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강호 어디에나 있는 정보 조직, 하오문.
도둑, 소매치기, 도박꾼, 기녀, 마부, 점소이, 막일꾼 등 가장 하층에 있는 이들이 조직원인 단체.
한데 지금은 강호 전체를 관장하는 하오문주가 없는 시절이다. 단순한 지역별 연합체일 뿐.
시간이 흐를수록 정보의 중요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삼백 년 전 정사 대전 당시, 정보를 틀어쥔 하오문의 힘을 절감한 정, 사 모두가 나서서, 단일 단체인 하오문을 강제로 분할시켜 버렸다.
따르지 않으면 멸문될 상황이라 당시 문주는 다시는 단일 체제로 가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지역별 독립 체제로 전환했다.
문주 스스로도 절감했다. 이젠 그 누구도 강호의 정보를 독점할 수 없다는 걸. 그건 곧 강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정사 대전 내내 거대 세력 모두가 오히려 자신들을 압박해 정보를 역이용했다.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질 건 빤한 일. 선택이 아닌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렇게 삼백 년이 지난 지금은, 특정 도시나 일정 지역을 차지한 개별 세력 간에 정보를 교환하는 연합체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개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이곳 호남의 지부장 연대광도 주요 도시 대여섯 곳만 직접 관할하는 정도다.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어딘가에 소려의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이러면 상세히 물어야 한다.
“그럼 은야문은 이제 없겠네?”
“아주 오래전에 없어졌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거기가 호남 악양에 있지 않았나?”
“어! 그것도 알아? 그래 거기 있었지.”
“뭐 남은 건 없어? 건물이라든가.”
“그게 언젠데 남은 게 있겠어. 그냥 터만 남았지. 아주 오래전부터 기녀 교육하는 곳이 들어섰어.”
남모를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래, 알았다.”
연사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야! 우리 언제 거기 가 보자.”
“왜?”
“왜는 무슨! 거기 엄청 크게 기녀 교육하는 곳이야. 호남 말고도 주변에서 다 몰리지. 흐흐흐!”
“너나 가.”
“거기 동정호 근처야. 당연히 경치도 좋고 그 교육관 안쪽 동굴에 벽화나 커다란 기녀상도 있어서 볼만해. 그거 아주 오래됐다고 하더라고.”
무윤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젠 관심 가질 이유가 없다. 나중에 추억 삼아 한번 가 보면 그만이다.
“알았다. 나중에.”
“야! 누가 경치 보러 가쟤? 다 알면서.”
“그러니까 알았다고.”
“내가 장사에 돌아가면 거기 먼저 꼭 간다. 어떻게든 빨리 은월청요검을 초절정까지 올려 가지고…….”
무윤은 문득 의아함이 올라왔다.
연사구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저번에도 권만 썼고.
“검을 배웠다는 놈이 왜 빈손으로 다녀?”
“여기서 쓸 일이 뭐 있어.”
“나한테 쓰면 되잖아.”
연사구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끙! 그 차이면 검을 들어도 깨질 텐데 뭘. 난 누구와는 달리 매번 깨지면 오히려 하기 싫어져.”
순간 무윤의 호기심 어린 미소가 갈수록 짙어졌다. 소려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이어 주고 싶은데, 빙옥섬수야 소려 몸에 맞게 만든 것이라 사라졌을 것이고, 설사 이어졌더라도 원형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럼 남는 건 은월청요검뿐.
‘이놈에게 전하면?’
분명 자신이 만든 원형은 훼손된 게 확실해 보인다. 세세하게 설명을 달아 같이 줬던 해제(解題, 주해서)도 없어졌을 테고.
생각하면 할수록 입꼬리가 조금씩 위로 향했다.
‘놀리는 재미에다, 같이 하면 웃을 일도 많아질 것이고.’
어차피 이삼 년은 웅크리고 있기로 작심했는데, 그 시간이면 다 전하기엔 충분하다.
무윤의 야릇한 미소가 색을 더해 갔다. 결심을 굳혔다.
“참! 아까 거짓말 하나 했다.”
“거짓말? 뭐?”
“은월청요검, 그거 어디서 들은 게 아니야.”
“……그럼?”
“봤다.”
“뭘?”
“은월청요검 해제.”
“그게 뭔……. 뭘 봤다고?”
“스승님이 가지고 계시더라. 원본하고 같은 필사본이라고 하시던데.”
순간 연사구의 온몸이 벼락 친 것처럼 들썩였다. 부릅뜬 두 눈에 쩍 벌어진 입은 한동안 다물어질 줄 몰랐다.
세차게 떨던 입에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 방금 뭐라고 씨불였냐? 원본하고 같은 필사본?”
