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17화 (17/161)

17화

무윤은 악무길에게 다가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대련은 이 정도면 됐다. 당분간 혼자 수련해. 느끼는 게 있을 거야.”

악무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궁금한 걸 물었다.

“알았다. 그건 그렇고 하나 묻자.”

“뭐?”

“언제 절정을 넘었지?”

무윤은 사실대로 답했다.

“아니, 넘지 않았다.”

악무길은 지레짐작하며 피식 웃었다.

“조장들도 다 그렇게 아는데 뭘 감추고 그래? 그냥 벽을 넘을 때가 궁금해서 물은 건데.”

“안 넘었다니까.”

“……정말?”

“그래.”

악무길의 눈은 호기심을 담아 반짝거렸다. 무윤의 표정이 말해 주는 게 있다.

‘거짓말은 아닌데.’

사실 비무보다 더 놀라운 건 자신의 환우검 심법과 초식을 개량해 줄 때였다. 근 십오 년 한 우물만 팠던 자신을 멍하게 만들었으니.

게다가 막힘없는 답변은 물론이고 바로 앞의 의문을 스스로 풀어 가게끔 유도하는 가르침은 간혹 전율을 일으킨다.

그런 실력이면 절정도 이미 예전에 넘었고, 그 사실을 감췄으리라 여겼는데 단호히 아니라니.

이젠 정말 호기심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방주 말대로 나도 이젠 일류 끝자락쯤 된다고 보는데 오늘처럼 옷자락도 못 건드려. 근데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닌 걸 그렇다고 할 수도 없잖아. 내가 좀 특이한 걸 익혀서 그래. 그렇게만 알아 둬.”

“그것참!”

무윤은 화제를 돌리고는 성큼 앞서갔다.

“가자고. 순찰 돌 시간이잖아.”

“…….”

절정은 분명 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넘지 않고 있다.

하단전 기준으로 절정을 먼저 넘어 버리면 신기심의공 진전이 더뎌진다. 하단전 심법은 혈의 흐름으로 몸을 살피고 내력을 운용하는 데 중점을 두는 심공.

‘중단전은 몸 전체의 흐름으로 관조하는 무공. 체기발경(體氣發勁) 전에 혈에 집중해서 좋을 게 없다.’

중단전의 절정, 체기발경(體氣發勁)은 혈뿐만 아니라 근육, 신경, 장기 모든 신체 기관이 똑같이 일정한 흐름을 이뤄야 넘을 수 있는 벽이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댈 수밖에.

잠시 후, 날이 어둑해질 무렵 침주 시전 거리.

거리를 오가는 이가 셀 수 없으니 호객 행위는 기본이다.

“오늘 멋들어진 상수(湘繡, 호남 전통 비단 자수)가 들어왔습죠! 와서 보고 가세요!”

“방금 만든 상차(湘茶, 호남 특산 차)가 단돈 열문! 우리보다 싼 데 있음 나와 보라고 해!”

“먹이 제대로 먹히는 닥나무 종이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게 아니라니까요! 믿어 보라니까 정말!”

“귀신 막아 주는 은팔찌가 은자 단 한 냥! 어! 거기 어여쁜 소저는 깎아 주리다. 보고 가기만 해도 효험이 있으니까 보기나 하고 가쇼! 에이! 그냥 가면 어째!”

사방을 살피던 무윤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흘렀다.

‘세월 참!’

천 년 전 모습과 비교되니 자연스레 상념이 오른다.

이전 무윤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며칠은 넋 놓고 봐야 할 광경.

건물과 복장은 확연히 달라졌고 품목과 물량은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침주의 주 거래 품목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가장 큰 걸 하나 꼽으라면 역시 은(銀)이다.

호남 전체로 보면 쌀과 잡곡, 차가 기본이고 특산물로 상수, 상차, 질 좋은 종이가 꼽히지만, 중원 전체 은 생산의 일 할을 차지하는 여기 침주에선 단연코 은 관련 사업이 으뜸이다.

역시 천 년 전에도 은 사업이 가장 컸다. 하지만 지금은 채굴과 정제 기술이 발달해, 온통 수작업뿐이던 그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때 생산량의 수백 배 이상 늘어났으니.

천 년 전에도 은은 물물교환 수단으로 긴히 쓰이긴 했지만 중원 전체로 보면 양이 부족했다. 한데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상공업이 이렇게 발달할 줄이야.’

이모작 등으로 인한 강남의 폭발적인 쌀 생산량 증가는 중원 전체에 전례 없는 상공업 발달을 가져왔다. 화폐 통화량이 늘어난 것도 당연지사.

