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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8화 (8/161)

8화

보타문주 운선의 호기심 어린 말문이 열렸다.

“그대는 어디서 그런 불호를 들은 겐가?”

천 년 전 그때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전이다

일부 선각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지던 시절인데, 침주에 있을 때 글 스승 목우(沐雨)가 불경 몇 개를 알려 준 게 배움의 시작이었다. 그 후엔 천축, 서역과 가까운 신강에 있었기에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당연히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범어 원어로 이야기하던 시절이다. 그 익숙함에 범어로 불호를 꺼낸 것인데.

그제야 이전 무윤의 기억에 있는 유일한 불호가 떠올랐다.

‘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지만 그 외엔 불가와 관련된 기억과 지식이 하나도 없다. 급히 생각난 대로 둘러댔다.

“불경을 가르친 스님께서 그리하셔서 그만.”

“오! 그래. 어떤 분이시기에 아직 범어를 쓰실까 궁금하구나.”

“지금은 귀천하셨습니다.”

“이런! 혹 법명을 아는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진경을 알려 주기만 하셨습니다.”

“범어로 말인가?”

“예.”

문주 운선의 눈이 반짝였다.

그저 짧은 말 하나만 알고 자신을 현혹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가만히 말을 덧붙였다.

“혹 기억나는 게 있는가?”

“몇 개 있습니다만.”

“들어 볼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예정에 없던 변수가 생겼다.

‘기회다.’

하후가 일이 마무리된 이상, 이제 남은 건 방주 곡정필.

보타문주에게 환심을 살 수 있으면 작은 부탁 하나 정도는 가능할 터. 그것으로 방주 패거리를 잠시 따돌릴 수 있다. 그 잠시가 성패를 가를지도 모른다.

무윤은 기억을 떠올리고는 가만히 읊조렸다. 이 상황에선 당시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진언이 필요할 때.

“옴 삼매야 따 밤, 옴 삼매야 살다밤, 옴 아라남 아라다,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매야 바라베 사야훔~.”

한참 동안 몇 개의 진언이 흐를 즈음.

의아한 모두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어쩌다 한두 줄 귀동냥한 줄 알았는데 일각이 흐르도록 낭랑한 진언이 끝도 없이 흐르니.

그러던 어느 순간 놀란 진서연의 눈이 문주 운선을 향했다.

‘설마!’

방금 시작된 내용은 그녀도 처음 들어 보는 진언이다. 혹시 엉터리일까 싶어 표정을 살핀 것인데 문주 운선의 표정은 진중하기 그지없다.

그 엄중함에 아무도 껴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더 흐를 무렵, 문주 운선의 침중한 불호가 입가에 흘렀다.

“나무아미타불! 허! 여기서 귀인을 만날 줄은 몰랐구나.”

모두의 놀란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소림, 아미와 더불어 중원의 대표적 불가의 문주가 귀인이라 칭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누구보다 궁금한 진서연이 나섰다.

“문주님, 그 말씀은?”

“분명 영흥사에 있던 법석을 여는 진언이야. 한데 화재로 거의 소실된 것인데 어찌 이 시주가 아는지 모르겠구나.”

이러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수 있다. 예전 가장 친했던 중이 영흥사 주지였던 반각이다.

“알려 주신 스님께서 영흥사를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허! 그런가. 이미 수백 년 전 불타 버린 곳이거늘!”

무륜은 당연히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영흥사가 소실됐습니까?”

“그리됐지.”

“어쩌다가?”

운선의 눈가에 아련함이 담겼다.

“긴 세월 탓이지. 그동안 변란에 강호 일에……. 하여간 그리됐네. 한데 혹 다른 진경도 아는 게 있는가?”

“몇 개 더 있습니다만.”

“그래? 그럼 전해 줄 수 있겠나? 부탁하네.”

“어렵지 않습니다만 저도 청할 게 있습니다.”

문주 운선의 눈이 깊어졌다.

“귀한 진경을 얻는 것이거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면 그리하지. 무엇인가?”

“진경을 적어 드린 후에 말씀드리지요. 청을 들어주실지는 문주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허! 그 후에 결정해도 된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닐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운선은 진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알겠네. 그럼 내 거처로 가지.”

