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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2화 (12/161)

12화

무윤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맴돌았다.

두 친구의 이름은 자신이 지어 줬다.

‘이름대로 됐어.’

여단은 새벽처럼 짧지만 강렬한 생을 살았고 여휘는 가장 오래 살았다. 떠난 이후로 못해도 오십 년은 더 살았을 터. 그리고 자신은 한 번 더 살 인생을 얻었으니.

회한에 젖었던 무윤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 아니 천 년 만에 만난 친구 덕에 응어리진 가슴이 많이 풀렸다. 이제 다시 저 침주 시내로 가서 닥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새롭게 다진 결의가 두 눈에 가득 찼다. 그 눈이 저 아래 침주 시내를 내려 보던 어느 순간.

서서히 커지던 무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저건!’

금세 부릅떠진 두 눈은 침주 시내를 세세히 훑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선을 따라 움직이듯 뭔가를 쫓던 눈길이 한 곳에서 멈췄다.

한동안 멍했던 무윤의 눈가가 촉촉이 젖더니 어느새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문득 입에서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큭큭! ……크큭! 푸훗! 푸하하하!”

이제야 알았다.

엉터리라 생각했던 선문답은 여휘가 남긴 게 맞다. 그리고 저 침주 시내의 수로가 왜 생겼는지. 어떤 놈이 만든 것인지도.

얼마 후, 망산 봉우리를 한참이나 울리던 웃음이 진정됐다.

무윤의 눈동자는 침주 시내의 한 곳을 뚫어지게 향했다.

시내 한복판에 덩그러니 솟은 큰 바위로.

어제 의아하게 쳐다봤던 그 거석이다.

‘저기다.’

무윤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법을 끌어올렸다.

파팟!

그 방향은 침주 시내에 있는 거석 쪽이 아니라 망산 숲속 어딘가를 향했다.

여단이 죽던 그날 여휘와 함께 숨어들었던 그 동굴로.

이제 또 다른 친구 여휘를 만나러 갈 때다.

잠시 후, 망산의 한 동굴 입구.

천 년을 버틴 울창한 송림이 동굴 앞을 빽빽이 가로막고 있지만 무윤은 거칠 것 없이 그 입구를 찾았다.

아마 이 나무도 여휘 그놈이 갖다 박았으리라. 당시엔 앞이 훤했던 동굴 입구였는데.

-새벽을 만나러 가는 자, 나를 볼 것이다.

새벽을 만난다는 건, 죽은 여단을 뿌린 망산에 오르라는 뜻이고, 거기에 오르면 침주에 가득 펼쳐진 수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휘가 만든 게 확실한 꾸불꾸불한 수로는 만일을 대비해 피난처로 정한 동굴의 길을 가리키는 지도다. 세 사람만이 아는 그곳.

빛 한 점 없이 어둠만이 있는 길이라 수십 번을 갔어도 곧잘 헤매곤 해서 가는 길을 지도로 만들었다.

수로의 흐름이 바로 그 길을 나타냈다. 수로 옆에 떡하니 있는 커다란 바위는 여러 은신처 중 한 곳을 가리키고.

다시 웃음이 올라온다.

‘하여간!’

지도를 남기려고 저 큰 시내에 강줄기를 만드는 황당한 놈은 여휘밖에 없으리라.

무윤은 급히 만든 횃불과 눈에 새긴 수로의 길을 떠올리고는 한 걸음씩 동굴 안으로 향했다.

흥분과 격정에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라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진 게 얼마나 가슴 아팠던가.

여휘 놈 또한 그랬을 터. 게다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자책 또한 적지 않았을 텐데.

조금씩 깊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던 즈음,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다.’

수로 옆에 있는 바위가 가리킨 곳.

비가 많이 오는 곳이라 동굴 안에도 물이 가득 찬 곳들이 있다. 이곳 또한 웅덩이처럼 항상 물이 고여 있는 곳.

그 웅덩이를 헤엄쳐 우측으로 돌아가는 곳에 작은 공간이 있다.

물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인데 셋이 물장난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서너 장 넓이로 대여섯 명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

막힌 곳이 아니라 뭘 보관하거나 넣어 두진 못했으리라.

하지만 여휘라면 천 년이 지나도 알아볼 글귀 정도는 벽에 남겼을 게 틀림없다.

한쪽 손에 횃불을 올려 들고는 물로 들어섰다.

발을 담그자마자 극한의 냉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내력을 끌어올려 몸을 덥히고는 헤엄치듯 물살을 저었다.

샤아악! 샤악!

그렇게 후미진 구석에 도착해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횃불을 쳐든 무윤의 눈이 흔들렸다.

