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잠시 후, 숲속 한적한 곳.
주손학은 긴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너와 형님을 보내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다 격전 중에 낭떠러지로 떨어졌어. 그 덕분에 산 게지. 근처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수소문하다 보니 형님이 무사히 도망친 걸 알았다. 그 후 몇 년을 찾다가 포기하고 이제껏 숨어 살았지. 너는?”
“저흰 그 길로 곧장 광동까지 내려갔습니다. 소주(韶州) 깊은 산속에 숨어 지냈죠.”
“그랬구나. 형님이 광동까지 갔으리라곤 생각 못 했다. 너무 먼 거리라.”
“한데 침도방엔 어떻게?”
“오래전에 방주 가족을 우연히 구해 줬었다. 그러다 오 년 전에 우연히 만나 같이 있게 됐지.”
“숙부님에 대해선?”
“다 안다만 걱정하지 마라. 애초부터 알고 그런 것이고 동생 같은 아이야. 게다가 신고할 거면 진즉에 했지, 지금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공야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네요. 오 년을 감춰 준 거면 자신도 즉참인데.”
“그보다 넌 어째서 여기 있는 게냐? 저 친구와는 왜 같이 있고?”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공야성은 그간의 사정을 간략히 알렸다.
주손학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허! 그걸 저자가 다 생각했다니. 난 믿기지 않는구나.”
그가 아는 것 외에도 시전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당연히 조카 생각인 줄 알았다. 그 뛰어난 자들이 모인 의숙에서도 신동으로 불렸던 조카니까.
한데 그 모든 게 전부 무윤의 머리에서 나왔다니.
“사실입니다. 저는 실행만 했습니다.”
“허! 그것참!”
공야성은 사실 하나를 더했다.
“의술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약초나 진찰 쪽은 저 못지않습니다. 치료나 시술은 아니지만.”
공야성은 좀 더 세세한 설명을 추가했다.
잠시 생각하던 주손학의 눈이 깊어졌다. 무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이유가 짐작이 갔다.
“저자와 같이할 생각이냐?”
“처음엔 잠시 있을까 했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은 놈이라 생각 중입니다.”
“그 정도란 말이냐? 네가 따를 정도로.”
“지켜볼 가치는 있습니다.”
주손학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서로가 위험해.’
서문가에서 눈길을 준 이상, 조카는 물론 무윤을 위해서도 결론은 명확해 보였다.
“내가 떠나도 여길 조사하다 보면 널 알 수도 있어. 그러면 저 친구도 위험해진다. 어떡할 테냐?”
한참을 생각하던 공야성은 깊은숨을 흘려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렵다.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
* * *
잠시 후, 주손학은 무윤을 마주했다.
“이것부터 말해야겠군. 난 마인이 아닐세.”
“저 친구 말은 믿습니다.”
“그렇다니 고맙네. 한데 우릴 모함한 곳은 거대하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들이지. 우리가 떠나는 게 최선일세. 더 있으면 자네까지 위험해질 게야.”
“사정부터 듣고 싶습니다.”
“알면 알수록 자네만 더 위험해져. 여기서 멈춰야 하네.”
근본적인 해결이야 마인이 아님을 밝히는 것. 무윤도 비슷한 상황이라 우선 그것부터 묻기로 했다.
“마인이 아닌 걸 밝힐 방법은 없는 겁니까?”
주손학의 한숨이 깊어졌다.
“마공도 종류가 제각각이라 나 정도 무인을 살피려면 무림맹 멸마단 상층부가 나서야 하네. 그 정도가 아니면 세상이 믿지 않지.”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습니까?”
주손학은 고민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당초 더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조카 공야성의 의견 때문이다.
-어느 정도 알려 주지 않으면 따로 조사할 놈입니다. 그럼 더 위험해지겠죠.
-벌써 그런 관계란 말이냐?
-예.
-……!
“문제는 그게 아닐세. 내가 알리는 순간 저들은 조사를 막는 건 물론이고 바로 마인으로 몰아 버릴 힘이 있네. 저들에겐 아주 쉬운 일이지.”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상대가 누군지 짐작게 하는 말.
‘정파.’
잠시 생각하던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오늘 들은 얘기와 그간 상황을 종합해 보면 짐작되는 것.
