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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9화 (9/161)

9화

“신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 할 듯합니다.”

대략 현세의 불교 상황을 파악한 무윤은 아쉬움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더 시간을 지체하긴 어려운 상황.

“오! 그런가. 이거 아쉽군. 오랜만에 법론에 심취했거늘. 더는 어려운 겐가?”

“이제 청을 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이런 귀한 걸 얻고 그냥 있을 수 없지. 돈이건 뭐건 말씀하시게. 내 힘닿는 데까지 함세.”

무윤은 원하는 걸 알렸다.

“뒷문으로 조용히 나갈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어안이 벙벙한 운선은 눈만 껌벅였다.

“뭐라? 조용히 나가게 해 달라? 그것뿐인가?”

“그렇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지금 저희에겐 그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이미 진서연에게 대략 상황은 들은 터. 잠시 생각하던 운선은 진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떠나는 겐가? 아니면?”

“부처님 뜻 아니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운선의 눈이 깊어졌다.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둬도 될 이가 아니다.

“대략 사정은 들었네. 그런 일이면 내가 나설 수도 있어.”

수백 년 전에 없어진 진경이라면 그 가치야 불가에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거기에 절강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문파가 보타문인데 그런 문주에게 더 받아 낼 게 왜 없을까.

이들에게 목숨을 구걸해도 된다. 하지만 자존심이 용납지 않을뿐더러, 당장 여길 떠날 게 아닌 이상 그 이후가 더 문제다.

‘내 손으로 해결하는 게 최선.’

내게 칼을 들이민 자를 남의 힘으로 해결하면 항상 뒤끝이 남는다. 더군다나 흑도인 자신들인데 보타문이라면 더욱이.

사파 적운문은 물론 여기 하후가도 껄끄러워할 일이다.

지금은 미래를 위해 큰 빚으로 남겨 놓는 게 좋다.

“지금은 그거면 됩니다. 정 그러시면 나중에 들어주실 수 있는 부탁을 드리지요.”

운선은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나가서 뭘 하려는지 빤하니까.

“우릴 따라가는 건 어떤가?”

“세상 사는 법은 다 따로 있잖습니까? 나서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구함이겠으나 나중엔 독이 될 것입니다. 흑도란 그런 곳인 걸 잘 아시잖습니까?”

운선은 한참을 고심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네. 언제고 꼭 들르시게나. 잊지 않고 있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은.”

알려져서 무윤에게 좋으리란 법이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리하지.”

얼마 후, 운선에게 불려 온 소가주 하후천기는 눈을 껌벅였다.

“뒷문 말입니까?”

“그러네. 조용히 내보낼 수 있겠나?”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그리만 해 주시게. 부탁하지.”

하후천기는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알겠습니다. 근데 저자가 알고 있던 진경은?”

“다 엉터리는 아니더군. 한두 개 얻은 건 있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어디서 우연히 얻은 게 있는 모양일 터, 그 정도라면 더 관심 가질 건 없다.

잠시 후, 무윤과 일행이 뒷문으로 사라지자 진서연은 운선에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전 지금도 멍하네요.”

“나도 그렇단다.”

“어찌 보셨어요? 교리가 오래전 거 같던데.”

“그러게 말이다. 아는 것 전부 수백 년 전의 것이야. 최근 교리는 하나도 모르더구나. 저 시주도 그렇고 전한 이가 누군지 정말 궁금해. 몇 번 더 만나 보고 싶거늘.”

진서연도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따라가 볼까요?”

“아니다. 그 시주 말대로 우리가 껴들 게 아니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문주 운선의 눈이 깊어졌다.

“아는 자가 그리 말했다. 스스로 풀어야 할 일인 게야.”

“……!”

진서연의 호기심 가득한 눈은 무윤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향했다.

흔한 흑도 파락호 중 조금 강할 뿐 별다른 게 없는 자. 그런데 그런 자가 보인 사상(思想)의 눈빛은 누가 가르쳤다고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불자와 무인의 길을 동시에 가기 어려움을 절감하는 자신이다.

구도자로서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이제 무인의 길을 선택하려 할 즈음, 다시 길을 고민하게 만든 자.

‘뭘까? 저런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가.’

그걸 안다면 좀 더 자신의 길도 명확해지리라.

진서연은 기회가 된다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한편 연무장에서 마냥 기다리던 단목철진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이 새끼! 왜 안 나오는 거야?’

일각 후, 침주 시내, 청호방 본거지.

방주 곡정필의 눈초리가 심하게 가늘어졌다.

“아직 연락 없어?”

