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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20화 (20/161)

20화

옥 목걸이를 바라보던 무윤의 눈이 아련해졌다.

‘곽소산, 그녀가 이걸 버렸으리라 생각했는데.’

당시 무륜은 그럴 거라 확신했었다.

여단이 살아 있을 때도 그렇고 죽은 이후에도, 그녀는 강호와 어떤 연도 맺지 않으려고 했었다. 찾아온 여휘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 또한 이전과 변한 게 없었고.

지금 추측할 수 있는 건.

‘여단의 이름도 있어서 차마 버리지 못한 모양이야.’

당시 곽소산은 아들을 집안의 아이로 키우겠다고 곽 씨 성을 주겠다고 했었다. 한데 지금 목걸이 주인의 성도 곽 씨다.

무윤은 목걸이를 건네고는 물었다.

“오래된 목걸이네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계속 아들한테 물려준 건데 친척들이 하나둘 줄다 보니 지금은 딸인 제 것이 됐죠.”

“여기서 오래 사셨습니까?”

곽운지는 그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럼요. 지금은 몇 집 없지만 우리 혈족은 여길 떠나 본 적이 없어요. 아주 옛날부터 은광 개발을 해 왔죠. 우리만큼 여길 잘 아는 덴 없어요.”

무윤의 시선이 바로 곽유양을 향했다.

이제 다른 곳은 생각할 수도 없다. 생각한 대로 말을 지어냈다.

“제가 이상하시겠죠?”

“크흠!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믿을 만한 분 같으니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아주 오래전 지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엔 여기 지형이 이렇지 않았죠. 산사태 이전에 여길 탐색했을 겁니다.”

곽유양의 눈이 커다래졌다.

“산사태? 보다시피 여긴 그런 흔적이 전혀 없네. 혹 아주 오래전이라면 몰라도.”

“지도는 오백 년이 넘은 겁니다.”

“……그럼 거기에?”

“커다란 은맥이 표시돼 있었죠.”

“정말인가?”

“작업할 돈부터 드리죠.”

“……!”

지금 침주의 어떤 가문도 천 년 전 무륜의 기억엔 없다. 그 긴 세월을 이어 온 가문은 없다는 뜻. 한데 산속의 일개 혈족이 그 장구한 세월을 버텨 오다니.

그것도 여단의 아들이 있던 곳이.

무윤에겐 이보다 큰 기쁨이 없다. 당시 여단의 아이에게 아무것도 못 해 준 아픔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무윤은 햇살 가득 품은 하얀 구름을 멀거니 응시했다.

풀잎을 흔들며 산 너울에 봄 향기 가득 전한 바람이 스쳐 간다. 그 향기 받아먹은 싱그러운 미소가 입가에 흘렀다.

‘네 인연을 만나다니!’

물론 긴 세월 탓에 순수한 혈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천 년 세월을 거쳐 온 목걸이다.

시공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있는 자신과는 다르다. 여단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여휘의 한 가닥 인연이 천 년 세월을 묵묵히 헤쳐 나왔다는 증명이다.

그것만으로 셋의 후손이나 마찬가지다.

세상 다 가진 듯 환한 미소가 한동안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한 달 후, 청호방 장원 앞.

곽유양은 마침 나가려던 무윤에게 급히 다가왔다.

예의를 갖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네 말이 맞았네. 그동안 미안했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어떻습니까?”

“대박일세.”

“나눌 얘기가 많겠군요.”

“당연하지. 어디 가는 모양인데 다녀오시게. 기다리지.”

그렇지 않아도 혼자 가기 어색했는데 잘됐다.

“같이 가시죠.”

“어디?”

“기루에 갑니다.”

곽유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한 얘기인데 기루는 좀 그렇지 않은가?”

“술 마실 게 아닙니다.”

“그래도.”

“조용한 곳을 부탁해 놨습니다.”

곽유양은 타협안을 꺼냈다.

“아직은 말이 새 나가면 좋지 않네. 여인네는 좀.”

“끝나고 부를 생각입니다.”

“뭐 그렇다면.”

여휘가 권한 춤 때문에 가는 길이다.

유선이라는 예기를 만나러.

잠시 후, 침주 시내 성화루.

무윤과 악무길, 곽유양, 그리고 그가 부른 자 넷이 자리했다.

“크흠! 난 성운상단 단주 진유송이라 하네. 반갑네.”

곽유양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내 처남일세. 미리 말했지만 믿을 만한 건 물론이고 실력도 있어서 부른 것이네. 채굴과 정제는 내가 맡고 이 친구에게 운송과 거래를 맡길까 하네만.”

“그쪽은 이미 일임했잖습니까.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고맙네. 최선을 다하겠네.”

