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무윤은 생각대로 고리대 얘기를 풀어냈다.
“우리 조직원 중에 나이 많고 다친 놈도 많아. 그놈들 일자리 마련해 주려고.”
“뭐?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러니까 고리대 전장을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직원으로 쓰겠다 이거야 지금?”
“아니, 다 주인으로 만들 거야.”
“……몇 명이나?”
“전부.”
“……?”
공야성의 눈이 깊어졌다.
차분한 무윤의 눈빛, 그리고 그동안 보여 준 놈의 모습이 말해 준다.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닌데. 뭔 생각이지?’
가벼운 흥분이 공야성의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고리대 패악이야 잘 알 것이고. 뭘 하려는 거지?”
“패악이라. 그렇긴 하지. 그럼 네 대책은 뭐냐?”
“음! 당연히 이율을 낮추고, 갚지 못할 때는 사람을 선별해야지. 열심히 하고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추려서…….”
무윤은 말을 잘라 버렸다.
“빤한 소린 집어치워.”
“빤하다?”
“그래서 천 년 동안 고리대가 사라졌냐? 농지는 물론이고 이젠 상거래까지 늘어나기만 했지.”
“그래서? 넌 어쩌려고?”
“여기 놈들 내보내서 각자 주인이 되면 갑자기 전장이 늘어나겠지. 그럼 어떻게 될까?”
“뭐가 어떻게 돼. 치열하게……. 오! 경쟁으로 이율을 낮춘다?”
“그래. 그게 순리야. 거기다 우리가 관리하는 상인들을 모아서 조합 전장도 만들어야지.”
“그건 왜?”
“조합원 먼저 대출해 주는 거지. 이율은 그대로 하되 못 갚으면 상점은 우리 조직원들 줄 거야. 대신 전부 그 밑에 고용하는 조건으로.”
“호! 가게는 뺏겨도 일자리는 보장한다? 그거 괜찮네.”
“그걸 사람들이 믿게 되면 그다음은 자영농이지.”
“마찬가지로 자영농 조합 전장을 만든다?”
“거기도 못 갚으면 농지는 조직원 주고 소작은 그들이 하고.”
공야성은 무릎을 탁하고 쳤다.
“옳거니! 그거 정말 좋네.”
“그래. 내가 다른 거 다 해 봤지만 이만한 게, 크흠! 아니 하여간 이게 최고지.”
공야성은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건?”
“상수(湘繡, 호남 전통 비단 자수) 교육시키는 곳하고 약초 가르치는 곳을 만들까 하는데.”
“왜?”
“여자들 돈벌이 중에 그만한 게 있어?”
“만든 다음엔?”
“교육은 일정 기간 무료. 그중 자수 실력이 괜찮으면 고정으로 일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침주 여인네들은 다 달려오겠지. 근데 비용이 많이 들 텐데?”
“분석해 봤지. 초기 삼 년 적자. 그 후론 무조건 이익. 초기 투자 비용은 은자 삼천 냥.”
“돈은 충분하고?”
“꿍쳐 둔 거 많아. 돈 많은 친구 놈도 있고.”
약초를 생각하던 공야성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약초도 마찬가지겠네. 게다가 약초를 몰라 못 캐는 게 허다한데 가르치면 굶는 애들이나 여인도 줄어들 것이고.”
이 정도면 완전히 엮었다.
“더 말할까?”
“해 봐.”
“짐 먼저 풀지?”
“……!”
결국 공야성은 머무르기로 했다.
모든 사업은 새로 만든 상단 여곽 상단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여단과 곽가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이름이다.
청호방은 지금 그대로 남아야 한다.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
흑도는 온전히 흑도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
거긴 그런 세상이니까.
* * *
며칠 후, 청호방 옆 장원.
“이게 정말 불경이에요? 어떻게 이런 춤이 여기에?”
기녀인 유선이지만 [바라타 나티암]에 있는 일부 그림엔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볼 때마다 어색해.”
“정말 이게 천 년 전 거란 말이죠?”
“그래. 천축 왕가의 춤에다 불가의 색을 더한 거야. 그 글씨는 범어라는 거고.”
“근데 이걸 왜 보여 주시는 거죠? 심법은 저한테 따로 주셨는데.”
“두 가지. 하나는 그만큼 가치 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그만큼 열심히 하라는 거죠? 알겠어요. 다른 건?”
