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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21화 (21/161)

21화

눈치를 보던 곽유양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우린 일이 있어 가 봐야겠네.”

아무래도 방주가 유선에게 맘이 있는 듯해서다.

악무길도 따라 일어섰다. 무윤이 여인에게 관심 가지는 건 처음 본다.

“나도 먼저 일어나야겠어. 방에 일이 좀 있어서.”

잠시 후, 혼자만 남자 무윤은 적당히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녀는 그럴 만한 춤을 보여 준 예기니까.

“내가 왜 그러는지 궁금하겠지?”

“……그렇기는 해요. 사실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

“친한 친구가 있다. 나처럼 거칠게 산 놈인데 생뚱맞게 춤을 배워 보라는 거야. 얼마나 황당했던지.”

“춤은 갑자기 왜?”

“우리 사는 세상 알잖아. 잠시라도 흥겹게 살아 보라는 거지.”

“호호! 좋은 친구분이시네요.”

“귀찮게 하는 놈이지. 하여간 그놈이 하면 나도 따라 한다고 하고는 말았어. 근데 내가 왜 여기 왔겠어?”

유선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분이 배웠군요?”

“그래. 나보다 더 피비린내 나게 산 놈이 그랬으니 나도 빼기가 힘들어졌지. 그래서 와 본 거야.”

유선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럼 혹시?”

“아니! 우선 보기만 하려고. 근데 솔직히 그대 춤은 훌륭했지만 배우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어. 보여 준 게 다라면 말이지.”

그제야 유선은 자신을 바라보던 무윤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그런 거였어.’

의심이 말갛게 씻기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녀야 원한 길이 아니었지만 춤은 자신이 선택했다. 그 결정을 내리던 순간의 벅찬 희열이 오랜만에 가슴 가득 파도로 너울거렸다.

‘그걸 알려 줄 수 있다면!’

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선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는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결정을 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느껴 보고 싶은 감흥이니까.

요즘 들어 몸이 좀 힘들긴 하지만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다.

“잠시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옷은 왜?”

유선은 상대를 보는 눈에 열기를 더했다.

“춤은 제가 살아가는 힘이에요. 그걸 보여 드리려고요.”

“……?”

잠시 후, 풍성한 치마 대신 꽉 끼진 않지만 대략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경장 차림의 그녀가 들어왔다.

손발과 몸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

아까와는 달리 은은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흘렀다.

잠시 감았던 눈이 떠지는 순간, 경쾌한 발 디딤새가 두 팔의 날갯짓을 불렀다.

사라락!

유려하게 바닥을 스친 발사위가 사뿐사뿐 짚어 낸 걸음을 재촉했다. 굽혔다 피는 오금질에 온몸이 놀려지며 허공을 휘저었다. 흐느적거리는 어깨춤에 단아함과 신명이 담겼다.

스르륵!

지켜보던 무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아까와 다르다.’

유유히 뿌렸다 제친 손끝이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날리는 손끝 따라 허공에 선이 그려진다. 흩뿌려졌던 선이 모여 없던 꽃잎이 되고 설익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사라락!

무윤의 입가에 작은 탄성이 올라왔다.

‘좋구나!’

정갈한 아름다움은 물론. 하지만 무윤의 두 눈 가득 들어온 건 세상 다 가진 듯 온화한 그녀의 미소다.

초록 향기 받아먹은 꽃 너울 같은 웃음, 손끝으로 그려 낸 한 송이 꽃향기가 그 입가에 담겼다. 하얀 치아를 드러낸 웃음엔 봄기운이 흐른다.

아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

‘흥겹다.’

어떤 세파의 고난도, 시름도 저 미소 앞에는 스스로를 묻어갈 듯했다. 어느새 치켜뜬 눈망울엔 포말로 부서지는 강물의 반짝임이 어른거린다.

몇 가닥 춤이 더 흘러갈 무렵, 어느새 춤사위는 눈앞에서 물결치는 잔잔한 파도로 넘실거렸다. 하늘 향해 팔 벌린 날갯짓은 천지를 연결하려는 몸짓이 됐다. 그 허공을 가르는 팔에 뿌려지는 선은 흩날리는 꽃잎이다.

사라락!

무윤의 뛰는 가슴이 충동질했다. 가슴 가득 꽂혀 든 그녀의 미소가 부추겼다. 눈에 물결치는 나비의 날갯짓 그대로 따라오라고.

어깨를 들썩여 보라고, 바람을 받아먹은 잎사귀가 몸 흔들 듯 흐느적거려 보라고.

흥이 절로 돋았다. 으쓱거려지는 무윤의 어깨가 화답했다.

스윽!

들뜨는 몸, 팔다리를 어찌 가누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느껴지는 흥에 뛰는 가슴이 장단을 맞출 뿐.

무윤은 그제야 알았다.

‘내 몸이……. 춤추고 싶어 해.’

얼마 후, 동작을 마치고 숨을 고르던 그녀의 고운 치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후! 어땠어요?”

