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두 사람의 춤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한결같이 음흉했던 좌중의 눈빛 중 몇은 색을 달리했다.
“허! 저런 춤이라니!”
“자네 왜 그래?”
“모르겠네. 그냥 속이 싸하고 아리는군. 왠지 가슴이 그래.”
“자네도? 내 유선이 춤을 몇 번 봤지만, 오늘 같은 감흥은 처음일세. 처음엔 측은한 마음에 그러는가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달라.”
“어떻게?”
“마치 무인을 보는 거 같네. 치열함, 투기, 그런 게 막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 멍한 눈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하고 두려워 떨던 처음 모습이 아니야. 보게. 우리 눈길을 하나도 피하지 않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응시하네. 허! 오히려 창피한 건 유선이가 아니라 나일세.”
“……!”
많진 않았지만 하나둘 고개를 돌리는 이가 늘어날 즈음.
무윤은 루주 예향에게 꼭 물어야 할 게 떠올랐다.
‘혹시!’
홍루(紅樓)의 예기인 유선 또한 손님이 청하면 받아들여야 할 기녀다. 약속 없이 그녀를 찾아갔던 여러 밤 중 그냥 발길을 돌린 적이 몇 번 있다. 한데 그중 한 번은 하후태 저놈 때문이다.
“누구 앤지 아나? 혹시?”
“몰라요. 물어도 답도 안 하고.”
혹시나 하는 우려를 안 할 수가 없다. 이러면 오늘 하려던 것 중 하나는 미뤄야 한다. 밤길에 몰래 하려던 그것. 이건 확인 후 다음에 해도 된다. 물론 이자까지 톡톡히 붙여서.
하지만 두들겨 팰 놈 말고, 두들겨 맞을 놈 구하는 건 지금 해야 한다.
잠시 후, 춤이 끝나자마자 무윤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휘익!
턱!
공야성의 멱살을 확 휘어잡고는 다 들리게 목청을 높였다.
“너 좀 맞아야겠다.”
“크윽! ……누구?”
“가서 말해 주지.”
“……?”
타닥!
쌩하니 사라진 두 사람 뒤로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청호방주잖아!”
“이 사람 그거 모르나. 유선이가 저치 애인이잖아.”
“아! 맞다. 그랬지.”
“크크! 저 친구 춤 한 번에 목이 날아갔구먼.”
“그러게. 불쌍해서 어쩌누.”
“뭐, 그래도 혼자 볼 건 다 봤으니 덜 억울할 거야.”
“하긴!”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하후태도 가벼이 자리를 일어났다.
난데없이 나선 놈이 영 맘에 안 들지만, 청호방주가 끌고 간 이상 직접 손볼 필요는 없게 됐다.
‘오늘은 이쯤 해 두지.’
갑자기 만든 자리치고는 이 정도면 흡족했다. 진짜는 이삼 년 후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하면 된다.
* * *
얼마 후, 성화루 밖 외진 곳.
무윤은 흐트러진 공야성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탁! 탁!
“보는 눈이 많아서 아깐 그럴 수밖에 없었어.”
“자넨 누군가?”
“다들 청호방주라 부른다.”
공야성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이자로군.’
이름은 물론 들어 봤다. 유선과의 소문 때문에 찾아갈지 말지 고민했던 자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우호적으로 나온다는 건.
“루주한테 들었나?”
“대략.”
“……어디까지?”
“병명도 들었고 배 속 아기도.”
이러면 바로 물어도 된다.
“그쪽인가?”
“난 아니야.”
“어떻게 장담하지?”
“유선이가 말 안 했군. 그럴 일이 없었거든.”
“……한 번도?”
“유선이한테 물어봐도 돼.”
“그럼 소문은?”
이런 자라면 알려도 된다. 다만 그냥 춤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
“무공에 접목하려고 춤을 배웠지. 근데 흑도방주한테 춤은 좀 그렇잖아. 떠드는 대로 그냥 뒀어.”
공야성은 가만히 고개 숙였다. 어쨌든 자신이 오해한 것이니.
“이거 미안하군. 소문 때문에 자넬 찾아갈까도 했었네. 고통을 줄이려면 약값이 만만치 않게 들거든.”
“듣긴 했는데. 어려운가?”
공야성의 어두워진 표정이 답을 더했다.
“후! 내가 아닌 누구라도 고칠 수 없을 걸세. 너무 늦었어.”
“남은 시간은?”
“서너 달 정도. 길어야 반년일세.”
이제 다른 걸 물어야 할 때다.
“누구 아이인지 그쪽도 모르나?”
“묻지 못했어. 세상에 나오기 어려운 아이라.”
“얼마나 됐지?”
“두 달 조금 안 됐네.”
길게 봐서 여섯 달이라도 아기는 팔 개월.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는 어떻게 안 될까?”
공야성은 마침 그 일로 할 말이 있었다.
“불가능일세. 그보다 자네가 그녀를 설득해 줄 순 없겠나?”
