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정말 내가 그랬습니까?’
방금까지 광마인이었던 석상영의 눈은 멍하니 앞을 향했다.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눈빛에 담았다.
지난 수십 일간의 기억이 주마등이 되어 머리를 스쳤다.
가문의 복수를 마치고 죽으려던 순간, 그때부터 사라졌던 기억이 한순간에 휘몰아쳤다.
그 광풍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흐린 정신이 잘못된 기억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니까.
그 답을 줄 자가 앞에 있다.
무릎 꿇은 그대로 하염없이 무윤의 입만 바라봤다.
무윤은 그 눈이 뭘 물어보는지 알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사실대로 알려 주는 것.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멍하게 있던 석상영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득한 어둠이 온 세상을 덮쳤다.
‘……나였구나. 그게 나였어.’
눈가에 서서히 맺혀 가던 물기가 한순간 주르륵 흘러내렸다. 참지 못한 울음에 입가는 제 갈 길을 잃고 이지러졌다.
하지만 더 울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목 놓아 울고 싶지만 죽어 간 이들의 마지막 절규가 가슴을 찢어 댄다. 슬퍼할 자격도 없음을 뼈저리게 각인시킨다.
그저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다. 가족을 잃은 울분에 힘들어하던 자신을 그나마 보듬어 주던 유일한 안식처.
손을 합장하고는 나직이 불호를 읊조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 나직한 읊조림은 저 멀리서 달려오던 이들에게도 들렸다.
진서연 일행을 뒤따라, 막 구릉을 넘어오던 멸마단 삼대, 정원과 팽중호의 걸음이 절로 멈췄다.
정원은 뛰어나가려던 진서연 일행에게 급히 전음을 보냈다.
-잠시만.
-왜?
-그대로 있으시게. 살필 게 있네.
-……!
앞을 바라보는 대주 정원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서렸다.
‘정신이 돌아왔어.’
마지막 순간까지 간 광마인을 수없이 직면했던 그다. 하지만 이제껏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
‘어떻게?’
완전히 광마인이 된 자가 본래로 돌아오는 경우는 없다. 다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나마 이지를 회복하는 경우가 있다.
폭주하기 전 잠시, 그리고 죽기 일보 직전.
전자는 그 후 바로 폭주한다. 죽기 전이야 생명과 함께 광기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한데 지금 광마인은 무릎 꿇은 채 연신 불호를 읊조린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성을 차렸다는 뜻.
십여 년 멸마단에서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편, 무윤은 석상영이 스스로 심맥을 끊어 감을 알았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떠오른 진언을 읊조렸다. 신기심의공으로 심장의 울림을 더해 온 산야에 나직이 흘려 냈다.
“나모라 다나다라야야 옴아나바제 미아예싯디 싯달제 사바하!”
잠시 치켜든 석상영의 고개가 가만히 저어졌다. 뜻은 모르나 가슴을 아련하게 울리는 진언. 자신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없다.
다시 떨어뜨린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그러지 마시오. 난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인.’
그 뜻을 이해한 무윤은 가만히 전음을 보냈다.
-그대를 위한 진언이 아니다.
-……?
-그대가 죽인 이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진언이다.
순간 석상영은 끊어 가던 심맥을 부여잡았다. 마지막 남은 빛을 더해 눈을 반짝였다.
그러곤 심장의 떨림 가득 담은 눈빛을 무윤에게 건넸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런 진언이라면 끝까지 들어야 한다. 마지막 남은 절절한 염원이 바로 그들의 극락왕생이니. 거의 끊겨 버린 심맥을 어떻게든 이어 보려고 온 힘을 쏟아부었다.
‘부처님, 제발 끝날 때까지만!’
그 간절한 바람에 스스로의 무게에 숙여졌던 고개가 더 아래로 떨구어지지 않았다.
진언은 계속됐다.
“~~옴 전나라 바맘타 이가리 나기리 나기니 훔 바탁!”
한동안 산야를 울렸던 극락왕생의 진언이 끝날 즈음.
석상영의 숨소리가 떠나갔다. 무릎 꿇고 합장한 그대로.
무윤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진언의 상대를 바꿨다.
업장을 소멸하는 진언이다. 광마인이었던 석상영을 위한.
“나맣 사르바 타타가타남 옴 비푸라 가르베 마니프라베 타나가타 니다르∼∼ 붓다 비로키테 구햐디 스티바 가르베 스바하!”
