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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7화 (7/161)

7화

무윤의 눈길이 물끄러미 연무장을 응시했다. 각양각색의 복장인 수십의 무인들.

‘무림맹에 간다고 했지.’

각 지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젊은 정파 무인들, 그중에서도 선발된 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가는 길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자부심과 흥분이 고조됐을 터. 가는 도중 협이니 의를 내세울 거리만 있어도 앞다투어 나설 때다.

그 탓에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엔 대부분 아쉬움이 담겼다.

이름을 떨칠 먹잇감을 뺏긴 씁쓸함이다.

무윤은 절로 올라오려는 쓴웃음을 심중에 삼켰다.

이 몸은 세상을 오연히 바라보던 천 년 전 무륜이 아니다. 지금은 저들의 흥밋거리 장난감, 딱 그런 존재다.

‘현실의 망각은 곧 죽음.’

살기 위한 약자의 몸부림에 비굴함이란 없다. 당당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할 때나 쓸 단어다.

천 년 전 이곳에서 수백 번도 더한 짓이다. 그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있었기에 십오 년 후 흑도를 통일했던 것이고.

지금은 차가워진 가슴을 감춰야 한다. 걸음과 눈가에 티 나도록 두려움을 담고는 한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누군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뭐야! 혼자는 겁나니까 여럿 데리고 왔네.”

무윤은 악무길 일행과 같이 왔다. 다음 계획을 위해선 그래야 했다.

“그 정도는 봐주자고. 안 그러면 오줌이라도 쌀지 어찌 아는가.”

“다 같이 와도 쫄릴 판인데 넘어가 줘.”

“크크! 하긴.”

모두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 한곳을 향할 즈음.

하후가의 소가주 하후천기의 시선이 단목철진을 향했다.

“이보게 철진. 꼭 나서야겠는가? 우리가 정리하는 게 좋을 거 같네만.”

그도 단목철진이 물러날 리 없다는 걸 잘 안다. 단지 몇 마디 말로 빚을 떠안길 수 있기에 나섰을 뿐.

“내 개인적인 일이라 생각해 주게.”

“휴! 알겠네. 다만 시끄럽지 않게 부탁하지.”

“그리하지.”

무윤은 단목철진에게 정중히 고개 숙였다. 지금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어야 할 때.

“손속에 사정을 둔 점 감사드립니다.”

“안다니 다행이구나.”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저 은혜에 감읍할 뿐입니다.”

단목철진의 목표는 두 가지.

우선 어제의 불명예를 씻는 건 간단하다. 말 몇 마디로 격하게 손쓴 이유를 명분 있게 둘러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낼 수 없지.’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감히 마음에 둔 그녀 앞에서 개망신을 준 새끼다. 놈이 죽은 줄 알고 놀란 진서연이 자신을 보던 그 표정. 그걸 어찌 잊을까. 말 한마디 안 했지만 그 눈빛은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에게서 처음 접해 본 눈빛.

그 울분은 풀어야 했다.

티 나지 않게 단전을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면 검이 아닌 주먹으로 슬쩍 속을 뭉개 버려야 한다.

이제 대인의 풍모를 풍겨야 할 때.

“어제 못다 한 가르침 때문에 만든 자리다. 그렇게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나서다간 오래 못 살지.”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그걸 조금이나마 깨우쳐 주려 불렀다.”

“말씀은 감사하나 저 같은 것 때문에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됩니다만.”

“권으로 다섯 초식만 하지. 그 정도면 배우는 게 있을 게다.”

“알겠습니다.”

물 흐르듯 빤한 진행에 누군가 모두의 관심사를 꺼냈다. 단목철진의 성정에 대해선 대부분 안다.

“단전이겠지?”

“안 그럴 거면 왜 불렀겠어? 그보단 부수되 여기서 티가 나느냐 그게 관건이지.”

“크크! 볼만하겠어. 살짝 금만 가게 하는 건 쉽지 않은데 말이야.”

“지켜보자고.”

단목철진 또한 그게 오늘의 승부다. 스스로 명분도 만들었다.

‘엄하게 뒈질 바에야 너 같은 놈은 그게 오래 사는 길이야.’

그래도 무윤에게 다행스러운 것도 있다.

‘그 여인은 없어.’

굳이 따지면 비무 권한은 칼을 겨눴던 그녀에게 있는데 지금 여기에 없다. 불가 문파이다 보니 이런 자리는 불편했으리라.

