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다점 안, 평범한 상인 차림의 남자의 눈가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됐어.’
그 누구도 내뻗는 손을 주시하는 이가 없다. 목표와는 일 장. 초절정이라도 사전에 감지 못하면 이 거리에선 독침을 막을 수 없다.
무심함을 다시 마음에 떠올리고는 소매를 살랑이려는 찰나, 묵직한 손이 팔뚝을 잡아챘다.
탁!
무윤은 미간을 찡그리고는 시큰둥한 목소리를 흘렸다.
“무슨 독이지? 냄새가 고약하네.”
침주 남쪽, 광동의 살수 단체 해밀야의 일급 살수 조인의 표정이 우뚝 굳어 버렸다.
‘실패!’
자신의 실패다. 우선 다른 동료에게 신호를 보낼 차례.
조인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목청을 높였다.
“나보고 한 소리요?”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악력을 아주 약간 올려 잡았는데 아픈 기색 하나 없다. 고민할 게 없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베듯 칼을 흘렸다.
쉬이익!
“크윽!”
시린 칼 빛이 조인의 팔뚝을 지나며 피를 머금었다.
투욱!
독침이 든 소매와 함께 팔이 바닥을 구르자, 놀란 좌중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으, 으악! 피다!”
“파, 팔이!”
“도망쳐!”
“싸움이다!”
놀란 하후진과 침도방 마초웅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마초웅의 날 선 고함이 다점을 울리다 말았다. 얼굴 반은 수염으로 가린 자.
“뭐 하는 놈! ……청호방주?”
대답 대신 무윤의 꼬나 잡은 칼날이 또다시 흰빛을 머금었다. 이미 살의를 가득 담은 날은 거칠 것 없이 목젖을 향했다.
휘익! 푸욱!
“커억!”
살수의 공격은 숨을 완전히 끊어트려야 끝이 난다. 정보를 캐니 뭐니 해서 잡는 건 현격한 차이가 날 때나 하는 짓.
삶의 끝을 알린 비명에 앞서 하후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년도 살수다!
하후진은 말뜻을 헤아림과 동시에 뒤통수에 짜르르한 느낌이 전해졌다. 방향은 자신이 보호하려던 그 여인이 있던 곳.
‘맞다!’
바람을 가른 예기와 파공성이 허공을 가르는 암기를 알렸다. 털을 바짝 세운 소름이 무자비한 전율로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늦었다.’
피할 수 없다면 쳐 내야 한다. 판단과 동시에 비틀린 몸이 발길에 와류를 담았다.
휘이익!
숙인 몸에서 풍차처럼 교차한 발길질이 주변을 휩쓸었다.
팍! 파팍! 투둑!
발끝에 차인 세 개의 비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애처롭게 울던 해밀야의 이급 살수, 서정의 눈이 번득였다.
‘방해꾼!’
잘해야 절정인 목표다. 사형 조인과의 공동 작업이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놈 때문에.
꿈틀거리는 눈동자에서 터져 나오는 살기가 심중의 결심을 알렸다. 잡힌 살수를 곱게 죽여 주는 곳은 없다.
‘마지막 수!’
최후의 발악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다.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목표를 향해 비수를 뽑아 들었다.
파팟!
하후진의 칼날 같은 눈초리가 상대의 몸을 좇았다.
이미 살수의 목표가 자신인 걸 안 이상 머뭇거릴 게 없다.
끌어올린 내력 그대로 진각을 비틀어 한 걸음 내디뎠다. 말아 쥔 주먹이 유성처럼 긴 궤적을 그리는 순간,
가슴을 뚫은 주먹이 그대로 명치에 틀어박혔다.
슈욱! 퍼억!
“커억!”
거친 기침과 함께 울혈이 토해지고 형편없이 무너진 몸이 바닥을 쓸었다. 검게 죽은피가 꾸역꾸역 역류해 쉴 새 없이 지면을 적셨다.
비릿한 혈향은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하후진은 속 깊은 한숨을 나직이 흘렀다.
“후우!”
자신을 죽이려던 살수지만 이제 곧 숨이 넘어갈 여인.
어쨌든 저 처절한 모습을 만든 건 자신이다.
그 아련함 가득 담은 시선이 여인을 외면하는 그때, 숨을 헐떡이던 여인의 입이 동그랗게 모아졌다.
나직이 긴 숨을 들이마시고는 뱉으려던 찰나.
호오!
벼락처럼 지면을 쳐 낸 무윤의 신형이 공간을 접었다. 하후진을 지나쳐 날린 칼바람이 그녀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사아악!
“컥!”
덩그러니 잘려 나간 머리에 그녀의 몸이 스르륵 무너졌다.
투욱!
하후진의 머리 위로 퍼런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저 밑에서 나도 모르게 끓어오른 분노가 칼 휘두른 이를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어차피 죽을 여인한테!”
무윤은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정말 표정뿐 아니라 하는 짓도 옛 친구 여단을 빼닮은 놈이다. 과거의 후회 탓에 고운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하! 이거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놈이네.”
“뭐요?”
“제압하려면 아혈까지 확실히 해야지. 살수가 왜 정면으로 부딪쳤는지 모르겠어?”
