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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0화 (10/161)

10화

청호방 본청.

방주 곡정필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벌써!’

피투성이가 된 채 걸어오는 놈 뒤로 천천히 따라오는 부하들의 모습이 상황을 알렸다.

숨죽인 시선 모두 놈의 일거수일투족에 미미하게 떨린다.

죽음의 경고가 곡정필의 뇌리를 휘저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눈빛은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형언할 수 없는 후회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 즈음, 그저 드는 생각은 하나다.

‘살고 봐야 한다. 어떻게든.’

방주 자리 같은 건 지금 관심도 없다. 살기 위해선 우선 놈의 화를 가라앉히는 게 급선무.

짐짓 자조적인 목소리를 흘렸다.

“물러날 때가 된 걸 몰랐군.”

무윤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죽일 놈과는 말이 필요 없다.

그냥 처절하게 보내면 된다.

바람을 탄 주먹이 그의 안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퍽! 우득!

“커억!”

곡정필은 눈을 껌벅이지도 못했다.

얼굴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뿜어진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다시 올려진 손이 연달아 뺨과 관자놀이에 닥쳐 왔다.

쉬익! 쫙! 빠각!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몸이 부들거렸다.

“사, 살려……! 커억!”

쉴 새 없이 좌우로 휘둘러진 손은 연신 타격음을 불러왔다.

휘익! 우둑! 철썩! 빠악!

“커억! 쿨럭!”

거친 기침과 함께 부러진 이와 울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퍼억! 우둑!

“쿠억!”

그렇게 수십 번의 손짓이 허공을 수도 없이 갈랐다.

모두의 시선에 죽음의 공포가 흐르던 어느 순간.

곡정필은 전해지는 엄청난 격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두 눈이 점점 멍하게 풀리다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투욱!

“……!”

상황은 종료됐다.

반 시진 후, 하후가와 주변 흑도를 살피던 백칠십 명이 돌아왔다.

이미 피비린내 나는 주변을 본 데다 방주파 핵심은 바닥에 다 널브러져 있다.

눈치를 보던 이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을 즈음.

무윤의 묵직한 음성이 장원에 흘렀다.

“방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테니 긴말 않겠다. 나설 놈만 나서라. 날 꺾는 자가 방주다.”

“…….”

이미 방도들은 알음알음 옆에서 주워들었다. 감춘 실력이 일류 끝자락이란 걸. 여기서 무윤을 상대할 이는 없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악무길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목청을 높였다.

“나 악무길, 그대를 방주로 모시겠소.”

여럿이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나도 그러겠소.”

얼마 후, 빤한 승복의 절차가 끝나자 무윤은 방주가 숨겨 둔 돈을 다 꺼내 모두에게 보였다.

예전 수차례 조직을 정리할 때 경험이다. 처음엔 숫자보다 반목의 씨앗을 없애는 게 먼저다. 돈이야 조직이 있는 한 다시 벌 계책은 머리에 널려 있다.

“방주로서 첫 명령이다. 떠날 사람은 지금 나와라. 그냥 보내 주겠다. 전별금은 조장 은자 열 냥, 그 밑은 다섯 냥이다.”

친방주파였던 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이미 낙인찍힌 자신들이라 끝이 좋을 리 없다.

거기다 은자 다섯 냥이면 대략 쌀 서른 석, 말단인 경우 약 이 년 치 벌이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몇몇이 눈치를 보다 앞으로 나섰다.

“정말 돈을 주시는 게요?”

이럴 땐 말보다 행동이다. 인원에 맞게 돈을 툭 내던졌다.

투욱! 턱!

“그동안 고생했다. 침주에서 다시 보는 일은 없어야겠지.”

“알겠소.”

그러자 이십여 명이 더 나와 돈을 받고는 뛰어나갔다.

장내 상황이 정리되자 무윤은 악무길에게 시선을 건넸다.

“이젠 부방주라 불러야겠지?”

“그리하리다.”

무윤은 적운문에 건넬 돈을 떼 내고는 악무길에게 내밀었다. 불안해하는 이들을 다스리는 덴 이게 최고다.

“알아서 나눠 줘.”

악무길의 반문은 절로 나왔다. 이 정도 돈이면 말단에게도 은자 열 냥씩은 돌아간다. 조장이면 이삼십 냥이고.

“이걸 다 말이오?”

“또 벌면 되지.”

“……괜찮겠소? 다시 모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

“그렇게 안 걸려. 걱정 마.”

