유출됐어요. 완전히 똑같으니까.”

순간 유선의 눈가가 세차게 떨렸다.

‘무림인들인데.’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없다. 분명 방주가 보여 준 원본은 아주 오래된 것인데, 혹시 그 옛날에 어떤 사건이 있었을지 모른다. 바로 떠오르는 생각.

‘더 말하면 안 돼. 방주께서 위험해질지 몰라.’

유선은 입술을 악물었다.

“전 그냥 보고 배웠을 뿐이에요. 그 이상은 몰라요.”

진서연의 눈이 번득였다. 가장 먼저 물을 게 있다.

“혹시 방주가 가르쳐 줬나요?”

그때 작은 눈망울을 글썽이던 소려가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타다닥!

“엄마! 무서워!”

“아냐! 괜찮아. 아무 일 아니야.”

“정말?”

그때 입구에서 낭랑한 음성이 흘렀다.

“그럼. 소려야. 아무 일 아니야!”

언제 울상을 지었는지 모르게 소려의 얼굴이 환해졌다. 쪼르르 달려가 팔을 활짝 벌렸다.

“삼촌!”

“그래. 우리 소려. 잘 놀았어?”

“응! 근데 저 언니들 무서워!”

“아니야. 그냥 어른들이 얘기 나누는 거야. 괜찮아.”

“정말?”

“그럼, 삼촌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니! 삼촌 거짓말 안 해, 헤헤. 나도!”

“참! 악 삼촌이 맛있는 거 준다고 오라던데.”

“정말? 나 갔다 올게!”

“그래.”

소려가 뛰어나가자 무윤의 묵직한 시선이 진서연을 향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서연도 굳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알아볼 게 있어서 왔는데 지금은 다른 용무가 급하네요.”

“뭡니까?”

“저 여인의 춤, 그쪽이 가르쳤나요?”

이미 밖에서 대략 들었다. 바로 짐작 가는 상황.

광동 영흥사에 있던 여승이 절강 주산군도로 가서 보타암을 만든 시기가 딱 천 년 전이다.

‘바라타나티암 불무가 보타암에 전해졌어.’

천마라 불린 내 친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