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그칠 것 같지 않던 울음이 멈췄다.
무윤은 주변을 향해 눈을 빛냈다.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여휘가 남긴 흔적을 찾아야 한다. 고민할 것도 없이 집무를 보던, 서류가 꽂혀 있던 서고로 향했다. 새로운 내용은 항상 여기에 놓아두었으니.
청옥의 서고를 열자 수많은 겸백(기록용 비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맨 위에 있던 것을 조심스레 손에 들었다. 아무리 잘 보관했다고 해도 흐른 세월은 천 년이다. 색이 바랬지만 다행히 글체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
서두의 글을 보는 순간 무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먼저 의아함이 올라왔다.
‘범어?’
떠나올 당시에 여휘는 범어를 몰랐다. 아니, 냄새나는 불경이 싫다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놈인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이라 오해할 수도 없다.
첫 글귀가 이렇게 시작했으니까.
[오랜만이구나. 고집쟁이.]
고집쟁이.
매번 무윤을 타박할 때마다 쓰던 친구의 말버릇이다.
무윤은 큰 심호흡과 함께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겸백으로 눈을 향했다.
[네놈이 떠난 지 이제 백오십 년이다. 어찌 보면 짧고 달리 보면 긴 세월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다만 이제 글을 남길 시점이 된 거 같구나.]
무윤은 피식 웃음이 올라왔다. 오십 년은 너끈하리라 예상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백오십 년은 과하다 싶었는데.
[그리 떠나보내고 자책도 했다만 지금 와 보니 잘했지 싶다. 네 늙은 몸이 경계의 힘을 못 이기고 흩어졌으니, 아마 다른 삶을 찾았을 터.]
바로 안도의 한숨이 올라왔다. 글이나마 그렇게 적어 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 생각했다니 다행이구나.’
[네 이름이 한 번은 죽은 고비를 넘겨 줄 거라고 그리 입방정을 떨더니 그게 인연이 된 모양이다.]
이 글엔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 늙은이 고집대로.
‘거봐라 이놈아. 이름 안 바꾸길 잘했지.’
격한 마음을 가라앉힌 무윤은 장문의 범어로 빼곡한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 *
얼마 후, 동굴 안.
읽던 글을 가만히 내려놓은 무윤은 멍한 눈빛을 한동안 감추지 못했다.
속 깊은 한숨이 절로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허! 그것참!’
자신이 떠나고 백오십 년 동안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우선 척고련이 사라진 것부터가 그랬다.
[너 떠나고 나도 이십 년 후 련을 나왔다. 세상을 한번 다 돌아보고는 인연을 끊었지. 그 정도면 난 할 만큼 한 게야. 잔소리할 생각은 아예 말아라.]
무윤은 속으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할 걸 아는 놈이 그리 짧게 있었느냐?’
[간혹 어찌 돌아가나 몇 번 나가봤더니 팔십 년 전쯤인가 련이 없어졌더구나. 강호 대혈전인지 뭔지 하다가 중원 애들한테 박살이 났어. 둘째 겸이가 사홍이를 죽이고 강호에 나섰는데 그놈이 어찌 중원을 감당할까.]
역시 야사록대로 둘째 야율겸이 일을 저지른 모양이다.
속 깊은 한숨이 올라올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예견된 수순이었으니. 천하를 제패하고 군림한 건 여휘와 자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다만 그래도 조금은 더 이어 가리라 여겼거늘.
그리고 여휘와 척고련이 사라진 이유도 알게 됐다.
[얼마 전에 나가 보니 세상에 우리 이름이 지워졌더구나.]
‘후! 대체 누가 그런 것이냐?’
[이상해 알아보았더니 세상이 그리했더구나.]
‘세상이라?’
[얼마 전부터 세상이 종이라는 게 퍼졌다. 너야 잘 알겠지.]
‘허허! 알다 뿐이냐? 지금도 놀람이 가시질 않거늘.’
무윤이 가장 놀랐던 변화 중의 하나가 종이다.
장자(莊子)의 친구 혜시(惠施)의 장서를 두고 한 말이 있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두보의 시에서도 언급된 말.
물론 많은 책을 읽으라는 뜻이지만, 실제 다섯 수레에 실린 죽간엔 약 십만 자 정도가 적힌다. 지금 종이로 따지면 두꺼운 서책 몇 권밖에 안 되는 양.
