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어디 버텨 보게나.’
한 수 가르침이 아니다.
상대로 인정해 달라고 했으니 그리하면 된다.
무형의 진기파동이 검파에 감돌았다. 짧게 울리는 칼바람 소리가 이전과 다른 서늘한 예기를 뿜어냈다.
위이잉!
땅을 박찬 주손학의 검이 허공을 누볐다.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휘몰아쳤다.
사라락! 샤악!
종과 횡으로 긋고 찌르면서 무윤 주변을 어지럽혔다. 살벌한 바람 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옷자락을 스쳐 갔다.
파팟! 휘릭!
이미 작심한 칼날은 거침없이 요혈을 노려 갔다.
맞서는 무윤의 주먹 또한 찌르고 치고 막고 휘두르는 모든 권의 움직임을 동시에 쏟아 냈다.
슈우욱! 슉! 파팍!
호흡이 이끄는 대로 손발이 흩뿌려지고 그 흐름에 몸이 실렸다. 격렬하면서도 숱한 변화를 담은 주먹이 허공을 헤집었다.
파팡! 슈우욱!
주손학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뜻이었군.’
내력 조절은 했지만 단호하고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극에서 뻗어 나온 검기에 피륙이 갈라질 상황도 여러 번. 한데 간발의 차이로 벗어나는 움직임엔 허둥댐이 없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물결 탄 흐름만 검기 사이를 헤집는다.
‘박투에 최적화된 무공이로군.’
거리를 좁힐수록 변수가 커진다. 그것도 지금처럼 반 장 안에서 검날과 한두 치 사이의 격돌이면, 지닌 경지보다 본능적인 무인의 감각이 더 우선시된다.
상대는 그 감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적지 않은 흥분과 호기심이 주손학의 입가에 흘렀다.
‘경지도 절정 중반이라!’
시퍼런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권기의 색과 크기는 분명 그렇게 알린다. 거기에 놀랄 만한 움직임까지.
하지만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다.
‘한계를 잘 알 텐데.’
초근접 박투술이 가진 한계.
곧 내력보다 감각과 몸을 우선시하는 외공의 한계다.
상대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근접의 효과는 반감된다. 특히 상대가 초절정이면 거의 무용지물이라 할 정도로.
물론 내력과 동시에 수반된다면 다른 얘기지만 내, 외공 두 마리 토끼를 다 쫓기는 어려운 법.
초고수를 바라보는 자라면 요즘은 거의 선택하지 않는 길.
하지만 자신을 상대할 수 있다고 공언한 자다.
그걸 어떻게 풀어낼지가 궁금했다.
‘부딪쳐 보지.’
대기의 흐름이 거세게 요동치던 순간, 두 개의 시퍼런 기운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귀청을 찢는 폭발과 함께 부서진 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파팟! 파파팍!
권과 검이 어우러질 때마다 근원을 떠난 불꽃처럼 잘린 기의 파편이 허공에 아스러졌다.
콰쾅! 파아앙!
아니 그렇게 느끼는 순간, 주손학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언제!’
주먹 쥔 손이 어느새 얼굴 관자놀이로 다가왔다.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본능이 시킨 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화락!
하지만 호선을 그린 주먹이 다시 그를 향했다.
슈욱!
주손학의 눈빛이 달라졌다.
빠름과 함께 물처럼 흐르는 연환 공격.
‘방심은 금물.’
하지만 투기는 더 올라왔다.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에 맞게 상대해 주리라.’
생각과 동시에 공간을 좁혔다. 일직선으로 다가간 발걸음이 좁은 공간을 어지럽혔다.
타닥! 파팟!
포위망을 좁혀 오던 검격이 매섭고 날카롭게 번득였다.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쇄애액! 슈욱!
순간 무윤의 초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상대가 전력을 다한 공격임을 알린다.
무윤의 눈빛이 타올랐다. 상대의 의도가 확연히 전해진다.
‘부딪친다!’
생각과 동시에 권기를 가득 두른 권이 다가오는 검격을 향했다.
흐름을 탄 팔이 검격을 쳐내도 연이어 다른 기운이 그 뒤를 이었다. 사방팔방 뻗어 가는 소맷자락은 뱀이 춤추듯 검격을 스쳐 갔다.
검이 간발의 차이로 어깨 위를 스쳐 지나 허공을 때렸다.
콰앙!
몰아치는 낙엽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바람을 휘감은 권격과 서릿발 같은 검기가 대기에 회오리를 만들었다.
휘이잉! 휘릭!
선명한 칼날과 손끝이 간발의 차이로 몸을 휘감길 수십 차례.
바라보던 공야성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믿기지 않는 현실.
전력을 다해 보이는 주손학임에도 무윤이 밀리지 않는다.
‘설마 초절정?’
일진광풍이 몰아치는 검의 비바람 속을 오연히 버텨 낸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몰아닥쳐도 간격을 벌리지 않는다.
두려움과 흥분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문득 부방주 악무길에게 슬쩍 물었던 게 떠올랐다.
-방주 저놈 어느 정도인가?
-실력 말입니까?
-절정은 되나?
-그건 넘은 거 같은데 당최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서.
-왜?
-일 년 전만 해도 일류였거든요. 근데 절정이야 그렇다 쳐도 요즘은 영…….
-영?
-알 수가 없어요. 어디까지 갔는지.
-응? 한두 단계 위 정도는 자네도 알 수 있지 않나? 매일 대련하던데.
-그러니까요.
-……그걸 넘었다?
-물어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몇 년 후라면?’
그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초절정이 그리는 무수한 검 그림자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는 자.
그의 양손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선 폭음이 연이었다.
가히 가슴을 떨어 울리는 기세다.
주손학도 숨겨 둔 비기를 꺼내진 않았겠지만, 상대도 모른다.
그 자각이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공야성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런 놈이라면!’
속 깊은 혜안과 해박한 지식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눈까지 자신과 비슷한 놈. 거기에 무인으로서 모습까지. 물론 저 엄청난 실력 때문이 아니다.
그걸 품에 두고서도 웅크릴 줄 아는 인내와 끈기. 그게 가슴을 더 울린다.
이런 자와 같이 이 풍진(風塵) 세상을 걷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 부푼 가슴이 시선을 하늘로 보냈다. 오늘따라 선명한 노을이 서쪽 하늘을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였다.
세상 다 가진 듯 환한 미소가 입가를 맴돌았다.
‘가 보자!’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한껏 부푼 꽃망울 향기를 전했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