얼핏 살핀 동굴 벽 주위론 특이한 흔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 분명해. 수로도 그렇고 그 돌도 여휘 놈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벽과 바닥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무윤의 사라져 가는 희망처럼 서서히 불빛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노란 불꽃이 마지막 제 몸을 불사르고는 암흑을 불러온 지 한참이 지나도 무윤은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꺼진 불꽃 대신 두 눈 가득 정광을 피어 올리고는 벽면 전부를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있어. 분명히!’

손은 흙 범벅이 다 되고 옷은 땀으로 흥건해졌지만 무윤은 벽을 헤집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진이 넘게 온 벽을 다 헤집었어도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 더 흐를 무렵, 무윤은 결국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후! 후!”

거친 숨을 연달아 내쉬고는 쓰린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혔다.

잠시 후, 무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휘휘 여러 번 내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있어, 분명히. 내가 못 찾았을 뿐.’

거대한 수로는 분명 동굴의 미로와 일치한다. 전에 없던 그런 거대한 수로를 다른 자가 만들었을 리 없다. 혹 이 주변 어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급히 오느라 물 건너에 돌아가기 위해 남겨 둔 여분의 횃불밖에 없다.

‘다시 온다.’

무윤은 물소리를 방향 삼아 물로 다가갔다. 우선 흙 범벅이 된 손을 씻어 내고는 다시 물에 들어가려는 찰나, 무윤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손이 왜?’

짙은 암흑 속에 씻어 낸 두 손에 은은한 푸른빛이 여리게 서렸다.

순간 무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연하다 한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와 이 색채를 모를 수 없다.

수십 년을 보고 맡았던 것인데.

‘천설청옥!’

신강 서쪽의 만년설산에서 우연히 여휘 놈 덕분에 찾은 옥. 의형검강을 시험한답시고 빙하를 갈라내던 그때 발견했다.

그 은은한 푸름과 향이 좋아 몇 개 잘라 내서 가지고 갈 생각이었는데, 여휘 놈이 아예 통째로 갖고 와 침실과 서재 사방에 쫙 깔아 준 그것이다.

그 가루가 벽면에 뿌려져 있었다.

말랐던 눈가가 다시 물기로 촉촉해졌다. 복받친 가슴은 그저 친구의 이름만 되뇌이게 만들었다. 이제 곧 만나 볼 수 있는 그놈.

‘여휘야.’

이제 의심은 없다. 찾기만 하면 된다. 횃불이 꺼진 상태에서 다시 벽면을 살폈다. 군데군데 헤집은 몇 곳에서 푸른빛이 아른거린다.

이젠 자신이 아닌 여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때. 여휘라면 분명 긴 세월이 걸릴 수 있다는 정도는 짐작했으리라.

‘그동안 다른 이가 우연히 올 수도 있다. 그걸 감안했을 거야.’

무심코 발견될 통로를 만들 리 없다. 또한 정밀한 기관 장치는 세월을 못 견딜 수도 있으니 피했을 터.

‘나만이 찾을 수 있되 다른 이의 침입을 막으려면?’

한참을 고민하던 어느 순간,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벽면에 은은히 흐르는 푸른빛이 만드는 형상은 예전 어떤 곳의 입구와 비슷하다. 순간 뇌리를 때리는 전율이 일었다.

‘맞다. 내 방의 비밀 통로.’

무륜의 안전을 염려한 여휘가 만들자고 했던 비밀 통로. 순간 무윤의 눈은 벽면 한쪽 구석을 향했다.

당시 비밀 통로가 있던 자리.

급히 다가가 주변을 살피던 무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다.’

세밀히 보면 단일 벽이 아니라 구멍을 뚫고 돌로 막아 놓았다.

그곳을 파헤치자 안이 비어 있는 공간이 보였다.

무윤을 들뜬 가슴을 가라앉혔다.

‘만약 저 안에 네 개의 통로가 있다면.’

이미 확신이 된 추측과 함께 좁은 동굴을 헤쳐 나가던 어느 순간.

무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맞았어.’

이전 비밀 통로와 같은 구조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살펴보고서는 짐작대로 두 번째 통로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득 떠오른 아련한 기억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여휘가 두 번째를 생로로 만든 이유.

-왜 두 번째로 했지?

-그냥. 예전 내 이름이 장이(張二)잖아.

얼마 후, 긴 통로를 지나자 옅은 푸른빛이 조금씩 그 색을 더했다.

무윤의 떨리는 가슴은 끝없이 방망이질 쳤다.