“시간이 되면 거기 있는 춤도 살펴봐. 내가 배우려는 게 사실 그 춤이거든.”
유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춤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거야 천축과 불가라 그런 거 같고. 제가 보기엔 그냥 여러 가지 동작인데 뭐가 다른가요?”
“춤만으론 그렇지. 근데 그 심법하고 같이하다 보면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 거야. 나도 그걸 알아보려는 거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노력해 볼게요. 저 근데.”
“왜?”
유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경을 내밀었다.
“천 년 전 건데 제가 보관하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난 머릿속에 다 있어. 넌 보면서 해야지. 글이면 필사해서 줄 텐데 그 그림은 영…….”
“그래도 너무 귀한 거 같은데.”
“태어날 아이도 귀하잖아. 안 그래?”
“……!”
유선에게 준 건 여휘가 심법주해를 단 필사본이 아니라 원본이다. 혹 훔쳐 간다고 한들 과거의 범어인 데다 이것만으론 그림책일 뿐.
아이 아버지에 대해선 더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우선은 살리는 게 중요할 뿐, 스스로 꺼내면 들을 것이고 말 안 하면 그만이다.
다행히 유선은 한 달 만에 하단전을 만들고 축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열정은 물론이고 내내 초감각으로 몸을 일깨워 준 무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그렇게 여휘의 바람은 작은 씨앗을 뿌렸다.
* * *
석 달 후, 침주 하오문 지부.
탁!
“거참! 무공만 아니면 이놈이 딱인데, 이상하단 말이지.”
연사구의 좁혀진 미간이 더 조밀해졌다.
‘무윤이란 놈은 이제 스물넷인데.’
마공을 배우다 도망친 뇌양의 무윤.
사 년간 움직인 동선과 행적, 나이와 체형, 방주가 되기 이전 말투와 행동 등 대략적인 게 가장 맞아떨어지는 놈이다.
한데 이해가 안 가는 것.
‘떠날 때 갓 일류였고 검만 썼었는데.’
청호방주 담사운이란 놈은 분명 절정을 넘었다. 하후진과 비무나, 자신을 알아채고 신호를 보낸 걸 보면.
간혹 검도 쓰지만 방주가 되고 나서는 대부분은 주먹을 썼고.
‘사 년 만에 근 두 단계 상승은 말이 안 된단 말이지. 거기다 절기도 바꿨는데.’
설사 영약이나 대단한 스승이 있었다 해도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언제나 잘 맞는 촉은 이놈이라고 알린다.
연사구는 뜨겁게 달궈진 숨을 뿜어냈다. 항상 이런 고민엔 촉을 따랐다.
‘내가 언제부터 머리만 싸맸다고. 부딪쳐 보면 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전장치만 해 두면 된다.
숙부이자 지부장 연대보에게 넌지시 알렸다.
“저 청호방 갑니다. 늦으면 아시죠?”
“거긴 왜? 뭐 좀 찾았어?”
“가서 찾아볼게요.”
“……많이 갔었잖아?”
“물어보진 않았죠.”
“……!”
* * *
잠시 후, 청호방 뒤편, 방주 수련장.
무윤은 갑자기 나타난 연사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냐?”
“뭐가 궁금해? 나야? 찾아온 이유야?”
“수리비 주러 온 건 아닌 거 같고.”
“……수리비?”
“기왓장 몇 개 나갔더라. 조심 좀 하지.”
“……내가 잠버릇이 좀 심해.”
무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지붕 위건 자기 집 안에서건 매번 그러던 놈이니까.
연사구는 궁금한 것부터 꺼내 들었다.
“언제 알았냐?”
무윤의 입가에 가벼운 실소가 흘렀다.
“난 또 뭔 일 생겨서 튀어나온 줄 알았더니. 자존심 상해서 내려왔어?”
“얘기부터 해 봐.”
무윤은 싱긋 미소 지었다.
“뒷골 시리게 하는 놈한테 해 줄 말은 없어. 물을 건 많지만.”
“해보자고?”
“아니!”
“그럼?”
“패야지.”
연사구의 입이 비틀어졌다.
“미친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사구의 몸이 먼저 대지를 박찼다.
파팟!
얼마 전부터 일부러 기운을 뿌린 놈. 대략이라도 자신을 알아봤을 텐데 그랬다는 건 언제든 자신 있다는 뜻.