‘정파가 마인이 아닌 자를 마인으로 몰고 그 일이 의원과 관계됐다면……. 마공 연구?’
천 년 후로 온 지도 근 일 년. 이제 마공에 대해서 알아보려던 참이다. 그래야 자신이 엮인 일도 풀 수 있으니까.
‘부딪쳐 본다.’
신기심의공이 오 단계에 이른 지금 언제든 몸을 뺄 자신은 있다. 이젠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닌 시점.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긴 이상, 더 알자면 자신의 상황도 알려야 진솔한 대화가 된다.
“제 사정도 말씀드리는 게 순서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저도 마인으로 낙인찍혀 도망 다니는 중입니다.”
순간 두 사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 후, 넋 나간 듯 바라보던 공야성의 떨리는 입이 열렸다.
“너도 그렇다고?”
“말씀드리죠.”
무윤은 뇌양과 가문 등 구체적 이름은 빼고 나머지 사실을 상세히 알렸다. 지금은 두 사람을 위해서도 이게 최선이다.
잠시 후, 공야성의 복잡한 눈빛이 무윤을 마주했다.
‘인연이었나.’
세상에 오직 자신만이 가진 아픔이라 여겼다. 터놓고 얘기할 수도, 누굴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저 저 깊은 속 어딘가에 묻어 두기만 할 뿐. 그런데 마음 맞는 지기라 여겼던 이도 비슷한 아픔을 간직했다니.
동병상련의 반가움이란 게 이런 것이리라.
마음을 굳힌 공야성은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무윤이 가문을 가렸지만, 그 또한 이쪽 사정을 모르기에 배려해서 한 일.
먼저 믿음을 보여 준 이상 자신은 다 알려야 한다.
“내 아버님은 장사에 있는 공야의숙의 가주셨는데, 어느 날 정파 오대세가 사람들이 찾아왔었다.”
“……?”
공야성의 한 맺힌 설명은 이랬다.
공야의숙.
약 삼십 년 전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들이 모였던 곳.
어느 날 오대세가에서 은밀히 찾아와 마인을 치료할 약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더 나아가 마인을 없앨 약까지.
당시 가주 공야지명은 세상을 의롭게 하는 일이라 여겨 받아들였다. 그렇게 연구가 진행돼 성과가 나올 즈음.
연구차 보내온 마인들 중엔 정파도 일부 있었다. 처음엔 개인의 탐욕으로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가문 차원에서 지시한 것임을 공야지명이 알게 됐다.
오대세가는 비밀리에 마공을 연구하던 중 잘못된 무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공야의숙의 의술이 필요했던 것. 거기에 주로 연구하게 한 건 수련 시 부작용을 없애는 용도고.
즉 마공을 없애는 게 아니라 연구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주 공야지명은 고심 끝에 연구 자료와 약을 없애고, 의동생 주손학의 도움으로 아들 공야성과 함께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착잡한 미소를 띤 공야성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탈출하다 숙부님하고 헤어졌어. 그 후 광동산 속에 숨어 지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 혼자 이곳저곳 떠돌게 된 거고.”
이러면 마공에 대한 궁금증은 천천히 풀어도 된다.
오대세가가 벌인 일에 대해서도.
우선 시급한 건 서문가. 정황상 확실한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진짜 의심했다면 이 정도로 건드리지 않았지.’
그랬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했을 일이다. 거기다 살수 일 이후 반년이 지났는데 그 이상 조치가 없다는 건, 의심도 아닌 그저 주변을 훑는 정도라는 반증.
결국 주손학 일만 잘 처리하면 문제도 없어지고 공야성도 보낼 필요 없다. 마공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고.
무윤을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을 꺼냈다.
“서문가도 혹시나 해서 떠보는 건데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말인가?”
“부방주께서 죽으면 깨끗하게 해결될 거 같은데.”
주손학은 눈을 껌벅였다.
“……나?”
“사라지면 더 의심할 겁니다, 저와 싸우다 죽은 걸로 하면 어떨지. 은신처는 생각해 둔 데가 있습니다.”
공야성은 바로 떠오르는 곳이 있다.
“은광?”
“산속이라 안전하지. 근처에 유사시 숨을 만한 곳도 많고.”
고민하던 주손학의 고개도 끄덕여졌다. 의견을 추가할 것도 있다.
