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무윤은 눈을 몇 번 껌벅거리고 고개도 휘휘 내저어 봤다.
두 개의 기억이 섞여 착각했을 수 있다.
‘기억이 잘못됐나?’
하지만 몇 번을 되짚어 봐도 예전 시내엔 북쪽 악양에서 줄기줄기 내려오는 지류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시내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 잡은 저 거석도 당시에는 분명 없었고.
다섯 장 높이는 족히 되는 저걸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무윤의 시선이 악무길을 향했다. 그라면 다른 얘기를 할지 모른다.
“정말 아주 옛날부터 저랬다고?”
“당연하지. 저런 걸 사람이 했을 리가 있어?”
“……그래도.”
악무길은 가벼운 농을 입에 담았다.
“엄청난 무인이라면 또 모르겠다. 천마 야율겸이라든가.”
순간 무윤의 온몸이 벼락 친 것처럼 들썩였다. 부릅뜬 두 눈과 쩍 벌어진 입은 한동안 다물어질 줄 몰랐다.
천마,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야율겸이 천마?’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뇌리를 온통 헤집었다.
여휘의 세 제자 중 둘째가 야율겸이다. 첫째 은사홍에게 련주 자리를 물려줬고, 야율겸에겐 청해를 관할하도록 했었다.
물론 야율은 신강에선 흔한 성이라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왠지 진저리 쳐지는 이 떨림은 뭘까.
무윤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인해 보면 된다. 그 정도 자료는 있을 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서점이 어디 있지?”
“응? 그거야 저잣거리 우측 끝에 있잖아.”
무윤은 신형을 날렸다.
파파팟!
“나 먼저 간다.”
“응? 야! 방주 술 한잔해야지, 어디 가!”
“나중에!”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한편 아직도 무윤과 일행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 남아 있었다.
침주 하오문의 당주 연사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참 희한한 놈일세.’
침주 하오문의 골칫덩어리로 유명한 자.
숙부인 지부장 연대보에게 매일 혼나면서도 하릴없이 빈둥거리기로 유명한 이. 그런 그가 돈 될 정보다 싶어 여기에 있을 리 없다.
그냥 하후가 옆을 지나가다 얘기를 듣고는 호기심에 이러고 있을 뿐.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차라 연사구는 하루 종일 무윤을 쫓아다녔다.
그런데 전격적이라 할 만큼 민첩하게 움직이던 놈이 지금은 도시에 처음 온 촌뜨기 같은 표정으로 한참을 저러고 있다가 또 냅다 달려가고 있으니.
연사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재밌는 놈이야.’
* * *
다음 날, 청호파 장원.
염중탁은 하품을 내쉬다 대형 악무길에게 넌지시 물었다.
“방주는 아직도 그대롭니까?”
“그런 모양이다. 방에서 나오질 않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서책이기에 저러는 겁니까?”
“대부분 강호 야사라던데.”
“그거야 빤한 건데 왜 저러지?”
“뭐 알아볼 게 있는 모양이지.”
한편 방주실.
서책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무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럴 수가.’
저잣거리 책방을 다 훑어 모아 놓은 강호야사록.
그중 어디에도 척고련이 언급된 건 없다. 그런데 천마가 누군지 궁금해 살피던 순간, 낯익은 이름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천마 야율겸, 사형 은사홍을 죽이고 교주에 오름. 천마신공을 대성하고 중원을 공격하다 패퇴함. 이후 마의(魔醫)와 함께 마공을 만들어 세상에 뿌림.
야율겸은 모든 면에서 첫째 은사홍보다 뛰어났던 놈이다. 다만 중원에 대한 적개심이 너무 강해 련주에 올리지 않았다. 반란이야 여휘가 그놈보다 오래 살 테니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고.
모든 책을 다 훑어봐도 같은 내용이다. 혹시나 다른 내용이 있을까 온 서책을 다 뒤졌지만 매한가지다.
모두 몇 줄 정도만 서술된 내용이라 더 살필 것도 없다.
분노에 앞선 허탈함에 한동안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 어디에도 여휘와 척고련에 대한 얘긴 없다.
도대체 자신이 떠난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무윤은 의아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기록이 전혀 없지?’
천 년 전 역사가 아예 없다면 모를까, 야율겸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보다 수십 년 앞선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니.
그것도 강호를 최초로 일통한 데다 그런 일은 아직까지도 없었던 일인데.
‘누군가 지워 버렸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정파라 자처하는 이들이다.
당시 불문 최고였던 영흥사, 도가에선 도백, 곤륜, 화산, 세가 중엔 남궁과 팽가, 당문이 떠오른다. 다들 여휘에게 무릎을 꿇었던 이들.
이중 영흥사와 도백, 곤륜은 지금 대가 끊겼으나 무륜이 떠나고 이삼백 년간은 남아 있었다.