자신 또한 감춘 건 있지만, 하후진을 보더라도 절대 방심할 놈이 아니다. 오랜 싸움의 경험대로 나섰다.
‘선공이 최고지!’
연사구의 주먹이 유성처럼 궤적을 그렸다. 퍼런빛을 가득 머금은 권격이 무윤을 향했다.
슈우욱!
무윤은 오랜만에 지어 보는 흡족한 미소를 그대로 흘렸다.
‘부러운 놈이야.’
언제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한 놈. 웃을 때도, 지금처럼 무인일 때도. 무인이 다른 게 있을까. 우선 이기고 봐야 한다.
복잡한 세상사, 꼬인 인생사, 남과의 관계를 고려하다가 생각과 달리 휘둘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무윤 자신 또한 그런데.
한데 놈은 아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산다. 그러다 오늘같이 터지기도 하겠지만 아쉬울지언정 후회할 놈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했으니까.
하여간 배울 게 참 많은 놈이다. 하지만.
‘우선은 좀 맞자.’
하후진에게 했듯 지금도 그래야 한다.
실력이 안 된다면 모를까, 옆에 두고 싶은 자가 무인이라면 격차를 확실히 알려 주는 게 최고다. 강한 무인에게 가지는 동경은 무인이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니까.
또 그래야 앞에서 도전하더라도 뒤에선 딴짓하는 경우가 적다.
여휘가 련주로서 수하와 주변을 아울렀던 철칙이다.
그래서 봐줄 이유가 없다. 두 달 전, 중단전의 절정인 체기발경(體氣發勁)에 오른 힘을 적당히 풀어야 할 때.
무윤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샤아악!
연사구의 두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빨라!’
다섯 장을 격하고 있던 무윤이 순간 지척에 다다랐다.
절정이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권기도 없는 주먹인데 살기가 넘실넘실 요동치며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영혼을 빼내 가려는 듯 넘실거렸다.
연사구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거렸다.
‘이 새끼 도대체 뭐야!’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이 없다.
범상치 않은 기세에 방향을 틀까 했지만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에이! 시팔,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있는 대로 내력을 끌어올리고는 그대로 쇄도했다. 두 주먹이 부딪치는 순간.
쿠웅! 카캉!
시퍼런 권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충격에 권기 파편이 흩날리다 불꽃처럼 잘려 허공에 아스러졌다.
부딪친 권의 세기에 연사구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후두둑!
연사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 완연히 절정 중반에 들었는데 단 한 수만에 두 장 뒤까지 물러나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충격에 주춤할 찰나, 종횡으로 수십 가닥의 권풍이 몰아닥쳤다.
휘이익! 쉬익!
연사구의 이마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꿈틀댔다.
‘으윽! 뭐야, 이거!’
더 생각할 여유가 없다. 웅혼한 패력을 담은 권에 단숨에 복부 요혈이 노려졌다.
빠르게 몸을 숙이고는 퇴보를 밟았다. 창피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공간을 벌려야 한다.
타다닥!
순간 대기의 흐름이 거세게 파도쳤다. 짓쳐 들던 무윤의 신형이 날아오르듯 연사구를 덮쳐 갔다.
쉬이익!
흐르는 기운의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무수한 권풍이 공간을 점하며 밀려들었다.
이미 격차는 명확한 상황. 단 몇 수만에 승부는 의미 없음을 직감했다.
연사구는 이를 악물었다.
‘그냥은 못 끝낸다.’
연사구는 젖 먹던 힘까지 더해 내력을 끌어올렸다. 올올이 맺힌 권기가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우우웅!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기운의 군집.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경파가 주먹에 가득 실렸다.
‘이 정도면!’
한 가닥 기대는 해 볼 수 있으리라.
그때 무윤의 신형이 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쉬익!
바람 탄 몸놀림에 투로가 급변했다. 달라진 궤적으로 질주한 힘에 날카로움이 더해졌다.
슈우욱!
연사구는 직감했다.
‘이런 시팔!’
아니나 다를까, 한 줄기 광풍이 옆구리를 휩쓰는 순간 눈에도 번갯불이 튀었다.
퍼억! 파팍!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눈동자가 멍해졌다. 허물어져 가는 몸과 함께 의식도 같이 사라져 갔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