이제 눈앞에 있는 놈만 상대하면 된다.

‘다섯 수라!’

일류와 절정은 한 단계 차이.

하지만 백 명의 일류 중 검기(劍氣)를 발현하는 절정에 오르는 자는 하나둘. 그 격차는 하늘과 땅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

‘마지막 수.’

다섯 수로 공언한 이상 그 전에 끝내는 것도 창피다. 하지만 이전 네 수 또한 궁지에 몰 사전 포석일 터, 방심할 수 없다.

상대를 마주한 단목철진의 입이 담담히 열렸다.

“시작하지.”

“예.”

단목의 권이 경쾌한 보법과 함께 날아들었다.

슈우욱!

무윤은 티 나게 몸을 움츠리고는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가장 바라는 건 상대의 방심이니까.

어깨와 몸통을 향해 우직한 권이 날아들었다.

무윤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보이기에도 실제에도 가장 적정한 운신이다.

빠름이 더해진 권이 비틀려 옆구리 요혈을 향했다.

슈우욱!

무윤은 짧게 몸을 비틀었다. 완전히 피하면 화를 돋운다. 회전을 이용해 어깨를 강타한 충격을 줄이는 게 최선.

쉬익! 퍽!

“우욱!”

어깨 어림에 느껴지는 충격은 작지 않아 신음은 절로 터졌다.

속으론 숫자를 되뇌었다.

‘한 수!’

폭풍 같은 기세와 함께 발이 날아들었다.

휘익!

이번엔 거리를 좁혔다. 다가서야 충격을 줄인다.

퍼억!

“커억!”

그래도 막은 팔로 전해지는 엄청난 격통은 절로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

파팟!

‘두 수!’

다시 대기를 찢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자 초감각이 방향을 알렸다.

‘머리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비틀었다.

쉬익!

살벌한 바람 소리가 옷자락을 스쳐 갈 즈음, 초감각이 다시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이번엔 허초다. 그렇다면.

‘연환공격!’

옆구리 즈음에 날아드는 것이 얼핏 보였다. 주먹이 어느새 몸 가까이 날아들었다.

슈욱!

‘못 피한다.’

방어만으론 중상을 못 피한다. 몸을 비틀어 놈을 어깨로 밀어붙여야 한다. 그러자면.

‘어쩔 수 없다. 중단전 내력을 쓰는 수밖에.’

감췄던 신기심의공 기운을 온몸에 뿌리자, 초극의 움직임이 허리 비틀림을 배나 빠르게 만들었다.

휘익!

순간 단목철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네 번째인 지금 옆구리를 가격해 몸이 들려야 단전을 노린다. 한데 예상치 못한 빠름. 이대로 가격해도 상처는 입힐 수 있지만 목표는 단전이었는데.

게다가 무엇보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떨게 만든 것.

‘날 속여!’

일류 초입인 줄 알았는데 중상은 되는 움직임.

아무리 다섯 수라지만 감히 자신 앞에서 처음부터 감출 생각을 했다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단목철진은 급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목표를 바꿨다.

이대로 보내는 게 더 망신이다. 권기를 꺼내서라도 놈을 망가뜨리는 게 우선이다.

우우웅!

살기까지 더해진 권기가 금세 주먹을 감쌌다. 섬전처럼 가슴을 노리고는 짓쳐 들었다. 이젠 단전 대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한 내상이 목표다.

순간 무윤의 눈가가 번득였다. 설마 했던 권기까지 놈이 꺼냈으니, 다치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다 꺼내는 수밖에.’

순간적인 빠름으로 상당 부분을 흘려 내야 한다.

무윤은 땅을 박차고 나는 듯 앞으로 향했다. 근접해야 변수를 줄인다.

파팟!

단목철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미친놈! 피해도 모자랄 판에.’

서릿발 같은 권기를 줄줄이 쏟아 내 무윤을 쓸어 갔다.

슈우욱!

시퍼런 권기가 무륜의 몸을 덮칠 찰나, 엄청난 발돋움에 흙먼지가 위로 치솟았다.

퍽! 휘익!

일직선으로 달리던 신형이 갑자기 버들가지처럼 휘어졌다.

휘익!

빠름에 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각도.

단목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떻게!’

놀란 좌중의 눈도 커다래졌다. 대부분 절정 이상이라 무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번이지만 일류 끝자락은 되는 몸놀림이다.