무윤 일행이 하후가에서 나오자마자 공격한다는 첩보에 역공을 준비한 상태다.

“걱정 마시지요. 하후가 앞으로 백이 갔습니다. 다섯 놈 처리하는 거야 장난이죠.”

“다른 방파 살피러 간 놈들은? 거기도 연락 없어?”

“예, 전혀 없습니다. 아무래도 헛소문 아닌가 싶은데 병력을 뺄까요?”

“아니! 혹시 모르니 그대로 둬.”

이백의 부하 중 신뢰할 만한 백 명은 하후가 앞에, 무윤과 악무길 쪽에 설 것 같은 칠십은 전부 다른 흑도를 감시하러 보냈다.

그때 커다란 고함이 방주실 뒤에서 울렸다.

“놈이 담을 넘어왔다!”

“막아라!”

“이런 시팔! 하후가로 간 새끼들은 뭐 한 거야?”

분명 하후가 앞엔 백여 명이 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몰래 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야! 이 새끼야! 뭐 해, 우선 막아!”

“에이! 정문에 있는 놈들이나 빨리 불러요!”

방주 측근인 고태승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았어!’

현재 방엔 고작 삼십이 있을 뿐이다. 방주 측근 정예들 또한 하후가에 가 있는 상태.

한편, 방주실 뒤편 공터.

무윤은 서로 눈치를 보는 여섯 명에게 나직이 말을 흘렸다.

“비켜라. 방주와 따로 보면 된다.”

방주의 오른팔 격인 섭여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 배신이나 하는 주제에 무슨 말이 많아!”

“더 말 안 한다. 막으면 죽이고 간다. 결정해.”

“크크! 다섯이서 뭘 하겠다고. 떠들지 말고 그냥 와.”

“그러지.”

속전속결이 이번 싸움의 승패다.

방주 측근 몇만 없애면 나머지는 대세에 따를 자들.

그 첫 번째 목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휘익!

섭여추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

정문에 있는 인원들이 곧 온다. 저놈과 뒤의 조장 넷만 처리하면 이 반란은 끝이다.

“개새끼! 그렇지 않아도 손보고 싶었다.”

섭여추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극에 맺힌 서늘한 예기가 무윤을 향했다.

슈우욱!

순간 악무길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위험해!”

검 끝을 향해 바로 짓쳐 드는 무윤 때문이다. 삽시간에 검과 맞댄 얼굴이 뚫릴 상황.

휘익!

무윤은 공격 투로를 떠올리지 않았다. 심장의 무공, 신기심의공은 간격을 좁힌 상황에선 몸에 의지만 더하고 머리는 비워야 한다.

그래야 초극의 몸짓을 부른다.

섭여추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힐 찰나,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무윤의 몸이 비틀렸다.

파팟!

“엇!”

섭여추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릿발 같은 검 끝에 무방비하게 다가오던 몸이다.

그런데 아래로 푹 떨어지는 순간 시야에서 잠시 놓쳤다.

바로 뇌리에 경고음이 울렸다.

‘다리!’

무릎 아래에서 무윤의 몸이 풍차처럼 회전했다.

휘리릭!

허리 반동의 힘이 발에 실려 섭여추의 발목을 후려쳤다.

빡!

단발의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욱!”

섭여추가 흐트러지는 몸을 바로잡기 전 무윤의 손이 시린 칼 빛을 뿌려 댔다.

휘익!

옆구리에 커다란 혈선이 그어지자 절로 신음이 내뱉어졌다.

“우욱!”

무윤은 베어진 옆구리에 다시 칼을 박아 넣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푸욱!

“크윽!”

흑도의 싸움은 이래야 한다. 죽일 땐 피를 뒤집어쓰고 악귀가 돼야 한다. 차디찬 한기를 실은 눈알을 번득여야 그 서슬에 다른 이들이 물러난다.

다만 광기와 흥분을 보여선 안 된다. 이 모든 살기의 원천은 오직 배신에 대한 응징일 뿐, 싸움에 대한 긴장과 흥분, 끓어오르는 분노와 격정이 아님을 보여야 한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썼음에도 냉철한 이성만이 행동의 근원임을 알려야 진정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남는다.

그 마음 담아 몸 깊숙이 넣은 칼날을 휘저어 그어 댔다.

슈욱! 빠각!

“크아악!”

고통을 참지 못한 단발의 비명이 처절함을 토했다.

무윤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온몸을 적실 때까지 악귀의 눈으로 사방을 훑어야 한다.

섭여추의 입에서 왈칵 피 분수가 뿜어졌다.