“……?”
“방금 전에 입을 오므렸어. 난 저년 입에 독침이 있을 거 같은데. ……아가리를 열어 볼까?”
“……!”
하후진의 입과 발은 모두 얼어붙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소리를 죽인 넋두리만 허공을 향했다.
‘두 번이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인이란 자체가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창피했다. 그것에 집중해 다른 번민을 떨쳐 왔던 자신인데.
그 온 힘 다했던 노력이 한순간 부정당해 버렸다.
그 허망함이 머릿속을 허옇게 만들어 버렸다.
아득한 어둠만이 눈앞을 가렸다.
잠시 후, 무윤은 조용히 다른 이들을 내보냈다. 둘만 남은 상황.
고개 숙인 이를 향한 시선에 아련함 가득한 눈빛이 흘렀다.
‘너무 닮았어. 생긴 것도 행동도.’
지금 눈앞의 인물과 겹쳐진 과거의 친구, 여단.
천 년 전 이곳 침주 흑도를 평정하고 오 년 후, 여휘가 급속하게 두각을 나타내자 무공을 노린 이들이 급습해 왔다. 가문도 스승도 없는 자가 이럴 경우는 절대비급을 얻은 경우가 간혹 있으니.
그때 곤경에 빠진 여휘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던져 버렸던 친구. 그럴 실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무작정 나섰던 벗이다.
자신이 여휘에게 그랬듯이.
천근의 무게로 가슴 짓눌리고 아파했던 그 쓰라린 상처. 다른 생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한인 이유.
그건 이 말에 다짐을 받지 못해서다.
-여단아. 혹시 위험하면 너 먼저 동굴로 튀는 거 알지?
-어? 어 그래. 알았어.
-너 잡히면 우리도 도망 못 가.
-야, 인마! 내가 바보냐. 걱정 마.
-약속하는 거다.
-……그래 약속!
거기에 이 말을 더했어야 했다.
-너부터 살아야 우리도 살아. 무슨 말인지 알지?
이 말을 여단의 뇌리에 각인시켰다면 분명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위험해졌겠지만.
그걸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세찬 광풍처럼 휘몰아친 영혼의 울림이 가슴을 후벼 파길 한참, 무윤의 입가에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
‘아직도 그대로네.’
아주 짧은 그 말을 새겨 주지 못한 통렬한 후회가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한데 아직까지도 뽑히지 않고 그대로다.
그때 눈빛을 추스른 하후진의 고개가 정중히 숙여졌다.
“고맙소. 그대가 흑도라 하나 무인이 목숨 빚을 졌거늘 어찌 가볍게 생각하겠소. 이 은혜 반드시 갚으리다.”
무윤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고민하다 마음먹은 게 있다.
“생색내자고 한 것도 아니니까 신경 꺼. 대신 이러면 어때?”
“어떤?”
“나랑 십 초만 해 보지. 여기서.”
“……비무는 왜?”
“끝나고 알려 줄게. 대신 최선은 다해. 터지고 싶지 않으면.”
“……?”
잠시 후.
“시작할까?”
“좋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윤의 신형이 공간을 접었다. 벼락처럼 휘돌아 나온 주먹이 바람을 불렀다.
슈욱!
순간 바람을 안은 무복 자락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하후진의 시야를 스쳤다. 절로 눈이 부릅떠졌다.
‘빠르다!’
하지만 더 놀랄 시간도 없었다. 폭풍 같은 일격이 이미 옆구리를 쓸어 버렸다. 고통에 찬 비명 전에 몸이 먼저 휘청거렸다.
“우욱!”
슈우욱! 퍽!
“크윽!”
늑골이 부서진 듯 격통이 밀려왔다. 짜르르한 뇌전이 머리를 감쌌다. 동시에 몸과 소리로 전해진 충격.
우둑! 퍼억!
입에서 왈칵 쏟아진 피, 화끈거리는 코밑에서 나는 비릿한 혈향, 팔꿈치로 찍어 내린 등에 허리도 꺾였다.
“크윽!”
놀람과 고통을 인식하기도 전에 본능이 두 발을 뒷걸음치게 했다.
타닥!
바람 탄 주먹이 굽힌 몸 주변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퍼억! 팍! 파팍!
“크윽!”
그렇게 열 번의 손짓이 허공을 가른 후.
대자로 바닥에 누운 하후진의 격한 호흡이 텅 빈 다점 안을 가득 채웠다.
“하! 하악! 하아!”
황당함에 앞서 허탈함이 밀려온다.
‘보지도 못했어.’
무윤이 누군지 안다. 얼마 전 세가에서 비무 때 담 너머에서 실력까지 봤고. 한데 절정인 자신이 뭘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이 꼴이 돼 버렸다.
무윤의 담담한 말문이 열렸다.
“난 살기 위해 이렇게 감췄다. 근데 너는? 이 정도 살수면 절정 이상을 노리는 자들이야. 보낸 놈들이 네 실력을 제대로 안다는 소리지.”
“……!”
무윤은 마지막 하고픈 말을 입에 담았다.
“너부터 살아야 뭘 하더라도 하겠지.”