풀잎 스친 바람 따라 울린 진언이 어느새 산 너울에 아련한 향기를 전했다.
잠시 후.
역시 불호를 되뇌이던 대주 정원의 눈이 반짝였다. 진언을 읊는 소리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불력이 짐작되는 자.
“허! 저 시주는 누구기에?”
답은 옆에서 바로 나왔다. 가볍지 않은 흥분이 진서연의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침주의 흑도파 방주예요.”
처음에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낭랑한 진언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삼 년 전 기억이 확연히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슴을 울리는 진언이었으니. 다만 이름은 기억이 안 났다.
진서연의 눈가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광마인을 제어한 걸 보면 조력자는 아닌데. 왜 단목가 무인을 그렇게 했지?’
그때와 달라진 실력 또한 놀랍다. 절정인 단목가 무인을 단 몇 수에 제압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더 중요한 시점.
놀란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정원은 반문이 절로 나왔다.
“자네 지금 뭐라 했는가? 저런 진언을 읊는 자가 흑도라고?”
부대주 팽중호도 고개를 갸웃했다.
“진 조장.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닌가?”
진서연의 고개가 단호히 저어졌다. 덥수룩한 수염도 확신을 더했다.
“아뇨. 확실해요. 얼굴은 기억이 안 나도 저 음성은 똑똑히 기억해요. 저희 문주님도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보타문주께서?”
“예.”
진서연은 당시 상황을 간략히 알렸다.
부대주 팽중호의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펼쳐진 광경은 자신도 처음 보는 것.
“한데 저자가 진언만으로 폭주를 멈추게 하던가?”
구릉에 먼저 도착한 진서연도 싸움은 보지 못했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보진 못했지만 올라오기 전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뭐라? 그럼 흑도방주란 자가 광마인을 한동안 막아 냈다는 말 아닌가?”
“저희가 왔을 땐 마인도 그냥 멍하니 있기만 했어요. 그것까진 잘…….”
“혹 저자의 경지를 아는가?”
“삼 년 전엔 일류였는데 아까 보니 절정은 넘은 거 같아요.”
“허! 절정이라! 흑도방주가 그 정도면 대단하긴 한데, 그래도 저 광마인을 막기엔 역부족일 텐데. 그것참 이상하군.”
대주 정원은 한걸음 앞으로 향했다.
“가 보세. 직접 들어 보지.”
“그러시죠.”
멸마단 삼대가 앞으로 나서자 거리를 벌린 진서연은 단목종영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상황이 급해 응급치료만 하고 묻지 못했다.
삼대와 같이하는 동안은 멸마단 규율에 따라 자신이 임시 책임자다. 다친 정황에 대해서 대주 정원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가만히 전음을 보냈다.
-대주께 보고하자면 다친 정황을 알아야 해요. 어떻게 된 거죠?
단목종영은 생각한 대로 전음을 보냈다.
-마인에게 다쳤소. 그리 보고해 주시오.
-사실이 아니잖아요?
-무, 무슨 말이오?
-아까 뒤따라오면서 봤어요. 저자가 한 짓 같던데 아닌가요?
-아, 아니오. 저잔 잠시 왔다가 갔을 뿐이오.
-……책임자로서 다시 묻겠어요. 우린 분명 저자가 공격하는 걸 본 거 같은데. 잘못 본 건가요?
단목종영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아니오. 분명 마인이 한 짓이오. 가문에도 그리 보고하겠소. 더는 이상한 말 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자신과 가문은 물론, 단전이 부서진 친구를 위해서도 그래야 했다. 친구는 상대를 인식하기 전에 정신을 잃었다. 그게 누군지 안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가문 또한 평생 친구를 죄인 취급할 것이고. 그렇게 둘 순 없다.
‘이게 최선이다.’
단목종영은 묵묵히 먼저 앞서 나갔다.
진서연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가 한 게 맞아.’
같은 대에서 오래 생활한 조원이다. 그 표정에 답이 있었다.
가던 방향을 생각해 보면 청호방주란 자가 왜 그랬는지 대략 짐작도 간다. 혹시나 싶어 자신도 막 소리 지르려던 참이었으니까.
실제 실행했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짓인 건 명백했다.
하지만 그 전에 막았고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무림맹 소속인 자를 저자가 단죄해선 안 된다. 그것도 한 무인의 삶을 끝내 버린 처벌인데.
막는 것에서 끝내고 자신들에게 넘겨야 했다.