“몇 가지 알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우선 일의 주체는 별도 상단을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동감이네. 이만한 규모면 그게 좋지.”

“지분은 반반 어떻습니까?”

곽유양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반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지금 반반이라 했나?”

“대신 다른 곳을 끌어들일 땐 똑같은 지분을 내놓기로 하시죠.”

곽유양과 진유송은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허! 반이라니.’

지금 발견된 은맥만도 최소 오십 년은 캘 양이다. 매년 은자 수천 냥의 이익이 그냥 떨어질 만큼이고.

이 정도면 지분 분배가 아닌 일정 금액만 지불해도 감지덕지할 판이다. 혹 분위기가 좋으면 일 할 정도 지분은 꺼내 볼 심산이긴 했다.

그런데 떡하니 내건 조건이 반반이라니.

곽유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이보게. 여기 관행보다 너무 많은 분배일세. 난 솔직히 자네 저의를 모르겠네.”

무윤은 지금 눈빛 그대로 담아 상대를 마주했다.

“남들이 어떡하건 전 제 기준에서 합니다.”

“기준이라?”

“전 찾고 소유만 했을 뿐 광산에 대해선 아는 게 없습니다. 앞으로 생산량과 수익은 온전히 그쪽에 달렸습니다. 그것도 족히 오십 년은. 안 그렇습니까?”

“그거야.”

“여러분이 속이지만 않으면 앞으로 간섭도 지시도 없습니다. 아니, 귀찮아서라도 전 보고만 받을 겁니다. 중요한 다른 일이 있거든요. 이해되십니까?”

곽유양은 말의 진의가 그대로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자네가 그리해 준다면 열심히 일해서 보답하지. 그리고 보고야 당연하고 속일 일은 없을 것이네. 그건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하지.”

“보여 준 모습대로만 하시면 저도 믿습니다.”

“크흠! 변할 일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관에 줄 뇌물은 따로 드리겠습니다. 가장 걱정되는 건 그쪽이거든요.”

“너무 걱정하지 말게. 허가를 받자면 뇌물이 필요한데 이후엔 저들도 간섭할 게 별로 없네. 가끔 뒷돈만 챙겨 주면 되지.”

“그게 아니라 앞으로 제가 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시전에 여러 사업을 벌일 생각인데, 물론 안 되면 그만이지만 잘되면 이삼 년 후엔 부딪칠 곳이 여럿 생길 겁니다.”

“……?”

당초엔 미리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일이 마음에 걸렸다.

곽운지를 마음에 둔 악무길에게 곽유양이 했던 말.

-나보고 덜 나쁜 도적놈이 되라 이 말인가? 자네가 항상 청호방이 흑도 중 그런 곳이라고 말한 것처럼?

악무길을 위해서 먼저 알리기로 했다.

청호방이 덜 나쁜 도적이 아닌, 그냥 덜 나쁜 놈 정도로 바뀔 거라는 걸.

얼마 후, 무윤의 세세한 설명이 끝나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얘기는 악무길도 처음 들었다.

“방주, 정말 그런 게 가능해?”

“왜, 안 될 거 같아?”

악무길은 가슴을 쭉 내밀고는 불꽃같은 정광을 보였다.

“나야 잘 모르지. 한데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막 뛰네. 하하!”

곽유양은 흉중에 품은 의문을 그대로 흘렸다. 뜻은 좋으나 그만큼 어려운 일임을 잘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리할 생각인가?”

무윤은 거짓 반, 진실 반을 섞었다.

“규모는 달랐지만 해 봤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정말인가? 그게 가능하던가?”

“전 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곽유양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볍지 않은 흥분이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그런 일이라면!’

듣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정도면 덜 나쁜 흑도가 아니라 괜찮은, 아니 겉과 속이 다른 정파보다 아주 괜찮은 흑도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곽유양은 결정을 내렸다.

“그 일엔 청호방이 직접 나설 생각인가?”

“아뇨. 따로 만들어서 해야죠.”

“그럼 같이하세. 나도 그런 일이라면 동참하고 싶네.”

“……!”

이후 세세한 논의 끝에 새로 만든 상단에서 모든 일을 맡기로 했다.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곽유양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 정도면 자네 말대로 뇌물을 주는 게 좋겠네.”

“다른 청탁을 거절할 만큼 줘야 합니다. 필요하면 호남 부윤(府尹)까지도.”

묵묵히 듣고 있던 진유송이 나섰다. 아무리 은맥이 크다 하나 호남 전체를 관장하는 부윤까지 뇌물을 주기엔 큰 부담이다.

“부윤 측근을 내가 좀 아네.”