“……!”
하후진은 망치로 심장을 얻어맞은 듯 뇌리를 울린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오직 떠오르는 건 하나다.
‘나부터 살아라!’
창피함에 앞서 지난날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아들 걱정에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하며 눈물짓던 분.
별다른 내색은 안 하지만 짜증과 질시가 가득 담긴 시선을 거두지 않는 소가주 큰형. 그리고 같은 자식으로 언급되는 그 어떤 순간도 용납할 수 없어 분노하는 둘째 형이란 놈. 이 일도 그놈 짓이리라.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안하무인으로 무시하던 세가 사람들.
그 틈바구니 속에서 그나마 무공만은 꼭 익히라고, 그게 자신이 살길이라며 아련한 눈길을 보내던 아버지란 자까지.
그 힘들고 두려웠던 일들이 저 나직한 한마디에 그대로 풀어헤쳐졌다.
얼마 후, 파르르 떨리는 눈은 오직 한 가지 결심만을 마음에 남겼다. 마음으로 파고든 격랑은 그 결심을 머리로 올려 진심 어린 영혼을 부추겼다.
‘산다. 어떻게든 살아 낸다.’
스스로의 오판이 불러온 이 상황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온몸을 두드린 저자의 주먹을 잊지 않으리라.
하후진은 가슴 저 밑에 있던 분노와 한이 만든 결심을 심중에 올곧이 묻었다.
잠시 후,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던 하후진의 말문이 열렸다. 우선 물어야 할 게 있다.
“내게 왜 보여 줬지? 그렇게 힘들게 감춘 걸.”
“어디 떠들 놈 같진 않던데. 잘못 봤나?”
뭔지 모를 뭉클함이 하후진의 눈가를 아렸다.
‘처음 본 날 믿어 준다.’
가족도 아니고 친분도 없던 이가 선뜻 내민 낯선 감정. 그 가볍지 않은 설렘이 입가에 멋쩍은 미소를 불렀다.
“……떠들 데도 없다.”
“됐네.”
하후진은 그 흔쾌한 답에 망설이던 걸 입에 담아냈다.
“찾아가도 되겠나?”
“안 들킬 자신 있으면 오든가. 우리 애들도 너희 쪽도.”
“……그러지.”
무윤은 한 가지 확인할 게 남았다. 하후진만을 노렸다면 굳이 밤도 아닌 이 시간에, 그 넓은 저잣거리에서 이럴 이유가 없다.
“혹시 하후가가 침도방과 엮인 게 있나?”
아픈 델 찌르는 말이다.
“……잘 모른다.”
무윤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미안! 신경 쓰지 마. 먼저 간다.”
“…….”
하후진은 무윤이 떠난 후에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몽롱하게 홀린 듯했던 눈빛이 가라앉을 무렵, 문득 깨달은 사실에 실소가 올라왔다.
‘봐줬단 말이지!’
몸의 통증이 알려 준 사실. 내상이나 후유증이 남을 타격은 하나도 없다. 무작정 휘두른 줄 알았던 손속에 배려가 담겼다.
아무리 본능적인 방어였다지만 절정인 자신인데.
하후진의 눈가에 더할 수 없는 열기가 서렸다.
‘이제부터 알아보지.’
잠시 후, 다점을 나오는 하후진을 유심히 쳐다보는 눈길이 있었다.
방금 전에 도착한 연사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하에게 들은 것과 뭔가 다르다.
‘멀쩡하다고 했었는데?’
비틀거리며 나오는 하후진을 유심히 보던 연사구의 눈이 번득였다. 자신이 막 도착하자마자 나오던 놈.
‘청호방주!’
분명 안에는 그놈과 하후진밖에 없었다. 날 선 감각이 그만의 상상을 부채질했다.
‘붙었어!’
한편 연사구를 스쳐 지나가던 무윤의 초감각 또한 뒷골의 소름을 알렸다.
하오문의 건달로 소문난 놈.
무윤의 야릇한 미소가 색을 더했다.
‘건달은 아니네.’
* * *
얼마 후, 침도방 장원.
청호방과 함께 흑도 이대 세력인 곳.
침도방주 갈마풍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자. 물론 반가운 친구는 아니다.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눈앞에 있는 놈이 방주에 오른 넉 달 동안 별다른 동향은 없다. 대부분 수련한답시고 처박혀 있었고, 자신들은 물론 다른 영역도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심하라고 수하들에게 단단히 경고한 것까지 소문이 다 났고.
그래도 꺼림칙한 눈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뭔가 있어.’
십오 년, 눈치 하나로 버텨 온 흑도방주 세월이다.
오 년 전부터야 우연히 다시 만난 형님 덕에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기도 했지만, 그 또한 조심스러워 도움을 받은 건 손가락에 꼽는다.
그저 몸조심, 그것으로 버텨 온 세월인데.
눈앞의 저자는 촉을 건드리는 놈이다.
그래서 부방주로 이름만 올려놓은 형님을 몰래 옆방에 불러 놓았다. 거기에서도 이자의 진면목을 대략 알아볼 분이니까.
‘형님이 보시면 알겠지.’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