“뭘?”
“독한 약을 써야 고통이 줄어드네. 한데 어떻게든 낳아 보겠다고 버티고 있어. 아는지 모르겠네만 그 고통은 정말 참기 어렵네.”
마음은 아프지만 무윤이라고 그 일에 나설 입장은 아니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바라타나티암 심법!’
여휘가 무윤의 여인이 될 이에게 전하라고 만든 그것.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거라면!’
여인에게 최적화된 절대의 무공, 하지만 만든 여휘는 강함만을 넣지 않았다. 심법 초반부는 대부분 여성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보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혹 반려자가 무인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또한 그 생각에 초반부는 누구나 익히기 쉽게 만들었다.
‘조금만 도와주면 익힐 수 있어. 그럼 고통도 줄어들 것이고 어쩌면 아기도…….’
이번 일엔 자신의 책임도 일부 있다. 그걸 떠나서라도 춤에 있어선 스승으로 여겼던 여인.
모른 척할 수 없다.
* * *
잠시 후, 성화루.
유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심법요? 그런 걸 제가 어떻게.”
“내가 친구 얘기했었지? 춤 배우라고 했던 놈.”
“예, 근데 그분은 왜?”
“그놈이 만든 건데 내가 봐도 정말 괜찮아. 배우기 쉽고 효과도 금방이라 고통도 줄어들 거야. 그리고 아마 남은 시간도 늘 거고.”
유선의 발갛게 상기된 뺨이 가볍지 않은 흥분을 알렸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
‘시간만 늘릴 수 있다면 뭐든!’
다른 이라면 몰라도 무윤의 말은 이제 무조건 믿는다. 춤은 자신이 알려 줬지만 몇 달 동안 그가 보인 말과 행동, 그리고 인생의 가르침은 수십 년 접했던 그 어떤 이와도 비교할 수 없다.
순간 한동안 잊어버렸던 싱그러운 미소가 입가에 흘렀다. 무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눠 본 그녀이기에.
몸짓인 춤으로 허물어진 둘 간의 벽 덕분에 그럴 수 있었다.
‘강호 사람들이 말하던 반로환동(返老還童), 그 말이 딱 어울릴 분이지.’
뭔가 사연이 있음은 당연히 직감했다.
그런 분이 자신을 위해 꺼낸 말이다. 바로 눈빛이 타올랐다.
“얼마나 늘릴 수 있을까요?”
“기간은 장담 못 해. 하지만 짧진 않을 거야.”
이제 유선에게 남은 걱정은 하나다.
“아시겠지만 전 무공이라곤 전혀……. 배울 수 있을까요?”
이럴 땐 환한 미소로 눈을 마주해야 한다.
“내가 언제 거짓말하던가?”
“아뇨. 단 한 번도.”
이제 무윤이 가장 불편한 얘길 꺼낼 때다.
“좀 더 빨리 익힐 방법도 있긴 해.”
“뭔데요? 저 뭐든 할게요.”
“그러자면 내가 몸에 손을 좀 대야 해. 주요 혈도 부근. 예를 들면 등이나 배, 허벅지, 목 주변, 그리고…….”
오랜만에 유선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번졌다.
‘이럴 땐 정말 노인 같다니까.’
처음 야심한 밤에 찾아왔을 땐 춤 외에 다른 목적이 당연히 있겠지 싶었다. 한데 새벽쯤 그냥 돌아갈 땐 어안이 벙벙했었다.
그 이후 몇 달 동안 일관된 모습에 이젠 왜 저러는지 안다.
‘쑥스러워 그러시지.’
그걸 알기에 단호히 알려야 한다.
“저 아기 꼭 낳고 싶어요.”
“알아. 그래서 나도 이러는 거고.”
이제 무윤을 마주한 눈빛에 한 점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이 절절한 가슴을 알리려면 불꽃같은 정광과 함께 타오르는 숨결을 내던져야 한다.
“근데 건강하게 낳아야 해요. 만약 심하게 아픈 상태라면 전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해요. 그럴 바엔 차라리…….”
“……!”
아련함을 감추려던 무윤은 여리게 떨리는 입술만은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유선의 고개가 깊게 숙여졌다.
스르륵!
숙인 고개는 한참 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이 가녀린 손으로 햇살 부여잡고 죽음보다 깊은 골짜기를 헤쳐 나가려면 도움 없인 안 된다. 그 상대가 앞에 있다.
피고름을 흘려 내듯 짜낸 짧은 말이 흘렀다.
“부탁드려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무윤이라면 이 불덩이 같은 마음속 염원을 알리라. 다 터놓진 못했지만,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이 아픔을 이해하리라.
톡!
순간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방울이 무윤의 눈가를 흐리게 했다.
‘후!’
더 고민할 것도, 구구절절한 말도 필요 없다.
이럴 땐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숙소부터 옮기자. 우리 장원 옆에 아무도 모르게 사 둔 곳이 있어. 조용하고 아늑해서 괜찮을 거야.”