그러다 떠오른 다른 궁금증.
‘천마신공은 또 뭐지?’
아직도 고금 제일 중 하나로 불리는 무공.
물론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그걸 익힌 교주와 천마교는 지난 천여 년간 수십 차례 강호의 패권을 놓고 겨뤄 왔음도 알았다. 단 한 번도 중원을 점령한 적은 없지만 천 년 동안 신강에서 그 명맥을 이어 온 것도.
문득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떠올랐다.
‘야율겸! 마공을 만든 게 정녕 너였더냐?’
듣도 보도 못한 마공 이름이 나열돼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물론 자신이 떠난 후 여휘가 그런 걸 만들었을 리도 없고.
역혈과 약을 사용하는 건 다른 무공에도 있는 일이고, 색공과 채기법(採氣法, 다른 사람의 기를 흡취), 흡성요법(吸星妖法, 상대의 내공을 흡수)의 연구는 예전에도 간혹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동물의 뇌수나 시체의 기운을 이용하는 등, 이지를 상실하고 살육에 미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패악의 방법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 걸 야율겸, 그놈이 만들었다는 건, 결국 그 뿌리는 자신과 여휘가 제공한 셈이다.
속 깊은 탄식이 절로 올라왔다.
‘허! 마공(魔功)이라니!’
하지만 이 기록들이 사실인지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오랜 전통의 무가에 있을 야사를 찾아보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고.
문득 보타문주가 떠올랐다.
‘그녀라면!’
무윤이 떠날 때쯤 세워진 문파인 데다 초대 보타문주는 영흥사 출신이라 했다. 거기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아직 문주 운선과 나누고픈 법론이 있으니 그걸 핑계로 만나 슬며시 물어보면 된다.
무윤은 마지막으로 야사록을 가볍게 뒤적거렸다. 보타문주에게 가기 전 내용을 정리할 겸 해서다.
그때 문득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천마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말.
-새벽을 만나러 가는 자, 나를 볼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같잖지도 않은 말에 피식 웃고 말았던 글귀. 그런데 모든 책에 빠짐없이 그 말이 적혀 있다.
‘웃기는 소리.’
진짜 여휘라면 저런 식의 선문답을 남길 리 없다. 게다가 무언가 무공을 남겼을 거 같은 글귀인데, 신기심의공은 자신이 개척해야 하는 무공. 글로 전할 수도 없고 여휘 성격상 다른 걸 남겼을 리도 없다.
그 긴 세월 동안 누군가 지어낸 말일 터.
무에 있어선 광오한 자신감을 가진 그놈이 혹 남겼다면 이런 말이리라.
-더 오를 곳이 없는 자, 나를 찾으라.
그때 문득 무윤의 얼굴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이런!’
새벽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무륜과 여휘의 유일한 친구.
‘여단(黎旦)!’
그 엉터리 문구 때문에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지금 침주의 어떤 가문도 천 년 전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과 이어진 인연의 고리는 하나도 없다는 뜻.
하지만 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유일하게 남은 게 있다.
이곳에서 죽은 친구, 여단을 화장해 뿌린 곳.
‘망산(莽山)’.
실제 이름은 천태산(天台山)이나, 산이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다 해서 고을 사람들은 그리 불렀다.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움직였다. 이젠 아무도 옛날을 얘기할 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침주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오랜 친구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운 벗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바로 들렀어야 했는데.’
잠시 후, 염중탁은 급히 뛰어나가는 무윤에게 소리쳤다.
“방주! 어디 가?”
“친구 만나러!”
무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 하니 내달렸다.
악무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방주한테 친구가 있었나?”
“그러게요. 타지에서 누가 왔나?”
“……?”
* * *
잠시 후, 망산의 한 봉우리.
정상 부근 한 곳을 바라보던 무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있구나!’
망산은 고도가 높아 중원 남부 지방 중 유일하게 겨울 눈꽃이 핀다. 그 눈이 소담하게 쌓였던 아담한 저 바위. 저 위에서 친구 여단을 훨훨 날려 보냈다.
그 아련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천 년의 시공을 넘은 이후 처음으로 과거와 만났다.
눈가가 물기로 조금씩 촉촉해져 갔다.
‘오랜만이다, 여단!’
그렇게 한걸음에 내달려 벗을 보낸 그곳으로 올랐다.
항상 안개에 싸여 있는 이곳을 셋은 자주 오르곤 했다.
침주 흑도를 통일한 그다음 날 새벽에도 여길 올랐다.
문득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륜이 한창 글 배우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였다.
자랑하기 위해 준비한 걸 슬쩍 꺼내 들었다.
-야! 이제 방주에, 부방주, 총관인데 이름 바꾸는 게 어때? 촌스럽게 장이, 염삼이 뭐냐?