“너 같은 멍청이도 한 이 년이면 배우겠던데.”
“……내용을 봤다고?”
“읊어 주랴?”
“……해 봐!”
잠시 후, 연사구의 몽롱하게 홀린 듯했던 눈빛이 금세 타올랐다.
꿀꺽 넘어가는 침 소리를 감출 때가 아니다.
“해제 어디 있냐?”
“내 머릿속에.”
“……필사본은?”
“스승님이 가져가셨지.”
“어디 가셨는데?”
“산으로. 이젠 세상에 안 나오신다고 하셨지.”
“……이젠 너만 안다?”
“근데 기억이 잘 날까 모르겠네.”
연사구는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개새끼! 원하는 게 뭐야?”
무윤은 내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생각해 봐야지. 이삼 년은 써먹어야 하는데. 들어가자.”
“……!”
그날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됐다.
물론 연사구는 오늘처럼 술이 안 취하는 날도 없었다.
* * *
이 년 후, 침주 동북쪽에 위치한 염릉(炎陵)현.
아직 바람이 서늘한 산 중턱.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결에 노성이 가득 실렸다.
휘이익!
무림맹 멸마단원들이 시체를 모으고 얼마 후, 극락왕생을 비는 진언이 나직이 산야에 울렸다.
“나무 아미다바야 다타가다야 다디야타 아미리 도바비 아미리다 싯담바비 아미리다 비가란제 아미리다 비가란다 가미니 가가나 깃다가례 사바하!”
진언을 끝낸 멸마단 삼대주, 소림 정원의 깊은 한숨이 안타까움을 알렸다.
“허! 이 죄업을 어찌하려고…….”
부대주 팽중호의 표정도 더 굳어져만 갔다.
“이젠 완전히 광마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번엔 색욕만 채우더니.”
광기에 든 마인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혼마와 완전히 미쳐 버린 광마로 나눈다. 지금 추적하는 석상영은 확실히 광마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성은 사라지고 광기만 남은 단계.
그때 주변을 살피고 온 대원 당서하가 달려왔다.
파팟!
“대주! 광마인은 침주 쪽으로 간 게 확실해요.”
대주 정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의식도 없이 무작정 도망가는 길인데 도시로 향하고 있으니. 그것도 호남 남부 최대의 도시로.
“길이 그런 것인가?”
“예. 남쪽 길 대부분이 침주 쪽이에요.”
부대주 팽중호가 나섰다.
“숲이 너무 깊어 놓칠 수도 있습니다. 침주에 먼저 알리는 것이.”
“그게 좋겠네. 전서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한데 여긴 날짐승들이 많아 못 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방안도 강구하는 게 어떨지?”
마침 일행 중엔 집에 가느라 동행한 다른 대원들이 있다.
대주 정원의 시선이 보타문과 단목가 일행을 향했다.
“마침 그대들이 있어 다행이군. 먼저 가서 알려 주시게.”
잠시 고민하던 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타문 셋, 단목가 무인 둘인 일행의 수장은 그녀다.
“알겠어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녀 또한 남아서 같이하고 싶었지만, 누군가는 가야 한다. 같이 호흡을 맞춘 삼대 인원을 흩어지게 할 순 없으니.
대주 정원은 노파심에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자는 마공 이전에도 절정 중반이네. 혹 만나더라도 절대 무리하지 말고 우릴 찾으시게. 이건 명령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대주.”
“그래. 어서 서두르게나.”
잠시 후, 일행 다섯은 지름길로 침주로 향했다.
은위경은 사저(師姐) 진서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개인적으론 편하게 부르는 사이다.
“언니, 사문에 갔다가 멸마단으로 복귀하실 거예요?”
“그러려고.”
은위경은 나직이 속을 털어놨다.
“솔직히 지난 삼 년 동안 언니는 위험한 일을 자처했어요. 중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제 그럴 필요 없잖아요? 소검후 후보 자격은 충분한데.”
진서연의 미소가 그윽해졌다. 친동생처럼 여기는 이가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해야 할 때.
“너도 알겠지만 난 비구니와 무인 사이에서 고민했단다. 근데 멸마단에 가서 알았어. 무인의 삶이 세상에 더 도울 게 많다는 걸. 그래서 한 결정이야.”
“그럼 소검후는?”
소검후로 결정되면 최소 십 년은 검각에 머물러야 한다.
“내 길이 아니야.”
“……!”
은위경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게다가 같이 있는 사저 석려옥 또한 소검후 후보.
어느 쪽 편도 들 수 없는 자신이다.
다섯 사람은 묵묵히 산길을 헤쳐 나갔다.