“자네 말대로 꼬리를 잘라 버리는 게 가장 좋겠어. 혹시 몰라 준비해 둔 신분이 있네. 종사귀라는 음적인데 내가 죽인 걸 아무도 모르지. 그자의 칼과 색공서가 있으니 날 그자로 만들면 될 걸세.”
“잘됐네요. 하오문에 적당히 소문내게 하면 완벽하겠습니다.”
“우리 방주한텐 내가 얘기하겠네.”
무윤도 사정을 듣긴 했지만,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습니까? 앞으로의 일도 있는데.”
“마적에 죽을 뻔했던 방주 가족을 살려 준 이후로 날 형님으로 대했네. 다시 만났을 때도 사정을 얘기했는데 막무가내로 잡더군. 들키면 자신도 죽는데 말일세.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게야. 이젠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질세.”
무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이면 믿을 수 있겠네요. 그렇게 하시죠.”
“그러세.”
이후 이어진 세세한 논의가 끝날 즈음.
주손학을 바라보던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적당한 상대야.’
지난 노력의 검증과 앞으로 수련을 도와줄 이로선 최적이다.
이제껏 상대한 최고수라고 해 봤자 갓 절정 중반인 연사구.
두 달 전에 오른 체기발경(體氣發勁)의 경지는 하단전 기준으로 초절정. 전력을 다하기엔 이만한 상대가 없다.
앞으로 일을 같이하려면 실력을 알릴 필요도 있고.
또한 초감각을 극대화하면 승부도 모른다. 물론 오늘은 적당히 꺼내야 하지만.
“부탁 하나 드릴까 합니다.”
“뭔가?”
“저와 겨뤄 주셨으면 합니다.”
주손학은 지레짐작했다.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게로군.”
“예.”
“그러세. 오래 걸릴 것도 아니니.”
무윤은 이 말을 꼭 해야 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어르신을 이길 각오로 할 겁니다.”
주손학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보게 난…….”
“초절정이신 거 압니다.”
주손학의 두 눈에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아까 기운을 살펴 이미 경지는 짐작했다.
“그걸 알면서 승부를 거론하는가? 절정을 넘은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맞습니다.”
“허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보게. 알아먹게 말 좀 해 보시게.”
“저만의 것이 있습니다. 보시면 알 겁니다.”
“……?”
잠시 후, 무윤을 마주한 주손학의 눈이 깊어졌다.
감춘 게 있다 하더라도, 절정과 초절정의 차이를 모를 자가 아닌데 이기러 나섰다고 감히 공언하다니.
‘보면 알겠지.’
지금은 그저 무인으로서 대해 주면 될 때.
“권을 쓰는가?”
“검은 아직 부족합니다.”
“알았네. 오시게.”
다시 말을 할까 하던 무윤은 그냥 입을 닫았다. 보여 주는 게 낫다. 말은 그다음에.
일 보의 진각이 대치를 박참과 동시에 공간을 뛰어넘었다.
파팟!
주손학의 눈이 살짝 커졌다.
‘빠르다!’
절정 초입이 아닌 움직임. 거기에 바로 시퍼런 색을 드러낸 권기까지. 하지만 그 경지에서의 놀람일 뿐, 어느새 올라온 검기가 서늘한 예기를 뿜어냈다.
사라락!
곧게 뻗은 주먹이 허공을 때리며 강렬한 파열음을 만들 때, 주손학의 소맷자락이 흔들리는 순간 검광이 번득였다.
파파팟!
줄기줄기 뿌려진 서릿발 같은 검기가 상대를 향하는 순간, 화들짝 놀란 건 무윤이 아닌 주손학이다.
‘이런!’
몸 한 치 앞까지 검이 접근했는데도 상대가 방향을 틀지 않는다.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검을 비트는 순간 무윤 또한 방향을 틀었다.
휘익! 타닥!
한발 뒤로 물러난 주손학의 성난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겐가?”
“제게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대로 하려면 전 이래야 합니다. 검을 안 빼셔도 됩니다.”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에 주손학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피할 수 있다?”
“보시면 압니다.”
주손한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사실이건 아니건 이제 봐줄 생각이 없다. 말 그대로면 대응하면 될 것이고, 아니면 다치더라도 그만큼 경험이 될 테니.
“그러지.”
주손학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