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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6화 (16/161)

16화

삼 년 전 당시 무윤은 갓 일류에 들었다.

‘그 경지면 마공을 익힌 건 금방 들통나지.’

일류 정도는 초절정급 고수가 세밀히 살피면 마공을 익혔는지 거의 알아낼 수 있다. 당시 호남 중부 최대 문파인 형산파도 있었으니 확실히 드러날 일이었다.

물론 마공을 소지한 것만도 중죄라 처벌이 따른다.

하지만 사람도 죽지 않았고 실제 마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 길어 봤자 일이 년 가두는 정도다.

한데 아버지 천중서는 그날 바로 다른 시체를 태워 자신이라 속이고 도망치게 했다.

아버지 천중서가 그런 이유는 단 하나.

여리고 소심한 큰아들이 잘난 동생에게 치여, 자괴감에 몇 년간 기방과 술독에 빠져 살았다.

사실을 다그치자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앵속에 취해 횡설수설해 대는 아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선 살리고 보자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당연했으리라.

어쨌든 지금은 급할 게 없다.

‘잘하고 있으니까.’

무윤이 사라진 이후 가세는 전혀 기울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동생 무진과 아버지의 노력으로 조금 더 커졌다.

무윤은 분란만 일으키는 존재였으니.

일을 벌인 두 놈 또한, 지금 실력으로도 제압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인간들.

한데 문득 울컥하는 가슴과 치밀어 오르는 격정이 느껴졌다. 무윤은 바로 씁쓸한 미소가 올라왔다.

‘아직 동화가 덜 됐어.’

중단전 무공, 신기심의공을 제대로 익히려면 심장과 몸의 의념이 일치해야 하고 일관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당장은 문제없지만 상위 경지로 올라갈수록 차이와 한계가 드러난다.

그런데 한 달 수련 동안 거의 일치됐다 여겼는데, 가족을 떠올릴 때만큼은 아직 따로 놀고 있음을 알았다.

그만큼 억눌린 한과 후회가 가슴 한가득 들어 있어서다.

내성적이고 온순하던 무윤이 삐뚤어지기 시작한 건, 동생 천무진의 감췄던 무공 실력을 알고 나서다.

못난 형이 더 자괴감에 빠질까 봐 그런 걸 열일곱에서야 알았다.

그 후 부모를 비롯한 장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불쌍하듯, 깔보는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애정 어린 책망은 적의로 다가오고, 어머니의 살가운 다독거림은 못남을 힐책하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마음에 품었던 여인 함은진이 동생 무진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된 그날 이후, 스스로 가장 가까운 이들을 적으로 몰기 시작했다.

‘후! 바보 같은 놈.’

무윤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명확한 사실 하나.

‘어쨌든 마지막엔 가서 해결해야 한다. 그 방법밖에는 없어.’

그때 무윤의 눈치를 살피던 적묘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지레짐작해서다.

“그 정도는 어렵지? 하긴 그럴 줄 알았어. 너무 큰 걸 얘기해서 미안해.”

잠시 생각을 정리한 무윤은 가볍게 고개 저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가는 시점이 문제다.

“당장은 어렵다. 하지만 몇 년 내엔 가능할 거야.”

“정말? 그만한 돈을 빌려줄 수 있어?”

“시간만 있으면 가능할 거야. 약속하지.”

적묘예의 화사한 웃음이 답을 했다.

“호호! 그래!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지.”

옆에 있던 염중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리 준비할 게 뭐가 있어?”

“기루란 게 돈만 있다고 되는 줄 알아? 기녀는 물론이고 가무에 뛰어난 예인, 괜찮은 숙수도 있어야지.”

“그걸 여기서 어떻게 준비해?”

“유선 언니 있잖아. 미리 꼬셔 놔야지.”

“아! 그 뭐냐, 금에다 소리에 춤도 기막히게 잘 추는 기녀!”

“그래. 요즘 친해졌거든. 잘 사귀어 놔야지.”

무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기 춤 잘 추는 기녀가 있어? 유선?”

“아! 넌 기루에 잘 안 가서 모르겠구나. 여기 침주에선 가장 유명해. 하여간 그 언니는 내가 어떻게든 데리고 갈 거야.”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춤이라! 언제 가서 봐야겠네.’

그런 수준이라면 가서 보는 것도 판단에 도움이 될 터. 친구가 남긴 부탁인데 하는 척이라도 해 볼 요량이다.