* * *
다음 날, 침주 청호방.
급히 달려온 연사구의 입이 열렸다.
“북쪽에서 전서가 왔는데 광마인이 아무래도 이쪽으로 오는 모양이야.”
악무길의 눈이 커졌다. 침주엔 아직 광마인은 물론이고 어떤 마인도 출현한 적이 없다.
마인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은 신강과 인접한 강호 서북쪽이다. 대각선으로 정반대에다 끝인 이곳엔 아직 소문만 무성할 뿐이고.
아는 게 없으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광마인이라면 어느 정도?”
“이번엔 절정 중급이라 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악무길의 시선은 자연스레 공야성을 향했다.
“그 정도 무인이 광마인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뛰어난 의원이라 물었을 뿐 악무길은 그의 속사정은 모른다.
공야성은 마인의 상태를 알려면 우선 물어야 할 게 있다.
“마공은 어떻게 접했지?”
“가문이 멸문지화돼서 그 복수로 직접 익혔답니다.”
공야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절정에 자기 의지로 익힌 자, 거기에 광기가 골수에 미쳤다면 정말 위험한 자가 맞네.”
“어느 정도인데 그러십니까?”
“미치기 전 혼마일 때는 식욕과 색욕이 가장 큰 충동이라 웬만해선 무차별 살육은 안 하지. 한데 완전히 광기에 들면 분노만 남아서 사람이 보이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이지.”
“죽기 전까지 계속됩니까?”
“경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이삼십 명 이상 죽일 때쯤에 폭주하는 경우가 많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고.”
“폭주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행동이 살인 아닌가. 그걸 아무 이유 없이 계속하다가 분노가 해소될 때 잠깐 이성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어. 그때 사람이면 안 미치고 배길 수 있을까?”
“우와! 자기가 한 짓을 알면 진짜 미쳐 버리겠네요.”
“대부분 그때 폭주한다네. 온몸의 혈관이 터져 죽게 되지.”
악무길은 문득 든 생각에 물었다.
“그럼 일정 숫자 이상 죽이면 마인은 다 그럽니까?”
“말하지 않았나. 상황에 따라 다 다르다고.”
“허! 그럼 더 죽일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한계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살인은 계속되지. 아까 말은 한꺼번에 죽일 때 보통 그렇다는 말이네.”
악무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 말을 달리 해석해서다.
“그 말 참 걸쩍지근하네요. 그럼 힘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그만큼 사람을 죽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허! 그것참!”
공야성의 입가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제 그렇게 잡는 경우도 적지 않아.”
“예? 아니 뭐 그런 개새끼들이 다 있대. 누굽니까? 그딴 짓 하는 놈들이? 혹시 사도련 척마단 놈들?”
“그뿐이 아닐세. 무림맹 멸마단도 마찬가지야. 불가항력일 땐 은근슬쩍 산속 마을로 방향을 잡기도 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란 명분인 게지. 물론 아무도 모르게 말일세.”
순간 무윤의 가늘어진 눈이 연사구를 향했다.
“아까 북쪽이라고 했지?”
“그래서 뛰어온 거야. 염흥 쪽인데 오는 길 중에 은광도 있거든.”
“가 봐야겠다.”
“그러자고.”
그때 공야성이 급히 말을 꺼냈다. 무윤의 실력을 대략 알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꼭 알려야 할 게 있다.
“혹 만났는데 폭주하면 반드시 물러서야 한다. 그땐 어떤 힘으로도 막기 힘들어. 그냥 놔두면 혈관이 터져 죽는다. 다른 이들이 다치더라도 그때는 절대 다가서지 마라. 알았어?”
“알았다.”
공야성은 바로 혀를 찼다. 이제 표정만 봐도 웬만한 생각은 읽을 수 있다.
“이놈아! 호기심 부릴 일이 아니래도!”
“알았다니까.”
“허! 그놈 참!”
잠시 후.
타다닥! 파팟!
은광 쪽으로 신형을 날리던 연사구는 앞을 보다 실소가 절로 흘렀다.
‘하! 이 새끼! 벌써 사라졌네.’
출발한 지 반 각도 안 됐는데 앞엔 먼지 터럭 하나 안 보인다.
이젠 누구보다 무윤의 실력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다. 지난 이 년 동안 은월청요검 덕에 땅바닥에 구른 게 셀 수 없을 정도니까.
그런데 방금 또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숨긴 게 있었음을.
연사구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다 벗겼다 싶으면 또 뭔가 속에 더 있는 놈.
‘오 년! 그 안에 다 벗겨 주마. 꼭!’
몇 달 전 결심했던 삼 년에서 이 년이 더 늘었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