무윤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대는?”

“처음 춤을 접했던 감흥을 실어 봤어요. 느끼셨다면 좋겠는데.”

무윤은 그 마음 그대로 올곧이 전해졌음을 알렸다.

“내가 느낀 게 맞군.”

“다행이네요.”

“가끔 찾아왔으면 하는데.”

짧은 한마디에 그녀의 마음이 담겼다.

“춤이라면 언제든.”

“……!”

넉 달 후.

침주 저잣거리엔 작은 소문 하나가 퍼졌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뭐?”

“청호방주가 성화루 유선이를 점찍었다는군.”

“그 예기(藝妓) 유선이 말인가?”

“가끔 밤마다 찾아가는 모양이야.”

“그래? 이거 성화루 갈 땐 조심해야겠어.”

“그래서 하는 말일세. 괜히 건드리지 말라고.”

“당연하지. 내가 목이 몇 개도 아닌데.”

며칠 후, 청호방의 방주 연무장.

바닥에 널브러진 하후진은 숨을 헐떡거렸다.

“헉헉!”

비무가 끝나고 긴장감이 풀리자 온몸에 통증이 밀려왔다. 허망함 가득 담은 한숨이 그대로 내뱉어졌다.

‘따라가기는커녕.’

분명 넉 달 전 다시 찾았을 때는 따라갈 길이라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벌어진 격차가 어디까지인지 감이 안 올 정도니.

문득 엉뚱한 상상까지 떠오른다.

‘어디서 영약이라도 구했나?’

그때 속을 뒤집는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많이 늘었는데. 몇 달만 더하면 저놈한테 시비 걸 정도는 되겠어.”

무윤이 슬쩍 턱으로 가리킨 건 지붕 위다.

하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왔어? 언제?”

“대련 끝나고 막.”

“그냥 둘 거야?”

“그럼? 죽이기라도 하라고?”

“못 오게는 해야지. 언제까지 그냥 둘 건데?”

“몇 번 눈치 줬는데 저러는 건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는 거잖아. 너 들락거리는 것도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그래도 하오문 지부장 조카야. 언제 퍼질지 모른다고. 조심성 많은 놈이 저자한텐 왜 그리 관대한지 모르겠어.”

무윤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내 주변에 저런 놈 하나쯤은 괜찮겠다 싶어서.”

“뭔 소리야?”

“저치도 너나 나처럼 복잡한 놈이잖아. 근데 정말 잘 웃어. 가끔 저놈 훔쳐보다가 배우는 게 많아.”

“……?”

무윤은 연사구가 자신을 살피는 걸 알고는 뒤를 추적했었다. 처음엔 몰래 죽일까 고민도 했는데 어떤 놈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파악한 이후론 그냥 놔두기로 했다.

‘정말 닮고 싶은 놈이거든.’

이전 생과 지금을 통틀어도 무윤이 안 되는 게 있다. 가끔은 고민을 내던지고 지금 이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는 것. 험난한 생을 살아온 이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가끔 짓는 미소 또한 순수한 즐거움보다는 대부분 남모를 의미가 담겼다.

한데 연사구란 놈은 아픈 사연이 있음에도 웃을 땐 거짓이 아니다. 목젖까지 열어젖히고 깔깔거릴 땐 세상에 가장 속 편한 인간 그 자체다.

가끔 그런 미소를 훔쳐볼 때마다 자신 또한 비슷한 미소가 그려진다. 최근 춤을 배울 때 간혹 짓는 진짜 웃음도 연사구 영향이 컸다.

그걸 알고 나서는 당분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놈의 조급증에서 느껴지는 것.

‘조만간 제 발로 올 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하후진은 앓는 소리를 냈다.

“당최 뭔 소린지.”

“그런 게 있어. 이제 가 봐라. 할 일이 있다.”

“요즘 뭐 한다고 그렇게 바빠?”

“곧 알려 줄게. 대략 준비는 끝났다.”

하후진은 전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몇 달간 정말 힘들게 조사하다가 알아낸 게 있다.

“참! 저번에 침도방 일 물어봤었지?”

“살수?”

“그래. 정확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서문가가 관련됐지 싶다. 그때 그놈이 자주 만난 게 그쪽이더라고.”

“둘째 형이란 놈?”

“그래.”

“이유는?”

“거기까진 몰라. 더 조사해도 알기 어려울 거야.”

“……?”

무윤의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다.

같은 호남이지만 북쪽 끝인 서문가는 여기서 팔백 리 길.

‘호남 최고 무가가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흑도 방파를 은밀히 건드린다? 그것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을?’

어떤 짐작도 안 되는 일이다. 어쨌거나 직접 엮인 게 없으니 다행이지만.

한편 지붕 위의 연사구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에야 확실히 알게 된 사실.

‘이 기운! 분명 저 새끼가 보낸 거야.’

지난 몇 차례 비슷한 기운을 느꼈지만 그땐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오늘은 확연히 떨림이 왔다.