“……?”

얼마 후, 희희낙락한 얼굴로 다들 돌아가고 악무길 의남매만 남았다. 적묘예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절로 올라왔다.

자신들끼리 있을 때는 말을 놓기로 했다.

“방주,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돈 벌 방법은 많다.”

“정말?”

“바로 보여 주면 되잖아.”

“진짜지?”

무윤은 다음 할 일을 꺼내 들었다.

“부방주하고 중탁이는 나랑 하후전장으로 가자.”

“거긴 왜?”

“전표로 바꿔서 적운문에 갖다주려고.”

“줄 거면 그냥 주지 전표는 왜?”

“우리가 상납한 걸 다른 방파에서 아는 게 좋아.”

염중탁은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렇군. 방주가 바뀌자마자 남은 돈을 상납한 걸 사방이 알면 적운문도 딴짓하긴 뭐하지.”

통상 자리가 잡힌 흑도 두목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로 수장이 바뀔 때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자리에 올리고 싶은 인물이 적운문 주변엔 하나둘이 아니니까.

적묘예는 문득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

“근데 지금 가도 괜찮을까? 좀 지나서 가는 게 어때?”

“시간 끌면 다른 생각이 많아진다. 이게 최선이다.”

기억을 살펴보면 적운문주 설도승은 지극히 몸을 사리는 자다. 정파 무인들이 대거 침주에 와 있는 지금은 특히 그럴 테고.

이런 자에겐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나중에 물어뜯을 놈이 아니란 걸 보여 주는 것.

그러자면 너무 당당해도 안 되고 무조건 낮춰도 잡아먹힌다. 그냥 놔두면 별일 없되, 건드리면 귀찮아질 놈 정도가 딱 좋다.

아직 이 몸뚱이로 어떻게 살지 정리가 안 된 상황.

지금은 몸을 만들고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게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지막 남은 위험을 없애야 한다.

반 시진 후.

적운문 문주실.

이미 동향 보고는 시시각각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주 설도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싸워 누가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주가 된 놈 싹수를 살피고 죽이든 살리든 하면 되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다.

“하후가가 뒷문을 열어 줬다?”

“예, 형님. 더 알아보겠습니다만 아마도 무윤 그놈이 다른 정파 사람들도 있으니 사정을 이야기하고 살려 달라고 빌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기보다 약은 놈 같은데요.”

“그래도 이상해. 소가주 천기 그놈이 자기 체면을 구긴 자를 도와준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야 별수 있었겠습니까?”

“더 알아봐라. 뭔가 좀 찜찜해.”

“알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문주님, 무윤 그놈이 두 놈만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문주 설도승은 서늘한 눈빛을 흘렸다.

“호! 그 사고를 치고 바로 온단 말이지.”

이런 일이 벌어지면 대부분 몸조심하다가 조직을 안정시켜 놓고 찾아오는 게 보통인데 급하게 오는 건 둘 중 하나다.

자신감이 지나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

문주 설도승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보면 알겠지.’

결정도 그때 하면 된다.

잠시 후, 궤짝을 들고 찾아온 이가 가만히 고개 숙였다.

문주 설도승의 호기심 가득한 눈이 무윤을 향했다.

“사고를 쳤다고?”

이럴 땐 아주 미미하게 몸도 떨어 줘야 한다.

“저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정은 이미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런 것까지 이해해야 하나?”

“그래서 여쭈고자 왔습니다. 문주님 눈에 차려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미 눈 밖에 났는데 그럴 수 있을까?”

무윤은 가지고 온 전표를 공손히 건넸다.

“전 방주가 뒷돈을 챙겼더군요. 여기 있습니다.”

한데 문주에게 다가가 전표를 앞에 내려놓는 순간, 등줄기를 서늘하게 내리는 전율이 일었다.

‘이건!’

당혹감 서린 눈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문주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절정 끝자락이나 초절정 초입이라 했는데.’

놀란 건 그가 은근히 뿜어낸 내력 때문이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게 하는 또 다른 무형의 압박이 있다.

신기심의공 초감각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었던 기운.

감춘 게 많은 자는 곧 웅크린 짐승임을 뜻한다.

식은땀 한 방울이 귓전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을 수도 있다.’

무윤은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제일의 조직을 거느렸던 자신감이 가져온 어이없는 실책. 지킬 힘이 없을 때는 더 살피고 살폈어야 하는데 이 몸뚱이의 기억을 너무 믿어 버렸다.