“잘됐네요.”

“하나 금액이 자네 상상 이상일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게 이럴 때 쓸 말이네.”

“그래도 다른 뇌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잖습니까.”

“어떤?”

“우리 청탁은 도와달라는 게 아니고 억울한 일만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겁니다. 받아도 깨끗한 뇌물인데 금액이 적다고 구미가 안 당기겠습니까?”

“그렇긴 하네만.”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또 그 꼴을 당할 순 없지.’

천 년 전에도 침주에서 비슷한 일을 진행했었다. 한데 한창 잘되던 사업이 한 방에 무너진 건 갑자기 개입한 관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당연히 반대 세력들이 준 뇌물 탓이고.

“관을 틀어잡지 못하면 아무 일도 안 됩니다. 돈은 걱정 마시고 지금부터 그렇게 하세요.”

“응? 지금? 그럴 필요 있나? 허가 말고는 이삼 년 후에야 생길 일인데?”

“지금부터 다져 놔야 합니다. 저들은 이미 오래됐잖습니까?”

“……!”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논의가 한참 동안 이루어졌다. 그렇게 열기가 가득했던 자리가 끝나 갈 무렵 무윤은 화제를 돌렸다.

“이제 기녀를 불러 볼까요.”

곽유양에게 슬쩍 턱짓을 한 진유송이 나섰다. 눈치 없이 젊은 친구들 노는데 끼어서 분위기 망칠 이유가 없다.

“허허! 술이라면 모르지만 여인네라면 우린 빠짐세. 하도 오래돼서 놀 줄도 모르고 이젠 불편하다네.”

“가무를 싫어하십니까?”

“응? 그거야…….”

“여기 유선이라는 예기(藝妓)의 춤이 대단하다고 해서 보러 왔습니다만.”

“……!”

얼마 후, 불려 온 여인의 춤사위가 몇 차례 방안에 펼쳐졌다.

격한 숨을 다스리던 예기 유선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맘에 안 드는 거야.’

침주 최고의 예기라 불리는 그녀다. 춤사위 도중 손님의 표정을 살피는 건 기본.

한데 가운데 정좌한 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놀라거나 흥겨워한 적이 없다. 그저 무심한 표정 그대로일 뿐.

유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떡한다?’

더 춤을 춰야 할 상황인지 판단이 안 선다.

모임의 좌장이 청호방주인 건 이미 들었다. 그보다 더 높은 신분이야 침주에 많지만, 자신 같은 기녀에겐 가장 무서운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근 일 년 반 동안 기루엔 발길도 안 하던 자가 자신을 지정해서 불렀다. 잠자리야 홍루(紅樓)의 기녀인 그녀라 응하면 그만.

하지만 최선을 다한 춤사위에도 흥이 없는 저 표정은 스멀스멀 불안함이 올라오게 만든다.

분위기가 어색하자 악무길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방주, 어떻소? 난 정말 눈이 호강한 거 같은데.”

“보기 좋았어.”

“크흠! 그럼 이만하는 게…….”

무윤의 의미 모를 눈빛이 유선을 향했다.

“더 보여 줄 건 없나?”

“……원하시는 게 있으신지?”

“딱히 그런 건 없고. 묻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어떤?”

“춤추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지? 자기 몸으로 동작을 펼칠 때 마음가짐은 있을 거 아니겠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한동안 멍해진 눈빛만 허공을 헤맸다.

‘뭐가 궁금한 거지?’

분명한 건 남자로서 음흉함이 담긴 질문은 아니다.

이러면 결국 물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뭘 알고 싶으신 건지?”

무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알고 싶어서 온 자리니까.

“문외한인 내가 봐도 멋있고 훌륭한 춤이었어. 근데 춤출 때 그쪽 마음을 모르겠더라고. 시켜서 한 거니까 짜증 난다거나, 아니면 즐겁다거나. 뭐 그런 거.”

그제야 유선의 입가에 미소가 되살아났다. 다른 의도도 없고 자신의 춤이 부족하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말이다.

“무녀(舞女)는 당연히 춤으로 손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게 본분이에요. 그러자면 춤에 흥만 있어야지 제 기분이 녹아들면 안 된답니다. 그게 보인다면 무녀로서 부족한 거지요.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크크! 그러고 보니 정말 무식한 질문이었네.”

“아! 저, 그런 뜻에서 드린 말씀은 아닌데…….”

“그댈 탓하는 게 아니야. 난 그대가 원하는 춤을 보고 싶었거든. 우릴 위해서가 아닌 그쪽이 추고 싶은 춤.”

“……?”

영문을 모를 말이다.

의아한 유선은 연신 눈만 껌벅거렸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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