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여휘는 차근차근 춤을 꺼낸 이유를 풀어냈다.
[몸이 바뀌었으니 이제 무공을 익힐 수 있을 터. 신기심의공이야 네놈도 길을 아니 걱정은 없다. 다만 가는 방향에 대해선 몇 가지 말하고 싶구나. 너도 알다시피 난 피로 점철된 싸움으로 심장과 몸의 의념을 일치시키고 분노의 의지로 그 길을 걸었다.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신기심의공은 머리로 궁구하는 무공이 아니다. 의지는 몸의 뜻에 우선하지 못한다. 심장이 전한 뜻과 육체가 일치되는 것이 그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여휘는 여단이 죽은 후 무윤을 데리고 신강까지 탈출하는 과정에 분노만큼 커다란 의지가 없었다. 하지만 신기심의공은 인간의 칠정(七情)인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 어느 것이나 선택해서 익힐 수 있다.
여휘는 피비린내 나는 노여움 대신 춤을 통해 다른 걸 택해 보라는 말이다.
[기억나느냐? 글 선생 목우(沐雨)도 우리에게 춤을 권한 적이 있지.]
그런 적이 있다.
무륜이 한참 학문에 빠져들 때쯤, 세상을 떠돌던 도인 목우가 침주에 왔었다. 신기심의공 심공의 근간이 된 진결을 전해 준 이이기도 하다.
나름 흑도를 잘 운영해 민초들을 살핀다고 곁에 머무르면서 무륜에게 불경 등 많은 걸 가르쳐 준 이. 특히 자신이 만든 도가의 심결, 여의진결을 전하고는 그 장단과 운율에 맞춰 춤추다 보면 즐거워질 것이라 얼마나 꼬드겼던가.
춤을 권한 이면엔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의 가치와 즐거움을 알라는 뜻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몸에 맞지 않은 옷이라 몇 번 하는 척만 하고 말았다.
[또 너와 친했던 도백파 행우자 그놈도 이런 말을 하던데 새겨들을 만했다.]
-춤은 기억과 즉흥의 몸짓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틀을 없앤 무형의 몸짓은 곧 무(無)를 깨닫는 첩경이라오. 무위(無爲)를 향하는 길 중 그만한 게 없음이오. 우리 도백파에도 춤의 무경(舞經)이 적지 않소이다.
무윤은 바로 실소가 올라왔다.
춤이라면 자신보다 질색하던 이가 여휘다. 한데 그런 놈이 그걸 권하다니.
‘이놈아! 너도 안 하는 놈이 무슨…….’
하지만 다음 글에 무윤의 냉소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만든 춤은 하늘의 그물, 천라무(天羅舞)라 이름 지었다.]
‘설마 이놈이 정말?’
[칠정(七情) 중 기쁨(喜)과 즐거움(樂)으로 만들어 보려 했거늘 역시 난 그럴 수 없더구나. 그렇다고 노여움(怒)은 의미 없는 짓. 하여 무심(無心)으로 춤을 이루다 생사경도 훌쩍 넘어섰느니라.]
순간 무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벗이 그토록 바라던 경지에 이른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허허! 이리라도 들으니 너무 좋구나.’
그러다 문득 궁금함이 떠올랐다.
‘이놈이 어디서 춤을 배웠을꼬? 낯간지러워 어디다 말도 못 할 놈인데.’
그 답은 바로 나왔다.
[춤의 형은 영흥사에서 우연히 구한 불무(佛舞), <바라타 나티암>에서 가져와 만든 것이다. 원래 천축 왕가에서 원초적 욕망을 끌어낼 때 추는 춤인데, 어떤 놈이 여기에 불가의 가르침을 담아 무공으로 만들었더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나만큼 괴팍한 놈인 건 틀림없어.]
무윤은 <바라타 나티암>이라 적힌 불경 필사본을 꺼내 들었다.
몇 장 넘기자마자 곧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혼자 추는 부분은 별다른 게 없지만, 남녀가 함께 추는 원색적인 그림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니.
무윤은 없는 여휘에게 괜한 성질을 부렸다.
‘허! 이런 걸 어찌 불무라 한단 말인가.’
마치 무윤의 생각을 읽은 듯 그 답도 여휘는 적어 놓았다.
[반각 그놈도 너처럼 생각하고 구석에 처박아 놓았었지. 한데 잘 살펴보면 알 게다. 우리가 만든 그 어떤 무공에도 못지않다는 걸.]
여휘는 거짓말을 안 한다. 그럴 상황이면 아예 입을 닫아 버리고 말지.
그때 의아한 시선이 다른 서책을 향했다. <바라타 나티암> 필사본이 또 있다.
‘왜 같은 걸 두 개나?’
또 다른 필사본엔 각 장마다 아래에 주해가 적혀 있었다.
잠시 살펴보던 무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단전 심법을 왜 적어 놨지?’
신기심의공이 있는 이상 다른 심법은 필요가 없는데.
바로 아래에 답 같지도 않은 해답이 적혀 있었다.
