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무윤은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마조장이란 자가 거기 있었으니 일이야 들으셨을 테고.”
갈마풍은 호기심을 담아 시선을 마주했다.
“들었지. 근데 일이 좀 묘하군그래. 그 대로에서 버젓이 살수가 나타나다니 말일세.”
사십 줄에 접어든 갈마풍이라 말은 높여 줬다.
“그게 이상해서 온 겁니다. 엄한 돌이 저한테까지 날아오는가 해서.”
“……하후가 말인가?”
“저야 모르죠. 거기가 적일지 아닐지.”
갈마풍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조심, 또 조심인 자신이 가장 신경 쓴 건 역시 하후가다.
수하들에게도 무조건 고개 숙이라고 얼마나 부르짖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나? 자네도 날 대략은 알 텐데.”
“그러니 더 이상할 수밖에요. 짐작 가는 거라도 없습니까?”
갈마풍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없네. 최근엔, 아니 올해 내내 단 한 건도 엮인 게 없어. 우연히 그리됐을 게야.”
꼭 답을 원해서 온 자리도 아니다. 그저 핑계 삼아 침도방을 살펴보려 한 것뿐, 특별한 게 보이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갈마풍은 문득 든 궁금함에 물었다.
“한데 왜 나섰나? 자네도 그간 나랑 비슷하게 처신하던데.”
“당황해서 깜빡했지 뭡니까. 명색이 하후가 공자인데 도와주면 뭐라도 떨어질 줄 알았죠. 지나서 보니 멍청했더군요.”
“크크! 하긴 그렇지. 하여간 나도 살펴보겠네. 자네도 혹 모르니 당분간은 조심하게.”
“안 그래도 장원에만 틀어박혀 있을 생각입니다.”
“조용해지면 술이나 한잔하지.”
“그러죠.”
그렇게 돌아 나오던 순간, 뇌리를 타고 오르는 싸한 기운이 경종을 울렸다.
‘내기!’
미약하지만 분명 몸 주변을 훑어 대는 건 내력으로 퍼트린 은은한 기운이다.
무윤의 눈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정도면!’
잠시 후, 무윤은 장원 밖을 나오자마자,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흑도 방파에 초절정이라.’
그 정도는 돼 보이는 기운이다.
침도방과는 엮인 것도 없고, 향후 판단에 따라 세를 넓힌다고 하더라도 굳이 싸워서 해결할 상대도 아니다.
하지만 적운문주 설도승에 이어 여기도 웅크린 자가 있다.
그 정도 인물이 흑도에 스며든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또 방주 갈마풍이 그럼에도 몸조심한다는 건, 대놓고 나서지 못할 자란 뜻.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당분간 위험은 없다고 봐야 한다.
무윤의 눈가에 씁쓸함이 잠시 스쳤다. 하후진에게 떠들어 댄 게 그대로 돌아왔다. 지금은 자신이 눈치챈 게 들키지 않은 걸 안도해야 할 때니.
‘나부터 웅크려야 해.’
중단전의 절정, 체기발경(體氣發勁)은 하단전으론 초절정에 준하는 경지다.
그때가 되면 서서히 움직이려고 했건만, 더 늦춰야 한다.
무윤은 먹구름이 풀려 우중충해진 하늘로 시선을 향했다.
‘최소 일 년은.’
낮의 온갖 상념을 몰아낸 어둠만이 답답한 무윤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 * *
한 시진 후, 하후가 내원의 한 거실.
-고작 흑도방주 하나 껴들었다고 실패?
-사람들이 너무 많은 곳이라 해밀야의 후속 조원들이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하후가주의 둘째 아들, 하후태는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했다.
-광동 최고라는 해밀야 놈들이 고작 절정 하나를 처리 못 하고 이 지경을 만들다니.
-어찌할까요? 다시 연락을…….
하후태의 휘휘 내젓는 손엔 짜증이 가득 담겼다.
-지금은 아니다. 우선 철수하라고 해.
-예.
당장 더 일을 벌였다간 가문 내부 의심의 눈초리는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
하후태의 치켜뜬 눈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가 가득 담겼다.
같잖지도 않은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서다.
거기에 짜증 난 눈빛은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백건 형님은 괜히 이상한 부탁을 해 가지고.’