그런데 은은 가지고 다니기엔 위험하다. 통상 은자 한 냥에 쌀 다섯 섬은 족히 되니까. 결국 대부분 저잣거리 거래는 철전과 동전이고, 대량 거래 시에나 전표와 함께 은이 사용된다. 한데 은은 부족한 양 때문에 가지고 있기만 하면 교환 가치가 계속 올라가는 편.

그러니 지주나 고관대작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은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물론 이보다 더한 금(金)이 있지만 워낙 귀해 보기도 어려우니 언감생심(焉敢生心)이고.

그러니 이곳 침주의 성세는 날로 커져 갈 수밖에.

무윤의 입가에 씁쓸함이 올라왔다.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몇 년 동안 정말 산을 이 잡듯이 돌아다녔는데.’

예나 지금이나 도적질을 제외하고 고아들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가진 것, 배운 것도 없는 아이들은 빌어먹다 지치면 자연스레 산으로 향했다. 산나물을 캐 먹다 운이 좋아 은맥이라도 찾는 날이면 그날로 인생이 바뀐다.

무윤과 친구들도 누구보다 열심히 산을 뒤졌다. 특히나 타지에서 흘러든 아이들에겐 터줏대감처럼 군림하는 같은 또래들이 어른보다 더 무서울 때였으니까.

물론 대박의 꿈은 그저 꿈이었다. 간혹 은맥을 발견하긴 했지만 불순물이 너무 많은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순간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가만, 지금의 정제 기술이면!’

아쉬움에 돌아서면서도 혹시 몰라 표시해 놓았던 지도는 십여 년 동안 보물처럼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쉬웠는지 지금도 그 위치는 머릿속에 그대로 남았다.

그러다 문득 한 곳을 바라보자 실소가 올라왔다.

‘이미 다 찾았겠지.’

저잣거리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거지 아이들. 그때보다 수십 배 늘어난 저들의 생각이 그때 무륜과 다를 리 없다. 광산 전문가도 늘어났을 테고, 무엇보다 거기에 더해진 천 년 세월까지.

하지만 혹시 또 모른다.

‘재미 삼아 찾아볼까?’

여휘가 남겨 둔 것으로 돈 걱정은 없다. 순전히 과거의 추억 되짚기다.

무윤의 시선이 악무길을 향했다.

“혹시 은광(銀鑛) 개발자 중에 아는 사람 있어?”

“있긴 한데 왜?”

“언제 한번 보자고.”

아주 잘 아는 곳이 있는 악무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혹시 은맥?”

“정확한 건 아니고 살펴볼 데가 있어서.”

환한 미소가 악무길의 입가에 흘렀다. 이 핑계면 그곳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다.

“그럼 당장 데리고 오지.”

무윤은 지레짐작에 피식 웃고 말았다.

“부방주도 은맥 찾고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하여간 아는 덴 있지.”

“잘하는 곳이야?”

“그럼! 예전엔 꽤 유명했지. 큰 가문 일도 도맡아 하곤 했다던데. 뭐 그러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왜?”

“은광 사업이 커지니까 요즘 큰 가문에선 직접 개발하잖아. 근데 이런 전문가들이야 자본이 없으니 경쟁이 안 되지. 하여간 일은 끝내줘. 그건 내가 장담해.”

“잘 아는 덴가 보네?”

악무길은 저잣거리를 향해 눈을 껌벅였다.

“그냥 어쩌다……. 크흠! 어서 순찰이나 돌지.”

“……?”

잠시 후 청호방 영역을 거의 다 훑을 즈음, 염 씨 형제가 뛰어왔다.

타다닥!

염중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시팔! 놓쳤네. 어디 갔지?”

“왜 그래?”

“못 보던 배수(扒手, 소매치기)년이 있어. 근데 쫓던 중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

그때 주변을 살피던 동생 염리웅의 눈이 반짝였다. 팔을 걷어붙이고는 쌍심지를 돋우었다.

“어! 저기 있다. 이년 내가 잡으면 가만두나 봐라.”

염리웅이 급히 뛰어나가려던 찰나, 무윤의 손이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놔둬. 침도방 영역이잖아.”

청호방과 함께 침주 흑도의 양대 세력인 곳. 지금은 분란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뭐 어때! 딴 데서 온 년 같은데.”

“그래도 그만해. 괜히 일 만들지 말자고.”

염리웅은 허탈한 표정에 떨떠름한 목소리를 더했다.

“끙! 하도 날쌘 년이라 잡고 싶었는데.”

“또 오면 그러자고.”

염중탁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려던 찰나, 두 눈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가만! 뭔가 좀 이상한데.”

“왜?”

