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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5화 (15/161)

15화

침주 하오문 지부장실.

지부장 연대보의 날 선 눈길이 조카를 향했다.

“이 새끼! 또 어디 처박혔다가 이제야 나타나!”

“숙부! 보자마자 무슨 그딴 소리를 합니까? 오랜만에 일하다 왔다니까요!”

“뭐? 일! 아우 이걸 그냥! 조카만 아니면 똥물에 빨아서 진즉 오줌에 튀겨 버리는 건데.”

“아! 진짜라니까요. 왜 조카 말을 못 믿고 그래요.”

“야 이 새끼야. 네가 언제 믿게 한 적 있어? 있으면 씨불여 봐!”

“뭐 그렇다고 옛날 일을 꺼내고 그래요.”

“어제도 옛날이냐?”

“오늘은 진짭니다. 들어 보실래요?”

“아니면?”

연사구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직이 깔린 목소리도.

“밀린 서류 정리 제가 다하죠. 됐습니까?”

지부장 연대보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남들 들을 겸 짜고 치던 둘 간의 대화를 바꿔야 할지 모른다.

‘뭔 일이 있나?’

조카를 바라보는 연대보의 눈이 깊어졌다.

호남 하오문 사상 처음으로 스물다섯에 절정에 오른 조카.

하지만 하오문은 정보 단체다. 거래와 정보 수집을 위해 무공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 강한 무인이 나오면 모든 무가에서 견제가 들어간다. 정보를 가진 곳이 강해지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아니까.

한데 조카가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화근은 조카 연사구가 같은 장사(長沙)에 있는 서문세가의 직계를 두들겨 팬 게 발단이었다. 중원 오대세가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서문가는 명실공히 호남 최고의 무가.

그런 곳과 일이 커지자 연사구의 아버지, 호남 총괄지부장 연대광은 서문가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신 아들 연사구는 호남 최남단인 여기 침주로 보내, 다시는 장사로 오지 않기로 하고 마무리했다.

그때 형님 연대광이 자신에게 남긴 말.

-초절정에 오르면 서문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그때까지 부탁하마.

혹시나 서문가의 눈이 여기도 있을까 싶어, 대충 사는 모습으로 보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아한 행동이 나왔다.

연대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뭐야?”

“청호방 무윤이란 놈, 살펴볼 만하겠어요.”

연대보의 입가에 바로 실소가 흘렀다. 지난 며칠 침주에서 가장 화젯거리였는데 자신이 모를 수 없다.

“인마! 그걸 내가 모르겠어? 난 또 뭐라고.”

“보타문주와 독대한 것도 아세요?”

연대보의 눈이 커다래졌다.

“응? 문주가 왜 그딴 놈과 따로 만나?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하후가에서 있었더라고요.”

하후가는 그날 일을 전부 함구하라고 엄명을 내린 터라 하오문도 아직 파악이 안 됐다.

“정말이냐?”

“다른 이도 아닌 보타문주예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흠!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내 일러두마.”

“아뇨. 두세요. 제가 알아볼게요.”

“응? 갑자기 왜?”

“그냥 촉이 와요. 뭔가 재밌는 일이 있을 거 같은.”

그동안 연사구가 몰래 어려운 일을 해결할 때마다 저 촉이 대단한 역할을 했다. 연대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대신, 알지?”

“누가 저 같은 건달을 신경 쓰겠어요. 하여간 조심할게요.”

하나둘씩 무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가 늘어났다.

다음 날 오전, 청호방 방주실.

무윤이 왔다는 연락에 넷이 화급히 달려왔다.

염중탁은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야! 방주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며칠 비울 거면 말을 했어야지!”

“길어질 줄 몰랐다. 별일 없었지?”

“없긴 왜 없어! 보타문주가 널 찾아. 아침에 떠난다고 했으니까 빨리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궁금한 것도 다 풀었고, 지금 만나 봤자 더 일만 꼬인다.

“됐다. 난 더 볼일 없어.”

“……괜찮겠어? 그래도 보타문주인데.”

“아쉬운 건 그쪽이지 내가 아니야. 걱정 마.”

“뭐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무윤은 그동안 생각했던 내용을 꺼내 들었다.

“그보다 할 얘기가 있다.”