하후진이 꼴 보긴 싫지만 당장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외사촌 형인 서문가 소가주, 서문백건이 얼마 전 장사에 들렀을 때 부탁한 게 있다.
-거기 침도방이라고 있지?
-예, 거긴 어떻게 아십니까?
-거기 있는 놈 하나가 먼 친척 여동생을 건드렸다.
-예? 그럼 당장 잡아 조져야죠. 누굽니까?
-떠들 일이 아니야. 살살 꼬드김을 당해 돈까지 갖다 바치고 나서야 안 모양이더라.
-……그럼?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적당히 핑계 만들어서 혼 좀 내.
-어느 정도로?
-감히 우릴 건드렸는데 방주 목 정도는 날려야지.
-……?
그런 일이면 그놈을 조져야지 방주를 거론한 게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까. 자신이 향후 가주가 되려면 호남 최고인 서문가의 전폭적인 지원 없인 불가능한데.
그래서 방안을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참에 꼴 보기 싫은 놈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방법이.
서자라도 하후가 공자를 죽인 공범으로 침도방을 몰아가면 방주 정도는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랬던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렸다.
하후태의 성난 입이 또 다른 곳으로 분노를 흘려 냈다.
당장은 아니지만 반드시 손볼 놈이 하나 더 늘었다.
‘청호방주. 그 새끼라고 했지!’
물론 모르고 했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걸리적거리는 쓰레기는 버릴지 말지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냥 치우면 된다.
다만 지금은 웅크릴 때.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 * *
다음 날, 청호방 방주실.
악무길이 데리고 온 광산 개발자 곽유양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몇 번을 말하오. 거긴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 안에 있을지 모르죠.”
“허! 이보시게. 우리가 거길 안 살폈겠나? 주변에 은 광맥이 많은 곳인데.”
“탐사하는 돈은 드린다고 했잖습니까? 그쪽이야 손해날 게 없는데 왜?”
“상도의라는 게 있네. 빤히 없는 걸 아는데 어찌 그런단 말인가?”
“파 봐야 아는 일이죠.”
“파 봐도 없네. 지형 흐름상 있을 곳이 아니야. 내 이런 말은 뭐하지만 여기 침주에서 나만큼 경험 있는 자도 드물지. 내 말을 믿으시게.”
“못 하시겠다면 다른 곳에 맡기겠습니다.”
곽유양은 안타까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이보게. 못해도 은자 백 냥은 들어갈 일이네. 적은 돈도 아닌데 아끼시게.”
무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긴 끝난 거 같네요.”
도의를 지키고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움직일 자가 아니다.
그때 곽유양의 딸, 곽운지가 황급히 나섰다. 무윤의 눈치를 살피는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저기, 그러지 말고 타협점을 찾아보는 게…….”
“여기서 다른 방법이 나올 게 있나?”
당장 끼니를 걱정할 판인데, 아버지 옹고집이야 딸인 그녀가 왜 모를까. 해법은 오직 흑도방주란 자를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다.
곽운지는 대안을 꺼내 들었다.
“먼저 육안 실측만 해 보는 건 어떠세요? 그럼 돈도 얼마 안 들고 방주님도 가서 설명을 들으시면 제 아버님 말씀을 이해하실 거예요.”
곽유양이 내민 지도엔 무윤이 알던 곳 대부분이 이미 개발됐다.
한데 매장량이 큰 두 곳이 빠졌다. 이미 개발된 곳 주변인데도 아직 남아 있는 곳.
그 이유가 궁금해 몇 번을 세세히 묻고서 짐작한 게 있다.
분명 은맥이 있는 건 확실한데 전문가가 저러는 이유.
‘오래전에 산사태가 났다면!’
그걸 확인하려면 어차피 가 봐야 한다.
“그거 괜찮네요. 가 보시죠.”
곽유양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 그것참!’
그것도 반대하려던 찰나, 남몰래 소맷자락을 꽉 부여잡는 손이 있었다. 한동안 일거리를 못 찾아 어려운 집안 사정에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던 딸의 손이다.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이 광산 개발자의 자존심을 이겼다.
* * *
얼마 후, 망산(莽山)이라 불리는 천태산(天台山)의 한 자락.