“예.”

단목철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천한 버러지 한 마리였는데. 보타문의 문주가 저리 관심을 가질 정도라니 기가 찰 수밖에.

자신도 보타문주과 따로 자리한 적이 없다.

‘너 따위 새끼가 감히!’

소가주 하후천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도대체.’

다른 이도 아닌 보타문주가 저러는 건 뭔가 있다는 얘기다. 한데 분명 흑도의 일개 졸개인 놈인데.

어쨌든 지금은 상황을 예의 주시할 때. 끝나고 나올 때까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놈이다.

남은 자들도 수군거렸다.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파락호 저놈이 읊은 게 정말 귀한 진경이야?”

“우리가 어찌 알겠나. 한데 문주께서 그 정도 모르실 분이 아니잖아.”

“그래 봤자 어디서 운 좋게 몇 개 들은 거겠지.”

단목철진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진경을 읊던 그 표정은 어제 두려움에 떨던 그놈이 맞는지 자신도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지금 걱정은 하나. 병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놈이 보타문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단목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겠지.’

들은 몇 가지 말을 고승처럼 읊어 대는 건 사기꾼이면 가능한 일. 하지만 글을 써 내려가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오랜 연습과 학문의 깊이 없이는 어설픈 티가 무조건 날 터.

그걸 못 알아볼 보타문주가 아니다.

서늘한 눈빛이 절로 흘렀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다.

‘감히 보타문주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다니.’

그 사실이 드러나면 다시 놈을 손볼 명분이 된다.

‘나오면 그때!’

하후가 별원.

종이에 진언을 옮겨 적던 무윤은 인상을 찡그렸다.

“저, 죄송한데 다시 쓰면 안 되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필체만큼은 자부하던 자신인데 이놈의 손이 익숙하지 않다. 자신의 눈엔 개발새발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러나? 틀린 글자라도 있는가?”

“오랜만에 쓰는 것이라 손이 익숙지 않아서 그럽니다.”

“알겠네. 다시 쓰시게.”

그렇게 십여 차례 쓰던 종이를 구기고 다시 써 내려갈 즈음.

‘종이라! 그것참 좋구먼.’

거친 대나무 죽간 위와는 전혀 다른 질감이 절로 입가에 미소를 만든다. 처음 접하는 종이라 매끄러운 감에 낯선 것도 잠시, 마음대로 놀려지는 붓끝에다 적당히 스며드는 먹이 생각한 필체를 만들어 냈다.

가벼운 흥분이 입가를 떨게 만든다. 글 쓰는 게 이리 즐거운 일이라면.

‘이번 생엔 학자로 살아 보는 것도 괜찮겠어.’

그때 문득 무윤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의 가문인 천가장은 이곳 침주에서 북쪽으로 약 이백 리 떨어진 뇌양(耒陽)에 있다.

종이를 세상에 알린 환관 채륜(蔡倫)의 고향이기도 한 곳.

그곳에서 종이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가문이 바로 자신의 천가장이다.

가족이란 자들이 있는 그곳. 하지만 고아로 평생을 살아온 무륜에게 혈연이란 낯설기만 할 뿐.

거기에 아픈 상처도 있다.

딸처럼 키웠던 월소려, 그녀와도 마지막은 좋지 못했으니.

무윤은 바로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우선 여기 일에 집중할 때다.

한편, 구겼던 종이와 지금 필체를 번갈아 살피던 운선의 눈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어찌!’

처음 필체도 웬만한 유생 못지않은 필력이거늘, 지금은 용사비등이란 말 그대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유려하다. 거기에 필체가 예서(隸書)체다. 과거 수백 년 전에 주로 쓰이던 필체.

그건 저 진언이 불타 버린 시점과도 비슷했다.

진언의 내용에, 한 획 한 획에 담긴 필력도 그렇거니와 서체까지 모든 것이 진경이 사실임을 알린다.

의아함에 물든 문주 운선의 전음이 진서연을 향했다.

-이 시주가 진정 파락호가 맞느냐?

-분명 여기 청호방이란 곳의 조장이 맞아요. 근데 그런 자가 어떻게 저런 글씨를…….