책임자로서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게 됐다. 다만 단목종영이 덮으려 하는데 바로 공론화할 순 없다.
진서연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우선 저쪽 얘기도 들어 보고 보고한다.’
잠시 후, 대주 정원은 무윤에게 그윽한 미소를 흘렸다.
“고생했네. 그리고 고맙네.”
무윤은 정중히 예를 갖췄다.
“아닙니다. 이 마을에 제 지인들이 있어 나선 겁니다.”
무림맹 멸마단이라 짐작되는 자들. 자신이 엮인 일을 해결하자면 알아 둬서 나쁠 게 없다.
“오! 그랬는가? 그 또한 정말 다행이구먼.”
“혹시 멸마단 분들이신지?”
정원은 복합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네. 한데 몸은 괜찮은가?”
무윤은 미리 생각한 대로 둘러댔다.
“예. 다행히 마인이 폭주하지 않아서요.”
“싸운 소리가 들렸다고 하던데.”
“제 공격에 거의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이성이 약간 돌아왔더군요.”
“그거참 다행이구먼. 한데 시주가 누군지 궁금하네만.”
무윤의 시선이 진서연을 향했다.
‘오랜만이네.’
내려올 때 눈에 익어 기억을 되살려 봤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어제 일처럼 생각났다. 이 세상에 오자마자 커다란 사건과 함께 만났던 여인이니.
상대 또한 쳐다보는 표정에 답이 있었다. 다만 왠지 굳은 표정에 날이 선 듯 보이긴 하지만.
“이분이 말씀하셨을 거 같은데.”
“침주 흑도파 방주, 맞는가?”
“그렇습니다. 삼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허! 그것참.”
무윤은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래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저는 이 일에서 빼 주시지요.”
“……까닭을 물어도 되겠나!”
“사실 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듣자 하니 정파였던 무인이라던데 흑도가 낀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잖습니까.”
“……!”
잠시 생각하던 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리하지. 자네도 그게 좋을 거 같으니.”
“감사합니다.”
잠시 후, 정원은 조장 당서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런 조사는 그녀가 전담이다.
-침주에 가면 저 친구 좀 알아보시게.
-……자세히 알아봐야겠죠?
-그러시게. 광마인 행동이 저 친구와 관련 있을지 모르네. 그럼 중요한 일 아닌가.
-……!
우선 그렇게 일은 일단락됐다.
* * *
다음 날 정오, 침주 시전거리.
보타문 은위경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삼 년 만에 이렇게 바뀌다니 정말 놀랍네요.”
석려옥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새로 생긴 거리도 그렇고 사람이 배는 늘어난 거 같아.”
“배고픈데 우리 어디 가서 뭐 좀 먹을까요?”
“그러자.”
진서연은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난 가 볼 데가 있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석려옥은 미간을 좁혔다.
“청호방 가려는 거지?”
“……응.”
석려옥은 작심하고 말을 내뱉었다.
“그럴 필요 있어? 같이 있던 단목가 무인도 아무 말 안 하는데 네가 나서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은위경도 거들었다.
“그래요. 언니. 청호방주란 자도 나름 이유가 있었잖아요.”
진서연은 깊은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알아. 그래도 내가 책임자였잖아. 사실을 알아야 보고하지.”
석려옥의 좁혀진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건 널 위해서니? 아니면 다친 이를 위해서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다친 그자 입장 생각해 봤어? 무인의 삶은 끝났을지 몰라도 지금은 마인을 끝까지 막다 희생한 영웅으로 남을 수 있어. 그런데 그걸 들춰내서 어쩌자는 거야?”
“진실은 밝혀져야지.”
석려옥은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그러니까 누굴 위한 진실이냐고? 돌이킬 수 있다면 또 모르겠어. 근데 이미 벌어진 일이야. 이젠 그 사실로 아파할 사람들 생각이 먼저 아냐?”
어릴 때부터 이런 일로 진서연과 맞부딪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거기다 지금은 소검후의 가장 강력한 상대라 경쟁심도 있고.
“여기서 또 그 논쟁을 해야겠니?”
석려옥도 더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그래. 나도 신물이 난다. 너 혼자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때 커다란 장원 대문에서 나온 한 여인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타다닥!
멸마단 삼대 소속 당서하다.
이번 여정을 같이 했던 여인, 그리고 멸마단 안에서도 가장 털털하기로 소문난 여장부.
그리고 대주의 지시에 무윤을 조사하고 있기도 하고.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