‘어쩐지 내가 있을 땐 대충 싸우는 거 같더라니.’

몇 달 전 그 일 때문에 하후진이 절정을 넘은 건 소문이 났다.

그런 하후진이 돌아갈 땐 항상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 옷이야 갈아입었지만, 자신도 절정의 무인인데 그 표정을 모를 수 없다.

‘매번 깨진다는 소린데.’

거기다 자신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냥 있는 놈.

‘이 새끼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감춘 신분이 분명 있을 터라 알아보려 해도 덥수룩한 수염 탓에 얼굴 파악부터 안 된다.

무윤을 째려보는 연사구의 눈이 깊어졌다.

‘그런다고 못 찾을까 봐.’

연사구는 하오문에 의뢰 들어온 조사자 명단 전부를 깡그리 훑고 있는 중이다. 한두 달 정도면 분석이 다 끝난다.

자신이 살피는 걸 알고도 한껏 여유를 부리는 놈.

‘좀만 기다려. 직접 면상에 들이밀어 줄 테니까.’

이젠 호기심에 오기까지 더해졌다.

며칠 후, 저녁 무렵, 침주 저잣거리.

일이 많아진 탓에 오랜만에 성화루에 가는 길이다.

악무길의 쫙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흐흐흐!”

“침 떨어지겠다.”

“그럼 어떠냐. 기분 째지는데.”

본격적으로 생산된 은이 이젠 호남 중부까지 거래선을 넓혔다는 연락 때문이다. 채굴에서 판매까지 모든 물류 체계가 완비됐다.

오 할 지분 중 일 할은 네 의남매 몫으로 넘겨줬다.

“돈이야 곽 소저야?”

“당연히 둘 다지.”

“곽 소저는 너한테 눈길도 안 주던데?”

“예전엔 콧방귀만 꼈어. 그래도 지금은 인상 안 쓰고 쳐다봐 주긴 하잖아.”

이럴 때 할 소리는 하나뿐이다.

“잘났다, 정말. 푼수가 따로 없네.”

악무길은 눈을 치켜떴다. 밤에 몰래 유선에게 가는 놈에게 들을 말은 아니다.

“네가 할 소린 아니지.”

“뭔 소리야?”

“유선! 너도 마찬가지잖아.”

“풋! 개 눈엔 똥만 뵌다더니.”

“아니라고? 그럼 왜 밤이나 새벽에 가는데?”

“정말 몰라서 그래?”

“알지. 밤엔 춤 배우는 거 말고도 할 게 많은 거. 크크!”

“맘대로 생각해.”

“나 참! 그게 뭐 창피한 일이라고 숨기고 그래? 아! 지금은 초저녁이라 좀 그런가?”

“요즘 몸이 아프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못 할 수도 있어.”

“그러든가. 아플 땐 안 하는 게 좋지.”

“……!”

잠시 후, 성화루 삼 층 귀빈실.

성화루주 예향은 떨리는 숨으로 말끝을 흐렸다.

억지를 부리는 손님에게는 애처롭게 보여야 한다.

그것도 침주 최고인 하후가의 이 공자가 그럴 땐.

“공자님, 말씀드렸듯이 유선이는 며칠 전에 일을 그만뒀어요. 몸이 안 좋아 거동하기 어려워 여기 있을 뿐이에요.”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건가? 아직 기적(妓籍)에 올라 있다고 들었어.”

“그건 현에서 아직 처리가 안 되어서 그런 것인데.”

하후가 이 공자 하후태는 가소롭다는 듯 입을 비틀었다.

“그래서? 어렵다?”

“정말 몸이 안 좋아요. 춤은커녕 노래도 어려운 지경이라. 아니면 제가 감히 공자님 앞에서 왜 이러겠어요.”

하후태 옆에 있던 진계찬이 대신 나섰다.

“허! 루주! 이 공자님이 내일 무림맹으로 장도에 오르시기에 연 환송회 자릴세. 그런데 정말 이러긴가?”

환송회를 주도한 승문장의 소장주 진계찬 입장에선 나설 수밖에 없다.

‘뭐가 꼬인 게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

이미 예약 시 유선의 상황을 듣고 하후태에게 알렸는데 막무가내로 저러고 있으니.

다른 이들은 내일이면 떠날 하후태가 이곳에 온 속내를 모른다.

일 년 전, 큰형 하후천기가 술자리에서 만취해 흘린 얘기가 있다. 눈앞에 있는 유선에 대해서.

하후태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속내를 알렸다.

‘크크! 망신 주기엔 이만한 게 없지. 나야 내일 떠나면 그만이고’

큰형이 유선과 한 일은 기방에선 있을 법한 일. 다만 알려지면 소가주 체면에 망신살은 제대로 뻗친다.

이삼 년 후에야 돌아올 자신의 입장에선 장난치기 딱 좋은 거리다.

거기에 어제 들은 소문도 더해졌다.

‘거기다 이년이 청호방주 애인이란 말이지. 크크!’

그 둘을 동시에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온 자리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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