진서연 또한 필체에 놀라긴 마찬가지. 뛰어나다 할 순 없으나 시서예화도 그녀의 관심거리 중 하나이니.

운선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예전엔 아니었을 것이다. 저 필체는 나도 쉽지 않은 수준이야.

진서연의 놀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운선의 필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그 정도란 말씀이세요?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여간 지켜보자꾸나. 얼추 끝난 거 같으니.

잠시 후, 무윤은 긴 한숨과 함께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다 됐습니다. 살펴보시죠.”

글을 살피던 운선의 은은한 미소가 더 짙어졌다.

자신은 중원 대법회차 소림으로 가는 길.

이 진경이면 이번 법회에서 부처님과 보타문의 이름이 더 커질 것은 자명한 터.

“이미 다 살폈네. 귀한 진경임을 내 인정하지. 그래서 몇 가지 해석을 묻고 싶은데 괜찮겠나?”

“들은 게 적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는 것만 알려 주시게.”

그렇게 시작된 법론은 반 시진가량 계속됐다.

하지만 토론 내내 무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허! 불타의 말씀도 이리되다니.’

무륜은 당시 불교를 처음 접한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천지개벽이었지.’

무륜과 여휘, 그리고 여단은 당시 관행적 풍습이던 순장(殉葬)을 피해 달아난 죄인이었다. 산 채로 사람을 묻어 버리는 그 악습을 피해 도망 다니다 이곳 침주에 정착했었다.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당시엔 순장을 피해 달아난 건 씻을 수 없는 죄였으니까.

그런데 약 이백 년 전쯤 공자(孔子)란 분이 세상에 나와 부르짖었다. 순장은 천인공노할 죄업이라고.

공자 사후 그의 철학이 통치 계급의 학문이 돼 버리고 강력한 위계질서와 중앙집권적인 사회조직을 권장하는 쪽으로 집중됐지만 그런 건 무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이 존경하는 공자란 분 때문에 자신이 평생 죄인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거기에 그 후 학문을 접하고 난 뒤 알게 된 불교의 교리.

-세상 모든 만물의 본성은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다

태생이 천민인 자신도 고행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랬던 불교 또한 천 년이 지난 지금, 그때와는 천양지차로 변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음도 이해는 간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는데 변화는 불가피했겠지.’

지금 불교는 유교와 노장사상이 섞여 중원의 색채를 강하게 띤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무윤은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잘되고 못됨이 아니다.

‘불타의 진언만큼은 낮은 이들의 것으로 남길 바랐거늘.’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건 자신의 바람일 뿐, 공자나 불타의 가르침처럼 세상에 널리 퍼진 사상이 그리 돌아갈 수 없음도 안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한편, 진서연의 멍한 시선은 토론 내내 무윤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 놀란 건 무윤이 가진 불가의 지식 때문이다.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사안이 주제로 올라오기도 했으니.

하지만 문주 운선과의 날 선 토론이 끊이질 않고 이어지던 중에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럴 수가!’

보타문주 운선이 누군가. 중원 최고의 불승 중 한 손에 꼽히는 그녀이건만, 서로 간에 이어지는 논리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우세하다 할 수 없는 양상이 분명했다.

더욱 놀란 건 눈에 불꽃같은 정광을 보이며 펼치는 그의 논리다.

‘약자의 편에서 파헤치고 있어.’

백성의 어려움과 못 가진 자들을 대변해야 할 불가가 어찌 이리되었냐는 질타가 송곳처럼 운선을 찔러 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격정에 휩싸인 건 다른 이유다.

무윤이란 자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다.

지금 보이는 저 눈빛이 알려 주는 것.

‘구도자의 눈빛, 흑도 조장이란 사람이 어떻게?’

사리사욕에 칼을 휘둘러 대는 게 흑도다. 명분 따윈 개한테나 줘 버리는 게 그들이다.

그런 흑도 조장인데.

무인과 여승의 길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녀이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다.

여승이 되길 원했지만, 자신의 칼에 생을 마치던 해적들을 보며 조금씩 멀어져 갔던 구도자의 삶.

그런데 눈앞의 파락호에게 그것이 보인다. 자신도 이젠 잃어 가고 포기해 가는 그것인데,

갈구하는 목마름의 시선이 무윤을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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