“뭔데?”

무윤은 네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말에 진중함을 더했다.

“앞으로 한 달. 그동안 각자 하고 싶은 걸 진지하게 생각해 봐.”

“뚱딴지같이 갑자기 뭔 소리야?”

무윤은 생각한 대로 말을 풀어냈다.

“옛 친구를 만나고 왔다.”

“근데?”

“날 도와주기로 했다. 아주 센 놈이고 돈도 꽤 있지.”

악무길은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나?”

“그냥 그렇게만 알아. 하여간 뭐든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 봐.”

“뭐든? 갑자기 그런 소리는 왜 하는데?”

“너희나 나나 원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근데 좋은 기회가 생겼어. 그래서 생각해 보자는 거야. 물론 나도 같은 고민을 할 거고.”

적묘예는 이 말을 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대단한 친구가 널 왜 돕지?”

“목숨 빚이 있다. 그걸 갚으러 온 거야.”

“……우린?”

“내 등을 맡아 줬잖아.”

“……!”

무윤은 세상을 살아갈 방향을 크게 몇 가지는 정했다.

우선 여휘의 글대로 과거는 잊기로 했다. 세월이 만든 억울함을 누구에게 풀까.

그다음 신기심의공 수련, 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밑받침이다. 우선 예전 방식대로 익히다가 여휘가 권한 방향은 차후 고민하기로 했다. 실력을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니까.

다음 어떻게 살아갈지는 크게 세 가지 길이 있다.

예전처럼 여기 흑도에서 자릴 잡고 풀어 가는 길.

이 몸의 주인이었던 무윤의 삶을 살아가는 길.

그리고 둘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

이 고민에 대한 답은 당장 내리지 못했다. 아직 알아볼 것도, 준비도 부족한 상태. 그래서 내린 결론.

‘여기 머무르면서 수련하다가 때가 되면 결정한다.’

그 결정을 하자 바로 떠오른 게 저 네 사람이다. 새로운 삶에 첫 인연이 된 자들인 데다 당분간 같이해야 할 이들.

물론 여휘 말대로 이번 생엔 남보다 날 위해 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저 넷은 확실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야 남건 떠나건 결정도 쉬워지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무공이다.

지금 세상의 무공을 대략 떠올려 봐도 전에 만든 것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 그때 만든 무공을 보완해 전하거나 각자에 맞는 무공을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이들을 위한 길일까?’

그 스스로 물음엔 부정적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공의 경지가 올라간다고 다 좋고, 더 안전한 게 아니다.

흑도 파락호가 우연히 구한 무공 때문에 죽어 나가는 건 과거도, 지금도 비슷했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과거 침주를 떠나 신강까지 도망가게 된 발단 역시 무공 때문이다. 여휘가 신기심의공 화후가 깊어져 두각을 나타내자, 그걸 노린 이들 때문에 결국 여단이 죽고 도망치게 된 것인데.

실력이 그저 그렇기에 조심하면서 사는 게 답일 수 있다. 평생 무윤이 지켜 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돈까지 언급하면서 고민하라 한 것이다.

그 답을 들어 보고 판단하려고.

‘선택은 너희 몫이다.’

한 달 후, 청호파 방주실 앞.

잽싸게 달려오던 염리웅이 세 의남매가 있는 곳을 찾았다.

“오! 다들 빨리 왔네.”

형 염중탁이 다그쳤다.

“야, 인마! 빨리 좀 오지. 너 때문에 한참 기다렸잖아.”

“에이! 내가 놀다 왔어? 시전 돌아보고 왔는데 뭔 잔소리야!”

악무길은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됐다. 그만하고 방주한테 가자.”

그때 염리웅은 적묘예에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너, 정말 그 얘기 할 거야?”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그녀가 뭘 원하는지 잘 안다.

적묘예는 단호한 음성을 흘렸다.

“방주가 저러는데 얘기 안 할 이유 없잖아. 여러 번 말했어. 더 묻지 마.”

“…….”

앞서가는 적묘예의 걸음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무윤은 넷을 둘러보고는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다들 생각해 봤어?”

먼저 적묘예가 나섰다. 무윤을 믿지만 자신이 하려는 건 큰돈이 필요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의지를 다지려는 뜻도 강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들어. 이제 속사정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마침 이 기회에 하는 거니까.”