무윤의 입가에 득의한 미소가 흘렀다.
‘역시!’
예상대로 오래전 산사태가 은맥이 있던 곳을 감싸 버렸다.
주변 지형과 은맥의 경로를 세세히 설명하던 곽유양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이제 내 말을 믿겠지? 그만 포기하시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돈을……. 응? 자네 방금 뭐라 했나?”
“전 여길 파겠습니다.”
곽유양은 놀란 눈을 거두지 못했다.
“이보게, 내가 설명이 부족했나 본데…….”
“아뇨, 전문가의 의견 충분히 들었습니다.”
“허!”
“그쪽이 안 하시겠다면 다른 곳에 맡길 수밖에요.”
곽운지를 힐끔거리던 악무길은 더는 안 되겠는지 나섰다.
“어르신. 이 친구 돈 많습니다. 대금도 선금으로 준다고 했고요. 그러니 해 보시는 게.”
악무길이 시전을 바삐 돌아다니던 곽운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벌써 일 년이다. 그 후 일부러 부딪쳐 부상인 척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끔 집에도 들러 곽유양에게 환심을 살 짓도 몇 번 했었고.
흑도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곽유양이 이제야 조금 마음을 누그러트렸는데.
이번 일만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곽유양은 고리눈을 떴다.
“허! 이 친구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그 말은 나보고 도적질하라는 것과 같네!”
악무길은 준비한 말을 꺼내 들었다.
“어르신! 우리 방주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어르신이 안 해도 다른 개발자한테 맡깁니다. 그럼 엄한 자들이 좋다고 덤터기 씌우겠죠. 그보단 어르신이 하는 게 낫습니다.”
“나보고 덜 나쁜 도적놈이 되라 이 말인가? 자네가 항상 청호방이 흑도 중 그런 곳이라고 말한 것처럼?”
“어르신. 그렇게 생각하실 게…….”
곽유양은 단호히 돌아섰다.
“됐네. 난 그럴 생각 추호도 없네. 그만 가 보지.”
참다못한 곽운지가 소맷자락을 부여잡았다.
“아버지. 이분 말씀도 맞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허! 너까지 이럴 셈이냐!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만 도리가 아닌 걸 몰라!”
곽유양이 홧김에 손을 뿌리치던 찰나, 돌부리에 걸린 운지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툭!
악무길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곽 소저, 괜찮으시오?”
“아! 예, 돌부리에 걸려서 그만…….”
악무길은 땅에 떨어진 걸 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목걸이가 떨어졌구려. 여기.”
“고마워요.”
순간 악무길의 손을 잡아채는 이가 있었다. 목걸이가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의아한 악무길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왜 그래?”
“잠깐만.”
“……?”
무윤의 찢어질 듯 커진 두 눈은 멍한 시선 그대로 목걸이를 향했다.
‘이게 어떻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격정을 알렸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떨리는 가슴. 절로 뛰는 심장의 고동과 맥박이 흥분과 설렘을 알렸다.
평범한 옥이다. 다만 거기에 쓰여 있는 세 글자.
오랜 세월에 희미해졌지만 그 윤곽은 분명 단(旦), 휘(輝), 륜(輪)을 나타낸다.
무윤은 온몸에 소름이 절로 돋았다.
천 년 전 자신이 만든 것이다.
‘곽소산, 그녀에게 준 게 맞아!’
신강으로 도망칠 당시 여단의 아이를 배 속에 가졌던 곽소산.
강호를 평정한 후에야 이곳에 와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전에는 혹시나 알려지지 않은 그녀가 위험해질까, 소식만 전해 듣고는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그때 무륜은 청설청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그녀에게 건넸었다. 돈도 무공도 다 거절하고 그냥 조용히 살게 해 달라는 그녀의 말에 천설청옥 목걸이를 건네며 한 말.
-그대 뜻이 그러하니 그냥 떠나겠소. 다만 이건 받아 주시구려. 후손에게 전하시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우릴 찾아오라고.
그때 곽소산은 가만히 고개 저었다.
-이런 귀한 건 지킬 수 없어요. 정 그러시면 평범한 옥으로 만들어 주세요.
-……알겠소. 뜻이 그러하다면.
그래서 만들어 준 옥 목걸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