[이 춤은 남녀가 같이 배울 수 있어 하단전 심법을 따로 정리해 놓았다. 너야 필요 없지만 내 고생해 만든 것이니 누군가에게 전해라. 꼭 그랬으면 하는구나. 만약 우리가 후손이 있었다면 잊히지 않았을 터. 같은 우를 범할 수 없음이니 잊지 말거라.]
‘뭔 개소리야!’
하도 기가 차서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이번 생에선 꼭 여인과 만나 보라는 뜻이야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원색적인 춤을 어떤 여인과 같이 춘단 말인가.
심법만 전한다면 몰라도.
애써 무시하고는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부의 글이 이어졌다.
[과거는 잊어버려라. 너 또한 이제 남일진대 그 몸뚱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세상의 순리. 춤 또한 네 선택이다만 시도는 했으면 하는구나. 친구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해 두자.]
거기에 몇 가지 말이 덧붙여 있었다.
[혹 돈이 필요할까 싶어 조금 모아 두었다.]
바로 코웃음이 쳐졌다.
‘조금?’
한 곳에 귀한 보석을 조금 모아 놓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만도 상당한 값어치가 나간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 개념이 없는 건 다른 이유다.
‘이놈아! 천설청옥 한 조각이 얼마인데!’
황금은 가격을 매길 수 있지만, 옥은 매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黃金有價玉無價)
사방을 둘러싼 천설청옥의 값어치는 가히 돈으로 환산하기가 어려울 정도. 물론 여휘 또한 이 청옥을 팔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한 말이지만 그래도 조금 남겼단 표현은 말도 안 된다.
그 외에도 몇 가지를 남겼다.
여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썼지만 가장 무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
[불경과 도가 진경, 약초 서적 몇 개 넣어 두었는데 심심풀이는 될 게다.]
필체를 보니 전부 여휘가 필사한 것들이다.
문득 벽 한쪽에 쌓아 놓은 여분의 겸백 수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글이 없는 여백 상태로 쌓여만 있다는 건.
‘여기서 매번 필사했구나.’
따스한 온기가 가슴을 감싸더니 어느새 울렁임을 더했다.
‘고맙구나.’
불경과 도경은 무윤이 하도 읊어 대서 짜증만 내던 놈인데, 고생해서 한 자 한 자 썼을 여휘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이 서책들이 있는 한 여휘는 언제나 내 곁에 있으리라.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절로 흐른다.
‘알았다. 항상 옆에 두마.’
이제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은 한 줄기 바람에 얹어 훌훌 날려 보내도 된다.
[다른 무공도 심심할 때 보라고 몇 개 넣어 뒀다. 왼쪽 서고는 네가 재밌어할 만한 것이다. 물론 훔친 게 아니니라. 주고받았을 뿐이지.]
왼쪽 서고를 살피던 무윤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이놈이 도대체 뭔 짓을 한 게야!’
남긴 건 몇 개가 아니다. 정, 사 가릴 것 없이 거대 문파의 비전도 여럿 눈에 띈다. 그 외에도 절대의 무공 아닌 게 없을 정도로.
물론 상대가 선선히 내줬을 리 없다. 한데 주고받았다?
‘아이고 이놈아! 퍽이나 좋아서 줬겠다.’
절대 무공은 머릿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여휘 말대로 무윤에겐 그저 호기심거리일 뿐.
[우측 서고는 우리 애들이 강호혈전 중에 뺏어 둔 것들이다. 보면 알겠지만 도백파(道白派) 것이 많아. 야율겸 그놈이 멸문시키면서 싹 쓸어 왔더구나. 내가 필사한 도경 대부분이 전대 장문인 행우자 그놈이 준 것인데 안타깝지만 어쩌겠느냐.]
‘도백파라!’
지금은 사라진 문파. 그곳이 있던 사라산(謝羅山)은 지금 무당산이라 불리고 도가 최고 문파인 무당(武當)이 있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행우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련함이 눈가를 스쳤다.
‘미안하게 됐구먼.’
맥이라도 이어졌다면 몰라도 이미 구백 년 가까이 지난 일. 지금은 달리 생각할 게 없다.
그리고 마지막 말.
[내 곁에 네가 있었듯, 네 곁에도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내 벗이여. 이번엔 남을 위해 살지 마라. 부디 너만의 삶을 즐기길 바라마. 내 꼭 지켜보리라.]
여휘도 여기서는 감정이 복잡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덧붙인 말인지, 마지막 지켜본다는 말은 색과 필체가 약간 달랐다.
무윤은 깊은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여휘의 글로 인해 덜어 낸 것도 있고, 쌓인 것도 있다.
쌓인 것 중엔 여휘가 언급하지 않아 그런 것도 있다.
‘소려 얘기가 없어.’
딸처럼 키운, 아니 딸이었던 월소려. 무윤이 궁금해할 걸 모를 놈이 아닌데 아무 내용도 없다는 건.
무윤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괜한 생각하지 말자. 잘살았을 게야.’
지금은 떠올리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자 불안이다.