한편 문주 설도승의 입가엔 피식 웃음이 흘렀다. 호기심 어렸던 눈빛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가까이 다가와 저절로 떨어 대는 저 몸짓은 무윤의 간 크기를 제대로 알려 줬다.

결론은 쉽게 났다.

‘적당한 놈이군.’

문득 문주 설도승은 궁금한 게 떠올랐다.

“하후가가 뒷문을 열어 줬더군.”

“불문 진경을 보타문에 주고 부탁했습니다.”

“진경?”

“우연히 얻은 게 있습니다. 아주 옛날 것이라 혹시나 해서 가져갔는데 진짜였던 모양입니다.”

사실관계야 알아보면 될 일. 이제 더 궁금한 건 없다

“운이 좋았군그래.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지.”

“감사합니다.”

뒤돌아 나오는 입가에 남모를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잠시 후, 적운문 입구.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무윤에게 두 사람이 달려왔다.

타다닥!

성미 급한 염중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조장, 아니 방주, 잘됐어?”

“그러니까 나왔지.”

“휴! 다행이다 정말.”

무윤은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놨다.

“천만다행이지. 호랑이 아가리인 줄 모르고 머릴 처넣었으니.”

“그런 줄 알고 갔으면서 이제 와서 뭔 소리야.”

“해 본 소리야. 그만 가자고.”

염중탁은 사방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크크! 이제 정말 우리 세상이네. 제대로 놀아 보자고.”

그제야 주변에 있던 다른 흑도 방파의 숨은 눈들이 사라졌다.

아쉬운 표정이 다들 역력했다.

몸성히 나온 건 적운문이 방주로 인정한다는 뜻. 이러면 뜯어먹을 게 없어진다.

무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위복인가!’

과거의 기억을 다 더듬어도 알 수 없는 기운이다. 아무리 천 년이 지났다지만 고작 초절정 언저리에 있는 자의 것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하지만 그 덕분에 몸이 떨렸고, 웅크린 짐승의 예리한 눈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무윤의 치켜든 시선이 저 먼 하늘을 향했다.

오늘따라 짙은 구름 뒤에 반짝이는 별빛이 칼날이 되어 가슴에 뿌려진다.

지그시 깨문 어금니 사이로 뜨겁게 달궈진 숨이 뿜어졌다.

‘다시는!’

한 번의 실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과거에도 충분히, 아주 충분히 경험했다. 더는 겪고 싶지 않은 일.

그 굳은 결심에 앞에 닥친 일들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청호방 조직을 정비하고 안주하는 척해야 할 것이고.

신기심의공을 몰래 익혀야 하는 것에서부터, 과거 척고련의 기록도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이 몸에 엮인 과거를 어떻게 정리할지도.

그 외에도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갈 즈음, 침주 시내를 돌아보던 무윤의 눈에 회한이 젖어 들었다.

천 년 전 열다섯에 흘러 들어와 이십 년을 보낸 곳.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다 있는 거리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때를 떠올리게 할 만한 것이 없다. 건물이나 거리야 그렇다 쳐도 언덕이나 나무 정도는 있으리라 여겼는데.

모든 게 변했다. 그중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게 있다.

‘수로.’

침주 시내 곳곳을 관통하는 거대한 수로는 한두 개가 아니다. 너비가 다섯 장은 족히 넘는 거대한 물길이 사방에 흐른다.

잠시 멍해 있는 무윤에게 염중탁이 물었다.

“왜 그래? 뭘 그렇게 봐?”

“그냥. 보면 볼수록 대단해서. 어떻게 이런 수로를 만들었는지.”

염중탁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수로? 뭔 헛소리야? 그냥 있는 강줄기 보고.”

“응? 이런 강줄기가 천 년 동안…… 아니 그냥 생겼다고?”

“방주, 왜 그래? 이거 옛날부터 있던 건데.”

“그래도 아주 옛날에는…….”

염중탁은 한심한 듯 혀를 찼다.

“뭔 개소리야! 눈이 삐었어?”

“응?”

“보라고. 이걸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 지금 침주 사람 다 나선다 해도 백 년은 걸리겠다. 안 그래?”

“……?”

다시 쳐다보니 그 말이 백번 맞다.

내 눈에만 인공의 수로로 보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 낸 작품, 강의 지류일 뿐이다.

어안이 벙벙해진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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