한데 종이로 인한 세상의 변화야 당연하지만 그게 우리가 사라진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종이로 인해 세상의 모든 기록이 다시 쓰였다. 당연히 무가의 기록 또한 그리됐지. 한데 그 비싼 종이를 쓰는 대부분은 당연히 거대 문파와 세가들인데, 그들이 처절하게 무릎 꿇은 기록을 남기고 싶겠느냐? 이전의 죽간 기록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종이론 하나둘 기록하지 않다 보니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 척고련과 우리 존재는 서서히 잊혀 가더구나.]
무윤의 입가에 허망한 탄식이 흘렀다.
‘허! 그리된 것이구나!’
[어느 한 곳이 작정하고 감춘 게 아니다. 아픈 기억을 잊고 싶은 건 인지상정. 그게 종이와 맞물리고 세월이 흘러 자연스레 그리된 게야.]
무윤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종이로 인한 세상의 격변, 그 틈바구니에 어찌 우리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거기에 천 년의 세월이 더해졌는데.
또 어찌 보면 사라진 것 자체가 우리가 이룬 게 위대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만큼 두려워해서 벌어진 일이니.
무윤은 마음 한 곳의 짐을 덜어 냈다. 가장 큰 과거의 일은 잊어버려야 한다.
‘세월이 만든 억울함이면 어쩌겠느냐.’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
마공에 대한 의문은 바로 풀렸다.
[한 오십 년 전부터 마공이란 게 세상에 뿌려졌더구나. 내가 봐도 패악의 무공이라 그놈들을 없애려 찾아봤더니 그 뿌리가 선우진, 그놈이었어. 지금 세상에선 마의(魔醫)라 불리더구나.]
무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강호 야사엔 마의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 있었다. 단지 이름만 없을 뿐이지.
‘선우진, 그 아이가 마의였다니!’
무륜은 부모가 병들어 죽고 혼자 고아로 남은 선우진을 우연히 거뒀다. 그 후 의술에 자질이 있어 그 길을 열어 주고 살폈던 아이다. 떠나기 바로 전엔 척고련에서 의당주를 맡았었고.
그때 문득 무윤의 뇌리를 때리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선우진의 아들이 부상으로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된 일이 있었다. 당시 선우진은 서역에서 치료용으로 들여왔던 앵속(양귀비)를 이용해 고치려고 했었다. 한데 그 부작용을 우려해 무륜이 말렸는데 몰래 하다 들킨 적이 있다.
[강호 혈전에서 패한 야율겸과 선우진 두 놈이 그때부터 앵속을 이용해 마공을 연구했어. 그 결과물이 하나둘 나오니까 다시 강호에 덤볐다가 또 패했더구나. 한데 그때부터 강호에 하나둘씩 흘러 들어간 게야.]
무윤은 급히 다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야율겸도 신강에서 연구를 계속했고, 선우진도 극천련이란 걸 만들어 따로 나왔더구나. 내 그냥 있을 수 없어 우선 두 곳을 찾아 마공이란 걸 보이는 대로 없앴다. 하나 살펴보니 그런다고 없어질 마공이 아니더구나.]
‘어째서 그렇단 말이냐?’
[마침 선우진 그놈을 찾았기에 물었지. 왜 그딴 걸 만들었는지. 한데 이리 답하더구나.]
여휘는 둘 사이의 대화를 따로 기록해 놓았다.
-왜 그런 것이냐?
-무공을 원하는 아들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시작했습니다.
-하면 거기서 멈췄어야지.
-한데 앵속을 잘 이용하면 상단전을 열 수 있고, 그걸 무공에 접목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허! 이놈아. 무륜이 널 왜 말렸는지 정녕 모르느냐? 그리 성공할 수 있는 건 만에 하나야. 그 하나를 위해 다른 이들은 몸이 망가지거나 광기에 빠져 버린다. 그걸 잘 아는 놈이 어찌!
-련주시여! 전 원하는 이들만 모아 했습니다. 단 한 명도 강제로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자세히 알렸는데도 다들 동의했단 말이냐?
-예, 분명 사실입니다.
-허! 어찌 그런 게야?
-모두 련주의 뒤를 밟고 싶었으니까요.
-뭐라?
-련주께선 스스로 만든 무공으로 세상에 우뚝 서셨습니다. 저들도 속에 맺힌 한을 그렇게 풀고 싶어 합니다. 전 그런 저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놈아! 어찌 방법이 그 하나뿐이더냐? 다른 길도 있는 걸 알면서 왜 쳐다보지 않으려는 게야?