“알았다. 말해 봐.”

적묘예는 두 염씨 형제를 가리켰다.

“전에 말한 대로 우리 셋은 같이 자랐어.”

“그렇게 말했지.”

“우리 계부가 한때 표두였어. 어느 날 화적떼가 휩쓴 마을에서 이 두 놈을 구해서는 나랑 같이 살게 했지. 그땐 우리 엄마도 죽고 나 혼자라, 표행 나가면 불안해서 그러셨대.”

“표두면 널 맡길 곳도 있었을 텐데?”

“마을에서 좀 떨어져 살았어. 우리 엄마가 기녀 출신인 걸 사람들이 다 아는데 좀 그렇잖아.”

“…….”

지금은 어떤 말도 꺼내기 어렵다.

적묘예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여간 계부가 돌아가시고 우리끼리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온 거야. 그리고 악 오라버니 일은 알지? 부상당한 걸 우리가 구해 준 인연으로 의남매를 맺게 된 거.”

“그건 들었다.”

적묘예는 이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 친구라는 자, 진짜 돈 많아?”

“적진 않을 거야. 돈이 필요한 거야?”

“난 아주 큰 기루를 만들고 싶거든.”

“기루? 그건 왜?”

순간 적묘예의 눈이 번득였다.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 만들고 나면.”

이제 궁금한 건 하나 남았다.

“어디다 만들 건데?”

“뇌양!”

순간 무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뇌양이라!’

이 몸의 주인인 무윤이 살았던 곳이다.

호남의 수십 개 소도시 중 하나인 뇌양.

다른 곳처럼 상단과 무가가 적절히 섞인 고만고만한 가문 세 개가 대표적인 세력이다.

뇌양은 종이를 만든 환관 채륜의 고향. 당연히 종이를 만드는 곳이 많다. 그중 가장 큰 곳이 무윤의 본가인 천가장이다.

생각지 않은 고민이 갑자기 밀어닥쳤다.

어떻게 살지 염두에 둔 세 가지 선택 중 가장 껄끄러운 길이 바로 그 가문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

단 한 번도 가족이라고는 있지도, 겪어 보지도 못한 삶.

그런데 무윤에겐 부모에 누나, 남동생, 거기에 둘째 어머니란 사람과 이복 여동생까지 있다.

그 틈에 들어가 부대끼며 산다는 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이전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건 자명한 일.

하여간 엄두가 안 난다.

물론 지금의 무윤은 뇌양으로 갈 수도 없다.

‘마인으로 낙인찍혀 도망 나왔으니.’

그 어떤 기억에도 마공을 배우거나 접한 건 없다. 그런데 기루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그날, 이상하리만치 격한 울분에 광기 가득한 칼을 휘둘렀고, 제압된 후 품 안엔 마공서가 버젓이 들어 있었다.

그 일로 결국 도망쳐 이곳 침주까지 흘러들게 된 인생.

순간 무윤은 언뜻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야.’

가족들과 살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 기억은 세밀히 살펴보지 않았다. 그저 나중에 문제를 해결하고 여휘가 남긴 돈을 건네주는 걸로 인연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라 여겼으니까.

그런데 뇌양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때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같이 술 마시던 인간들과 취한 모습, 그리고 매캐했던 이상한 냄새까지. 그렇게 기억을 떠올리던 어느 순간.

뇌리를 때리는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 이상했던 냄새가 뭔지 깨달았다.

‘앵속!’

과거 척고련 시절, 의각주 선우진과 환자 치료용으로 앵속을 연구하던 그때 후각의 기억이 지금 무윤의 기억과 일치했다. 아주 독하게 태울 때 나던 그 향이다.

‘어떤 놈이 그걸 오랫동안 뿌렸어. 그래서 착란 상태에 빠진 거고.’

그렇다면 같이 있던 두 놈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당시 상황을 냉철히 따져 봐도 그럴 공산이 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무윤은 가만히 고개를 휘저었다.

‘당장 풀 일이 아니다. 아직 준비도 덜 됐고 상황도 더 알아봐야 하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려던 찰나, 안색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속 깊은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아들이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그랬을까.’

철부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전 무윤의 행동 때문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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