“아까도 저년 앞에 하후진, 저자가 있었거든. 두 번째 손쓸 때도 그랬고. 근데 이번에도 그러네.”

하후진, 무윤도 들어 본 자다.

‘하후가 서자(庶子). 구박덩어리라고 했던가.’

큰 가문 어디나 다 비슷하지만, 기녀나 하녀 태생 서자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하물며 본처의 심기를 거슬린 출생은 더욱이.

그런 입장이라 세가 사람들도 있는지도 모르게 살아간다던 자.

어쨌든 엮일 인연은 아니다. 그런데 무심히 고개를 돌리려던 무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닮았어.’

여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벗, 여단.

가느다란 턱선에 우수에 젖은 눈빛, 고집 있어 보이는 입매도 물론 그렇지만 무윤의 시선을 유독 사로잡는 것. 그건 어두운 색이 서린 희미한 미소다. 여단이 세상 사람들을 아련히 바라보며 짓던 그 속 아림 가득한 미소.

그게 하후진에게서 느껴진다.

‘외톨박이라더니.’

여단 또한 영주(永州) 염가 하녀 태생의 서자였다. 그럼에도 가주가 죽자 하인이던 무륜, 여휘와 함께 순장(殉葬)될 뻔했던 기구한 팔자였다. 그 탓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다 보니 항상 저런 미소가 흘렀다.

비슷한 얼굴에 의미도 비슷한 미소가 잠시 아련한 추억을 불렀다.

그런데 멍하니 하후진을 바라보던 어느 순간, 무윤의 눈빛에 날이 섰다.

뒤를 쫓는 여인의 치마에 가려진 발놀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삼 개월의 배움이 더해진 두 형제를 뿌리쳤다는 건 무공을 익혔다는 뜻. 한데 그 걸음엔 어떤 기민함도 무인 걸음걸이의 특색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염집 아낙네의 무르고 여린 투박함뿐.

웬만한 무인의 걸음은 절대 저럴 수 없다. 특히 여인의 경우 감춘다고 하더라도 티가 나기 마련인데 저런다는 건.

‘고수이거나, 살수!’

뭐가 됐든 목표가 하후진인 건 확실해 보인다.

무윤의 미간이 바로 좁혀졌다. 일정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무조건 조용히 살기로 했다. 그렇게 넉 달을 보냈는데 처음 들어선 갈등이다.

하등 상관도 없고 오히려 엮여 봤자 골치만 아픈 자. 하지만 이성은 말리고 가슴은 부추긴다.

그만큼 여단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크기에.

결심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켜본다.’

잠시 후, 침도파 영역인 좌측 시전의 한 다점(茶店).

한 여인이 서툰 뜀박질로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타다닥!

주변을 살피다 한 남자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흑흑! 나으리!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아낙네의 촌스러운 단장 위로 눈물 몇 방울이 흘러내렸다.

“무뢰배들이 쫓아와서 도망 왔어요, 제발 저 좀!”

하후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안 봐도 빤한 상황이다.

“여기 계시면 됩니다. 걱정 마세요.”

그때 침도파 무리 몇이 다점으로 뛰어들었다.

“여기 있었구나. 하! 고년 날쌔기도 하네.”

하후진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오?”

살짝 긴장했던 침도파 조장 마초웅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바로 비릿한 미소가 입가에 감돌았다. 다치게 하면 안 되지만 막 대하는 정도야 괜찮은 상대니까.

“아! 누군가 했더니 하후가 공자 아니신가! 왜, 껴드시려고?”

“무슨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오해는 무슨! 하긴 샌님 공자가 보기엔 저년이 훌쩍이니까 우리가 뭔 짓이라도 한 거 같겠지. 크크!”

“그거야 들어 보면 알 일.”

“그럼 저년에게 물어보쇼. 배수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배수?”

“정말 못 알아 처먹네. 소매치기 몰라! 저년 품속에 전낭이 있는지 보면 알 거 아냐!”

흠칫하던 하후진의 시선이 여인을 향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오?”

“저, 그게…… 사실은…….”

고개 숙인 여인의 말문이 더 이어지지 않자, 하후진의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핍박받는 애처로운 모습이 죽은 어머니와 겹쳐 나선 걸음인데, 또 멍청한 짓을 해 버렸다. 세가를 나갈 때까지는 어떻게든 숨죽여 살라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던 그녀의 얼굴이 망막을 스쳐 갔다.

멍한 시선이 다점의 천정을 향했다.

‘또 실수하다니!’

그 순간 조장 마초웅의 뒤에서 아주 부드러운 바람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든 누군가의 펄렁인 소매에서 금속 빛이 반짝였다.

사라락!

천마라 불린 내 친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