무윤의 시선은 다음 염중탁을 향했다.

“너는?”

“나하고 동생은 묘예 따라가야지. 안 그러면 맞아 죽잖아.”

“다른 건 없고?”

“뭐, 괜찮은 무공 있으면 좋고, 없음 말고.”

옆에 있던 동생 염리웅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

이제 마지막 악무길 차례다.

“부방주는?”

“내 꿈은 객잔 숙수였지. 묘예가 기루 만들면 거기 숙수나 하지 뭐. 참! 난 무공은 됐다. 자질이야 빤한데.”

순간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자질은 괜찮아. 문제는 부상인데 왜 감출까?’

한 달의 수련 동안 신기심의공은 사 단계에 이르렀다.

삼 단계 중단전 축기의 시작을 넘어, 쌓인 기운을 온몸에 흘려보내 순환시키는 단계. 여기까진 감각이 최우선이고 이전 생에 갔던 길이라 빠르게 올 수 있었다.

한데 사 단계에 이르면 다른 효능이 생긴다. 초감각으로 몸 전체 흐름을 관조하다 보면 가까이 있는 이의 몸은 살필 수 있다. 이게 가능했기에 여휘의 몸을 살피고 최적화된 심법과 무공을 만들 수 있었다.

의술 중 시진(視診)과 청진(聽診), 촉진(觸診)이 경지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가장 정확한 건 장심을 몸에 갖다 대고 하는 촉진이지만, 바로 앞에 있는 자의 혈도가 비정상적이란 건 바로 알 수 있다.

‘조금만 살펴보면 방법이 있는데.’

하지만 생각을 접었다.

본인이 꺼내지 않는데 묻거나 들춰낼 이유가 없다.

무윤은 넷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지금은 넷 다 무인으로서 큰 포부도 없다. 그런 이들에게 굳이 강한 무공을 전할 필요 있을까. 물론 가르치는 도중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나서고 싶진 않다. 경지가 올라가면 자신과 친구들이 그랬듯 어쩔 수 없이 잃는 것도 따라오는 법.

‘지금은 적당히. 그게 최선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올리는 정도가 무난하리라.

세상엔 무공만이 다가 아니니까. 아무리 무인이라도.

석 달 후, 청호방 연무장.

오직 조장들에게만 허락된 자리.

대련을 지켜보던 조장들의 손엔 땀이 한가득 배었다. 부릅뜬 시선은 연이은 충돌로 빛을 흩뿌리는 검을 좇기에 급급했다.

카앙! 캉! 캉!

넋 나간 듯한 시선에서 경악성이 연신 터져 나왔다.

“헉! 저런!”

“위험해!”

“오! 저렇게 피하다니!”

경탄성 어린 푸념도 여기저기 흘렀다.

“이거 원! 살 떨려서 어디 보겠나.”

“왜 그래? 한두 번도 아닌데.”

“알지. 벌써 석 달째 저러는데. 근데 난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려 미치겠어.”

“크크! 하긴! 저게 어디 대련이야. 완전 너 죽고 나 살자는 생사투지.”

악무길은 상대를 노려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몇 달 동안 해 왔듯 상대가 방주란 생각은 지워 버렸다. 오늘은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옷자락은 자른다.’

아무리 무인으로 욕심이 없다 해도 이건 아니다. 투기라기보단 오기다.

삼 개월 동안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바뀌었다. 이게 다 다친 혈맥을 피해 심법을 고쳐 준 방주 덕이다. 거기다 몸에 맞게 교정해 준 초식까지. 처음엔 의아했지만 지금은 어떤 의심도 없다. 머리가 알고 몸이 느끼니까.

하지만 이젠 짜증으로까지 번진 것.

‘어떻게 된 게 매번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는데도 옷자락 한 번 못 자르다니.’

오늘은 꼭 어디 스치기라도 할 작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는데,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도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초식만 남았다.

‘이번엔 꼭!’

악무길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타핫!”

무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달라졌어.’

네 의남매 중 발군의 자질을 가진 악무길이다. 이유는 몰라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런데 신기심의공 수련 겸 일부러 위험한 상황까지 간 다음 신형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 순간 악무길이 달라졌다.

처음엔 오기였던 게 지금은 무인의 투기로 바뀌었다.

그러다 그 이면에 감췄던 무인의 의지 또한 얼핏 엿보인다.

아직 본인이 모를 뿐이지.