그러던 어느 순간, 놀란 무윤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황당함에 물든 눈은 대여섯 장 되는 공간을 이리저리 훑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무윤은 무심코 말을 흘렸다.

여휘가 황당한 일을 할 때마다 내뱉던 말.

“미친놈!”

정말 그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 척고련에 있던 자신의 방을 그대로 옮겨 놨다. 벽면 전체를 둘러싼 천설청옥에 쓰던 침상, 가구, 겸백(비단으로 된 책)과 죽간을 넣어 두던 서고까지.

다만 나무로 된 것들은 모두 청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때 문득 없던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중앙에 있는 자그마한 청옥상 두 개.

하나는 젊을 적 여휘와 여단, 그리고 자신이 술을 마시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그때 그 얼굴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싸해졌다.

‘이제야 만났구나.’

옆에 있는 석상으로 눈을 돌렸다. 낯이 익은 얼굴이지만 조금은 달라진 모습의 여휘가 춤을 추는 조각. 아마 무륜이 떠난 후의 모습일 터.

심상에 그려진 그리운 이의 하늘 향한 손짓이 눈에 들어온다.

이젠 훌훌 털고 새로운 세상을 보라는 듯 짙은 미소가 그 입가에 담겼다.

아롱지는 눈물과 함께 옅은 웃음이 올라왔다.

‘마지막까지 젊은 모습이었구나.’

그렇게 청옥상을 하염없이 매만지던 어느 순간 어둠 뚫고 치솟는 태양 같은 불덩이가 가슴을 휘저었다. 순간 치밀어 오른 격정에 입가는 제 갈 길을 잃고 이지러졌다.

“크흑!”

천 년의 세월, 그 긴 시공을 넘은 자신을 위해 친구가 만든 공간.

하지만 울음은 그 고마움 때문이 아니다.

이걸 만들 동안 여휘가 겪었을 고통 때문이다.

‘이놈아! 뭐 하러 이랬어?’

이곳을 알리기 위해 퍼트린 선문답부터 수로, 거기에 예전과 똑같이 만든 이 공간까지, 그 무심한 놈이 그냥 떠나보낸 친구 탓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아파했을지 가슴이 아려 온다.

여단은 자신과 여휘를 살리기 위해 떠났다.

자신 또한 여휘를 살리기 위해 그랬고.

여휘만 혼자 남았다.

그 죄책감에 혼자 남아 수많은 날을 회한으로 보냈을 텐데.

이걸 준비하는 내내 그놈 속은 문드러졌을 터.

저 빛나는 청옥 하나를 옮길 때마다 가슴의 멍울 또한 차곡차곡 늘어났으리라. 청옥상을 만들던 정(釘)은 대못이 되어 가슴을 찔러 댔으리라. 남겼을 글엔 떨어진 눈물이 마르고 말라 색을 바래게 했으리라.

그 긴 세월 힘든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움직였을 친구.

늙은 자신을 떠나보낸 죄책감에 한이 맺혔을 친구.

눈앞에 펼쳐진 것들은 여휘가 그랬다는 걸 여실히 알린다.

절절한 안타까움 하나가 가슴을 후벼 팠다.

‘그 말을……! 그 말을 했어야 했거늘!’

그 말을 했어야 했다.

잊고 살라는 당부가 아니다. 내가 잊고 살겠다고 했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편해진다고. 난 꼭 그럴 거니까 너도 그러라고 전했어야 했는데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꼭 해야 할 그 말을.

그 한 맺힌 아쉬움이 그리운 이의 영상을 절로 떠올리고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가슴 어림에 꼭꼭 숨겨 놓으려던 그리움을 콕 끄집어냈다.

한없는 그리움이 그 이름을 외치게 만들었다.

“여휘야!”

죽을 때까지 평생을 혼자 간직하고자 했던 그리움이다. 못다 한 말은 저승에서 만날 때나 풀어헤치리라 마음먹었건만.

가슴속 저 밑에서 복받친 고함이 원망을 쏟아 냈다.

“왜 그랬어, 이놈아! 왜! 그냥 편히 살지 왜! 그래야 나도 편한 것을 어찌 몰라 이놈아!”

주룩주룩 흐르던 눈물에 어느새 얼굴까지 일그러졌다. 그제야 울렁이던 가슴이 한을 토했다. 낮은 울부짖음에 지울 수 없었던 한이 목 놓아 울었다.

“허어엉! 허엉! 크흑!”

양쪽 볼에 눈물, 콧물이 다 젖도록 아련한 감정의 해일이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리움에 더해 친구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전한 아픔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별처럼 빛나던 청옥의 빛만이 복받치는 감정을 어루만졌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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