“크윽!”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려는 순간, 허리에서 빠져나온 칼끝이 목울대를 쑤셨다.

푸욱!

섭여추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눈동자가 멍해졌다. 고통도, 아픔도 의식과 함께 사라져 갔다.

몸이 허물어져 갔다. 두 팔을 올려 뭔가를 잡으려고 허우적댔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

의식을 잃음과 동시에 육중한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쿵!

“…….”

도우려 뛰어들던 악무길의 간담도 서늘해졌다.

‘이런 건.’

흑도 바닥에 분노와 광기로 저러는 놈들이야 수없이 많다.

하지만 피 칠갑을 했음에도 생각을 알 수 없는 저 무심한 표정, 그저 북풍한설의 차디찬 냉기만 느껴지는 이런 모습은 진정 처음이다.

그저 떠오른 생각. 한 수 아래라 여겼던 자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정말 몰랐다.

‘무섭다.’

하물며 같은 편인 그가 이럴진대.

상대편 모두의 걸음이 절로 뒷걸음질 쳐졌다. 인간의 본능이다.

두려움에 휩싸인 자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뭐, 뭐야!”

“나, 난! 저렇게 뒈지고 싶진 않아.”

“그럼 어쩌자고!”

그때 묵직한 무윤의 음성이 흘렀다.

“그대로 있어라.”

“…….”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

그때 방주의 측근인 고태승이 날아들었다.

휘리릭!

“이 새끼들아! 뭐 해! 안 조지고!”

“…….”

숨죽인 시선들의 고개가 절로 떨구어졌다.

고태승이 눈을 부라리려던 순간, 피 칠갑이 된 얼굴로 달려드는 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파팟!

‘놈이다!’

고태승은 진각을 울림과 동시에 칼바람을 냈다. 바람을 가르고 머릴 들이미는 미친놈에겐 그래야 했다.

준비도 없이 다가오는 어설픈 동작이다.

섭여추처럼 고태승도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쉽게 끝나겠어.’

사람의 피는 상대의 이성을 흔들고 흥분케 한다. 거기에 자신까지 피투성이가 되면, 시쳇말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지금 무윤의 모습이 딱 그렇다.

고태승은 단숨에 기세를 끌어올려 검을 쭉 내질렀다.

슈우욱!

무작정 짓쳐 드는 놈의 정면을 겨누는 척했다가 비틀어 옆구리를 쑤시면 끝이다.

무윤의 투박한 몸이 안으로 파고들던 찰나, 고태승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헉!’

전혀 예상치 못한 빠름이 공간을 접었다. 칼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슈욱!

아직 검으론 초극의 움직임이 불안한 상태.

무윤의 모든 결정타는 손발이다.

빠름에 무거움을 더해 쭉 내질렀다.

샤악!

고태승은 본능적으로 공격 대신 뒤로 몸을 날렸다. 무인의 경험이 알려 준 경고를 따랐다.

그렇게 사정권을 벗어났으리라 여길 즈음, 기다란 발길질이 호선을 그렸다.

파아악!

“웃!”

절로 지은 경악성이 고태승의 다급함을 알렸다.

낮게 움직여 차올린 발이 관자놀이를 찍었다.

빡!

“커억!”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몸이 휘청거렸다.

트득!

‘피해야 한다.’

직감과 함께 빠르게 뒷걸음질 치려던 순간, 고태승의 놀란 시야에 피범벅이 된 얼굴이 다가왔다.

목울대를 움켜잡은 감각이 느껴질 찰나.

푸욱!

“우욱!”

배를 쑤셔 대는 차가운 금속의 한기가 전율을 불렀다.

‘언제?’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우드득!

뒤틀려진 목뼈가 의식을 떠나보냈다. 허망한 눈빛 그대로 무너진 무릎이 몸을 축 내려뜨렸다.

투둑!

“…….”

모두의 입은 물론 발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무윤의 묵직한 숨이 차가운 한기를 풀어냈다.

“더 할 놈 있나?”

“…….”

그 서슬에 쫓아 들어온 자들도 주춤주춤 멈춰 섰다.

터덕! 탁!

같은 편임에도 눈에 두려움이 새겨졌던 악무길은 복잡한 심사를 담아 긴 한숨을 뿜어냈다.

‘끝났어.’

아직 방주가 남았지만 주색잡기에 빠져 버린 그야 한주먹 거리도 아니다.

악무길은 문득 아까 무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유한 표정으로 낭랑히 진경을 읊어 대던 그 모습이.

‘같은 사람인가?’

진정으로 드는 의문이었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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