“……예.”
유선은 침주를 떠난 것으로 해야 잡소리가 없다.
이제 남은 건 옆에서 도와줄 의원을 꼬드기는 것. 의원이라면 무윤도 나름 알아보는 눈이 있다.
‘저자 보통 실력이 아니야.’
그런데 공야성이 유선을 며칠 살피는 동안 무윤의 생각이 확 바뀌어 버렸다.
공야성이 뛰어난 건 의술만이 아니다.
탐을 낼 만한 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며칠 후, 청호방 장원.
짐을 챙긴 공야성이 무윤을 찾았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처방도 해 놨으니까 의원한테 보이면 알아서 할 거야.”
“바둑 한 판은 두고 가야지. 아직 승부를 못 냈잖아.”
순간 공야성의 머리 위로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만큼은 굽힌 적이 없는 자신인데, 나이도 한참 어린 놈한테 당한 걸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속에 담은 말은 꾹 참고서 한마디만 내뱉었다.
“모를 줄 아냐.”
“뭘?”
“봐준 거 다 안다.”
“……알았냐?”
더 말해 봤자 자존심만 상한다. 세상 떠돌면서 본업인 의술만큼 자신 있던 게 바둑인데 단 한 판을 제대로 못 이겼다. 그것도 치열한 접전을 위해 슬쩍 봐주는 걸 알았을 땐 얼마나 천불이 나던지.
왜 그랬는지도 안다. 그렇게 아쉽게 지면 다시 바둑판에 앉을 수밖에 없다.
“네놈 속셈도 알지.”
“그래? 거추장스러운 말 안 해도 되겠네.”
공야성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어차피 난 떠날 몸.”
“그러지 말고 생각 좀 해 보지?”
공야성은 버럭 고함을 질러 댔다.
“됐다니까!”
“소리는 왜 질러!”
“그만큼 고생했는데 소리 한 번 못 질러!”
울화가 터진 건 바둑만이 아니라서다.
바둑 때문에 한창 골이 났을 때, 무윤이 유선에게 쓸 약초를 보고 있자 냉큼 쏘아 댔다.
-약초 볼 줄이나 알아?
-알지.
-알긴 개뿔! 잘난 척 나대다가 독초 먹고 뒈진 놈 여럿 봤다.
-의원이랍시고 뻐기다가 약초꾼한테 창피당하는 놈도 여럿 봤지.
-그래서? 너도 약초꾼은 된다?
-그럴걸.
-못 믿겠는데.
-해 보면 알지.
-해 보자고? 나랑?
-자신 없으면 말고.
공야성은 참고 있던 울화가 욕지거리로 터져 나왔다.
-이 입만 살은 새끼! 좋아! 해 보자고.
한데 장원에 있는 약초 전부도 모자라 머릿속까지 다 끄집어내서 설전을 벌였건만 무승부가 되고 말았다. 바둑이야 그렇다 쳐도 의원인 자신인데.
신강에서 무륜이 의원들과 약초학 서적을 편집했던 걸 공야성이 알 리 없으니.
아연해진 공야성은 짧은 말을 내뱉었다.
-너 뭐냐?
-흑도방주.
-……!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하지만 그래서 떠나려는 건 아니다.
잠시 아쉬운 빛이 공야성의 눈가를 스쳐 갔다.
‘보기보단 괜찮은 놈인데.’
그래도 떠나야 한다. 그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곳에 오래 머물 처지가 아니니.
이젠 진정으로 말을 꺼내야 할 때.
“사정이 좀 있다. 그동안 고마웠다. 재밌기도 했고.”
“재밌는 일 더 많은데. 들어 볼래?”
가는 마당에 듣는 것까지야 뭐.
“뭔데?”
“은광 사업해서 왕창 돈 들어오는 거 알지?”
“안다. 그건 왜? 가는 마당에 나 배 아프라고?”
“그 돈으로 사업하려고.”
“어떤 거?”
“많은데. 음! 우선 고리대.”
공야성은 짐짓 눈에 핏발을 세웠다. 세상 도처에 널린 패악 중 가장 으뜸이 그것인데 턱 하니 그걸 먼저 내뱉다니.
“이 우라질 놈! 할 게 없어서 그딴 걸 생각해?”
“그게 어때서.”
“흑도방주란 놈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 뭐야?”
“참 성질 급해. 듣고 성을 내든지 말든지 해.”
“씨불여 봐! 아니기만 해 봐, 그냥 확!”
무윤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역시!’
이런 놈일 줄 알았다. 그동안 보인 지식도 그렇고, 생각도 세상을 보는 눈도 자신과 비슷한 놈. 앞으로 할 사업을 맡기기에 이만한 놈이 없다.
게다가 삼십 대 중반인 나이인데도 친구 같은 자. 말이 편하게 나오는 이유가 다 있다.
어쨌든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야 할 때.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