그 탓에 비무에 항상 치열함을 담았다.

‘필요하면 말하겠지.’

그때까지는 이렇게 상대해 주면 된다.

지켜보던 조장들끼리 수군거렸다.

“근데 대단하지 않아?”

“뭐가?”

“방주 말이야. 악 부방주 검이 몸에 닿았다 싶은 순간에 용케도 피한단 말이지.”

처음엔 몰랐어도 이젠 조장 모두가 아는 사실이 있다.

“그거 일부러 그런다잖아. 실전 연습한다고.”

“그걸 누가 몰라? 근데 악 부방주도 엄청 늘었는데 매번 헛손질만 하니까 그러는 거지.”

“하긴. 예전엔 나도 부방주하고 할 만했는데 요즘은 열 수를 못 넘긴다니까. 나 참!”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우리도 방주하고 대련하잖아. 근데 왜 저 넷만 저렇게 느냐고? 방주가 뭔가 따로 가르치는 거 아니야?”

“이 멍청아! 그럼 있겠지, 없겠냐? 방주하고는 의형제나 마찬가진데. 하여간 한심한 소리 하고는.”

“그렇겠지? 가만 이참에 나도 의형제 넣어 달라고 해 볼까?”

“아서라. 먼저 얘기했다가 까인 놈 여기 수두룩하다.”

“뭐? 그럼 너도?”

“나라고 별수 있냐. 대차게 까였지.”

“더는 안 해 주겠대?”

“너니까 하는 얘긴데 솔직히 내가 무릎 꿇고 사정까지 해 봤어. 근데 이 말만 하더라.”

“뭐?”

“난 이 정도 수련이 적당하대. 그러니 더 할 말이 있어야지.”

“그럼 나도 마찬가지겠네.”

“그래. 괜히 속 쓰린 짓 하지 마라.”

“뭐 그래도 요즘 방주 덕분에 살 만하잖아. 처음엔 자기 없을 때 위험하면 무조건 튀라고 해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나머진 알아서 다 해 주니 말이야.”

“그럼! 요즘은 덤비는 놈들도 없어. 웬만하면 방주가 직접 나서는 줄 아니까 이젠 침도방 새끼들도 꼬랑지를 내리더라니까. 크크!”

앞으로 내달리던 악무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변화! 그것밖에 없다.’

결정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타다닥! 휘익!

무윤의 바로 앞까지 쇄도해 단숨에 기세를 끌어올렸다. 평생을 수련한 검이 주인의 의지를 담아 현란하게 떨어져 내렸다.

슈우욱!

환우검은 변화 속에 쾌의 극을 쫓는 검법.

섬전처럼 어깨 요혈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설사 이번엔 무윤이 다치더라도 물러날 수 없다.

어금니를 악물고 온 힘을 다 짜냈다.

부우웅! 쉬익!

순간 악무길은 예의 불안함이 뇌리를 흔들었다.

방주의 호수처럼 잔잔한 눈망울은 역시 한 점 미동도 없다.

안도감과 오기가 동시에 올라왔다.

‘어디!’

악무길의 검이 어깨와 가슴을 베어 오는 순간, 그제야 무윤의 팔이 움직였다.

휘릭!

느릿하게 움직이던 주먹이 어느새 검로를 막아 올라갔다.

슈욱!

‘부딪치려고?’

악무길은 공력을 한층 더 끌어올려 아래로 힘껏 내리그었다. 그래야 충격에서 검로를 유지한다.

쇄애액!

그때 환영처럼 무윤의 흐름에 잔상이 일렁였다.

사라락!

악무길의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무사의 감이 말해 줬다.

‘또!’

역시 날카로운 파공성에 이어 부딪히는 소리가 없다.

검이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살짝 동작의 흐름이 끊겼다.

‘위험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감각적으로 검을 거두려는 찰나, 무윤의 주먹이 햇빛에 반사되듯 번쩍거렸다.

악무길은 직감했다.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

‘역시!’

오른쪽 어깨에 묵직한 주먹의 촉감이 느껴지는 순간.

쿠욱!

허탈한 실소가 입가에 흘렀다.

‘멀었군.’

멍하니 검을 내려뜨렸다. 하지만 입꼬리는 절로 말려 올라갔다.

이마에는 지렁이 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언젠가는!’

오기가 아닌 무인의 투기가 조금씩 제 색을 발했다.

넷 중 하나는 서서히 무인의 길로 향했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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