염삼이라 불리던 이가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럼 난……. 지금 같은 새벽이 좋아. 뭐 어울리는 거 없을까?
-……여단! 그게 새벽이란 뜻이야. 어때?
-야! 그거 멋있다. 좋아! 난 그걸로 할래. 그럼 장이는?
장이라 불린 여휘가 고개를 저었다.
-난 됐다. 이름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냐.
-에이! 그래도 방에 장이(張二)란 이름만 넷이야. 명색이 방주인데 헷갈리니까 이참에 바꾸자.
무륜도 거들었다.
-그래. 장이야. 너도 바꾸자.
한참 앞에 펼쳐진 안개를 보던 장이의 말문이 열렸다.
-난 저 안개를 뚫고 나오는 빛이 좋아.
-왜?
-저 투박한 안개를 뚫고 끝까지 살아남잖아. 나도 그래야 약해 빠진 너흴 지켜 주지.
-그래? 가만있자……. 아! 여휘, 그게 좋겠다. 어때?
나름 글을 아는 여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거 저녁노을 아니야?
-아니, 그건 여휘(餘暉)고 이건 여휘(餘輝), 끝까지 남아 있는 빛이란 뜻이야. 어때?
무심하던 장이의 얼굴에도 싫지 않은 빛이 역력해졌다.
-여휘? 뭐 듣기 괜찮네.
-좋아. 그럼 이제부턴 여단, 여휘라 부르는 거다. 알았지?
이제 여단이라 불릴 이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무륜아. 너도 이참에 바꾸지 그래? 네 이름 안개 낀 날 마차에 치여서 지어 준 거라며?
-아니, 난 그냥 쓸 거야.
-왜?
-그 험한 수레바퀴에 치이고도 다친 데 없이 멀쩡했거든. 그래서 액땜하라고 지어 준 이름이잖아. 혹시 알아? 이름 때문에 죽을 위기 한 번은 넘길지.
여휘가 피식 웃었다.
-미친놈! 그렇게 따지면 마지막 빛인 내가 최고 오래 살겠네.
-그래. 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아주 오래오래 살아라.
-걱정 마라. 안 그래도 그럴 거니까.
-그래, 어디 맨날 싸우는 놈이 더 오래 살지 두고 보자고.
그때 여단은 문득 든 생각에 무륜에게 물었다. 요즘 글 선생 목우(沐雨)에게 학문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는 그다.
-무륜이 넌 글이 재밌는 모양이다.
-재미? 그런 거 없다.
-응? 그럼 왜 그렇게 열심이야?
순간 무륜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우리가 영주(永州)에서 왜 도망쳤냐?
-그 얘긴 갑자기 왜 꺼내? 개새끼들이 순장(殉葬)시키려고 해서 도망친 거잖아. 빤한 걸 왜 물어?
-그 새끼들이 왜 그랬냐? 천한 우리니까 그렇게 죽어도 된다 그거잖아.
-에이! 짜증 나게 그 얘긴 왜 해?
-난 여기 와서도 그랬다. 아무리 돈이 많고 부하 새끼들이 많아져도 우리가 천한 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아니! 목우 선생이 그러더라. 불경에 있는 말인데 일체 중생은 평등해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에이! 그거야 그냥 하는 소리 아냐?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부처님 주변에 유명한 스님들은 천민 출신들이 많더라고. 심지어 창녀도 있어.
-헉! 정말?
-그래. 목우 선생이 어떤 얘길 해 준 줄 알아?
-어떤?
-현우경(賢愚經)이라는 불경에 있는 건데, 부처님이 지나가는데 똥을 끼얹은 천민 얘기야.
-헉! 바로 목이 달아났겠네?
-아니, 부처님은 그자와 같이 목욕했어. 그리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랬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좀 어려운 말인데 쉽게 풀면, 진리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뭐 그런 뜻이야.
듣고 있던 여휘가 물었다.
-그래서 넌 중이라도 되려고?
-미쳤냐? 난 고기 없인 죽어도 못 살아!
-그럼?
-우린 천하지 않아. 그걸 부처님이 증명하셨듯이 나도 할 거야.
-어떻게?
-무공!
-무공?
-그래. 여휘 네가 있으니까 우린 가진 새끼들이 가진 무공보다 더 좋은 걸 만들 수 있어. 그걸로 증명해 보이는 거야. 우리가 천하지 않다는 걸.
여휘의 눈이 반짝였다.
-그걸 만들면 세상이 우릴 천하게 보지 않는다?
-당연하지. 어때? 해 보는 게?
처음으로 여휘의 눈에 불꽃같은 정광이 활활 타올랐다.
-무조건 한다. 당장!
-……!
그렇게 시작된 무공 만들기는 결국 그 끝을 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천 년 후에 이렇게 될 줄이야.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