겸백을 내려놓은 무윤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많은 것들을 심상에 올려 간략히 정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안 걸릴 수 없다.
사방의 청옥 푸름이 그 빛 모아 우수수 쏟아져 무윤의 가슴을 여며 왔다.
* * *
다음 날 저녁, 청호방 장원.
부방주가 된 악무길은 예상치 못한 인물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맘이야 앞에 있는 미인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싶지만 상대는 보타문 검각의 소검후 후보.
함부로 눈알을 굴렸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속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무길아, 참아라. 사는 게 장땡이다.’
어제 일 때문이라 지레짐작한 진서연은 다시 뜻을 전했다.
“제가 보자는 게 아녜요. 문주님께서 찾으시는 거지.”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어제 친구 만난다고 나가서는 아직 안 왔습니다. 정말입니다.”
옆에 있던 적묘예가 거들었다.
“절 도와주러 나선 분께 거짓말은 안 해요. 오라버니 말이 사실이에요.”
“그럼 언제 오는지?”
“시내를 다 뒤졌는데 없는 걸 보면 밖으로 간 거 같은데.”
“우린 내일 아침에 떠나요. 그 전까지 오면 말씀 전해 주세요.”
“알겠어요. 오는 대로 바로 가라고 할게요.”
“그럼.”
진서연은 아쉬움을 접고는 발길을 돌렸다. 어제 문주와 법론을 펼칠 때 보였던 그 눈빛이 절로 떠올랐다.
‘아쉬워. 얘길 좀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명 자신을 반추(反芻)할 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소림에서의 법회가 끝나면 자신은 무림맹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멸마단(滅魔團) 시험에 통과하면 무인의 삶이 확정되는 셈이다. 마인을 척결하는 게 주 임무인 그곳에서 살인은 불가피한 일.
그곳에 몸을 담는 순간 불자의 길은 요원해진다 여겼다.
그런데 한낱 흑도 파락호에게서 그 두 가지 길을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얼핏 엿봤다.
흑도인 무윤이란 자도 이미 그 피의 길을 걸어온 자. 한데 어제의 흔들림 없는 사상(思想)과 눈빛은 아직도 불자임을 알렸다.
주산군도 수적을 무참히 베어 내던 언제쯤인가 가슴이 울부짖었다. 더 이상 검에 피를 묻히면 불자의 길은 영영 떠나 버린다고.
그날 이후 각주에게 부탁해 폐관에 들기도 했다. 하나 아직까지 그 마음의 짐을 못 떨쳐 버리고 있는 지금, 다른 이의 경험에서 도움을 얻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진서연의 입가에 옅은 한숨이 어렸다.
‘인연이 여기까지면 어쩔 수 없지.’
한편, 진서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악무길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난 또 뭔 일인가 싶어 간이 조마조마했네.”
적묘예의 눈꼬리가 상큼하게 올라갔다.
“그거 아닌 거 같은데.”
“뭐. 뭔 소리야?”
“한마디라도 더 건네 보고 싶은데 그러다간 맞아 죽을 거 같고. 그렇다고 눈에서 사라지니 아쉽고. 뭐 그런 거 아녜요?”
악무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얘가 왜 이래! 야! 저 여자 소검후 후보야. 언감생심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겠어!”
“표정은 아니던데 뭘.”
“뭐, 그거야. 크흠!”
옆에 있던 염중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형님. 정말 방주가 떠들던 게 엉터리는 아닌 모양이오. 따로 방에 가서 한참 얘기까지 했는데 그 대단한 보타문주가 다시 보자고 할 정도면.”
동생 염리웅도 거들었다.
“그러게. 내가 이래 봬도 보는 눈은 좀 있잖아. 그때 방주 눈빛이 진짜 딴사람 같았다니까. 분명히 방주한테 뭔가 사연이 있어.”
“그렇지? 그 정도 공부한 거 보면 학사 같기도 하고.”
“근데 무공 초식은 꼭 정파 출신 같단 말이지.”
악무길은 주변을 살피고는 버럭 핏대를 올렸다.
“말조심! 괜한 말 잘못 나갔다간 우리도 곤란해지는 거 몰라!”
“에이! 우리밖에 없는데 뭘 그래요.”
“어허! 거 뭐시냐. 밤말은 새가 듣고 낮말은 쥐가 듣는다. 그런 말도 있잖아.”
“근데 그거 맞는 거요? 거꾸로 아닌가.”
“야! 뭔 말인지 알면 됐지 뭘 따져! 이게 요즘 부방주 말을 아주 깔아뭉개고 지랄일세.”
“에이! 뭘 또 그런 거 가지고 그럽니까. 내 잘못했소. 됐죠.”
“크흠! 진즉 그럴 것이지.”
그때 지붕 위 한쪽에서 팔베개로 누워 있던 자의 눈이 번득였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다 있네. 보타문주가 파락호와 독대를 했다고?’
침주 하오문 당주 연사구의 입꼬리가 끝까지 올라갔다. 재밌는 일을 찾았을 때의 버릇이다.
‘이거 진짜 뭐가 있는 놈이야.’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