-가진 것 없고 배운 게 없는 우리 중에 그 길을 이루신 분은 련주밖에 없습니다. 한데 저흰 련주 같은 자질이 없는데 어찌 그 길만 가라 하십니까? 련주께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셨듯이 저 또한 그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놈아! 세상을 보거라. 뜻이 그러하다 하나 네게서 퍼진 것들이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고 있어. 그걸 모른다 할 셈이냐?
-미흡한 것이 세상에 나가 변질된 건 제 실수가 맞습니다. 하나 연구하면서 알았습니다. 이 일은 제가 없어도 누군가 시도했을 일이라는 걸요. 그럴 바에야 제가 나서는 게 맞다 여겼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보다 많이 아는 이는 없으니까요.
여휘는 설득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멈출 생각은 없는 게냐?
-손을 쓰시지요. 세상은 아득하고 가슴은 한으로 가득 찬 게 우리입니다. 그게 제대로 된 마공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가지지 못한 자도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방법을 주고 싶어 택한 길이거늘. 멈출 생각 없습니다.
여휘는 순간 생각을 달리했다. 이미 생이 거의 다해 가는 제자 아닌 제자를 죽이는 것보단 더 나은 방법이 있다.
-내 너를 죽이지는 않으마. 하나! 그 길이 틀렸다면 너 스스로 모든 것을 접어라. 네 대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에게 그 뜻을 남기란 말이다. 그리하겠느냐?
-당연히 하겠습니다. 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여휘는 마지막으로 선우진에게 남긴 이 말은 무륜에게 전하지 않았다.
-내가 자질이 있어 성공했다 했지?
-죄송합니다. 급히 떠들다 보니 말이 부족했습니다. 련주께서 한 노력도 있음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나가 더 있다.
-예? 어떤?
-내겐 무륜이 있었다.
-그거야 무륜 사부께서 무공을 체계화하셨으니…….
-아니. 그 얘기가 아니야. 내가 젊을 때 신강까지 수천 리를 다친 무륜, 그놈을 들쳐 업고 온 건 알지?
-예. 그 수많은 혈로를 뚫은 것이야 잘 압니다만.
-그때 내 무공의 체계는 완성됐지. 한데 그때 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의 목을 베고 그 길을 걸었으니까. 밤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날 괴롭힐 때는 수천 번도 내 목을 긋고 싶었다. 한데 그때마다 내 정신을 부여잡아 준 게 약이나 무공 심결이었을까?
-……그 말씀은?
-무륜이 그리했듯, 나 또한 내 벗을 살리려는 마음, 그뿐이었다.
-……!
한동안 무윤의 멍한 눈빛은 푸름이 가득 찬 천정을 떠나지 못했다. 잠시 후 허탈한 웃음이 절로 흘렀다.
“결국 마공은 우리에게서 기인한 것인가!”
무윤과 여휘가 직접 안 했다 한들 둘이 남긴 씨앗인 셈.
여휘 또한 적지 않은 소회를 글로 남겼다.
[옳고 그름을 떠나 강호의 누군가는 했을 일이었어. 앵속이 천축과 서역을 거쳐 오는 바람에 신강에 있던 우리가 먼저 접했기에 벌어졌을 뿐. 또 달리 보면 선우진 그놈이 몰래 연구하느라 중원으로 넘어가는 앵속을 막았더구나. 그 바람에 앵속이 중원에 덜 퍼진 건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너무 자책할 필요 없다는 소리다. 세상일을 어찌 다 알고 일을 벌이겠느냐.]
지금도 앵속은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약초로 일부 의원들이 사용하긴 하지만 정신을 홀리는 약으로 대량 재배되는 건 아직이다.
[그 후 세상에 퍼진 마공을 이유로 겸이 놈을 천마라 호칭하고 악의 종주로 부르게 된 게지. 이 또한 어느 한 곳이 작정하고 세상에 뿌린 게 아니다. 악을 규정해 자신을 정의로 만들려는 모든 이들과 오랜 시간이 그리한 게야.]
무윤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척고련 일이야 잊어버린다 쳐도 마공은 그럴 수가 없다.
이 몸의 주인이었던 무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일.
‘마공 때문이었지.’
마공을 익혔다는 모함에 해명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도망자가 된 신분이다.
무윤은 다시 복잡한 머리를 가다듬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
아직 여휘가 남긴 것 중에 고민할 게 남았다.
글을 접한 이후 처음으로 가벼운 실소가 흘렀다.
“춤을 배워 보라고? 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