“오! 저렇게 움직이다니.”

“뭐야! 감춘 게 있었어?”

“크크!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더니.”

단목철진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든 놈을 잡아야 한다.

모든 내력을 끌어올린 주먹이 어깨를 향했다. 최소한 팔 하나는 부숴야 한다.

슈우욱!

순간 무윤의 신형이 또 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파라락!

소스라치게 놀란 단목철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런!’

놈의 신형이 이렇게 급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급히 주먹 방향을 틀었지만 무인의 직감이 알렸다.

피륙의 상처만 가능함을.

슈욱!

한 줄기 바람이 무윤을 휩쓸었다. 가슴을 지난 주먹이 비틀린 어깨를 향했다.

퍼억!

“커억!”

무윤은 묵직한 타격감에 더해 목청을 높였다. 이대로 바닥에 몇 번 구른 다음 벌러덩 나자빠지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일부러 입가를 깨물어 피를 내는 것 또한.

타다닥! 파팍!

연무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섯 수가 끝났다.

무윤의 입가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위험했어.’

수십 년 만의 실전이라 아직도 얼떨떨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의아하게 변했다. 어제와는 너무 달라진 모습이니.

“저 정도면 일류 상은 족히 되겠어.”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네.”

“파락호도 숨긴 게 있다, 이거네.”

“크크! 철진이 저 친구 속 좀 쓰리겠어.”

“단목가 소가주 체면이 말이 아니야. 후후!”

“그러게 말일세. 파락호 하나 제대로 못 다루다니. 크크!”

단목철진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했다.

‘감히 날 우롱해?’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안 됐다. 어제는 일류 중반도 안 돼 보였는데 오늘은 저런 몸놀림이라니.

단목철진은 눈썹을 칼날처럼 꿈틀거렸다.

‘그냥 두지 않아.’

같은 시각, 하후가 별원.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보타문주 운선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 때문이다.

“서연아, 날 기다린 게냐?”

“예,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

진서연은 어제 일을 문주에게 상세히 알렸다.

무윤이란 자도 어쩔 수 없이 나섰을 뿐인데 죽은 줄 알았을 땐 엄청난 자책감이 몰려왔었다. 자신으로 인한 것이니.

이미 보타암 근처 수적들의 목을 몇이나 베었는지 세어지지도 않는 그녀지만 그건 죽어 마땅한 자들.

이번 같은 경우는 그녀도 처음 겪는 일이다. 다행히 살아났다는 말에 안도했는데, 다시 부른 철진은 훈계 정도로 끝낼 자가 아니다. 그 걱정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단목공자가 그냥 넘어갈 거 같지 않아요.”

문주 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한데 늦은 게 아닌지 모르겠어. 이미 끝난 거 같으니.”

두 사람은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하후가 연무장.

하후가 소가주 하후천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꼴좋구나.’

단목철진의 망신이 기분 좋은 건 그만의 이유가 있다.

이복동생 하후태의 외가가 오대세가인 서문가라, 소가주가 된 지 삼 년이 지났어도 아직 가문에선 말들이 많다. 세력 또한 밀리는 편이고.

근데 칠대세가랍시고 하후태와 붙어 다니며 은근히 자신을 비아냥거리던 단목철진이 저 꼴을 당했으니.

그가 다른 일을 벌이기 전에 마무리 짓기로 했다.

“청호방 조장이라 했지?”

“예.”

“호! 그 정도면 조장에 머물 실력이 아닌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후천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야. 칠대세가의 소가주가 권기까지 썼는데 그 정도면 대단한 게지.”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여기서 더 나올 말은 모두 독이다.

‘빨리 떠나는 게 최선이다.’

그때 문주 운선과 진서연이 연무장에 들어서자 하후천기가 황급히 다가갔다.

타다닥!

“문주께서 여긴 어인 일로?”

“별일 아닐세. 소리가 나기에 그냥 들른 것이네.”

“아! 그러십니까? 작은 가르침이 있었는데 방금 끝났습니다.”

“그런가.”

문주 운선의 발걸음이 무윤을 향했다. 크게 다친 덴 없어 보이지만 이후 생길지도 모를 일을 막기 위함이다.

“그래, 많이 배웠는가?”

무윤은 공손히 앞으로 나와 합장하고는 익숙한 불호를 되뇌었다.

“나마스아미타브하 아랴바로키테스바라!”

순간 문주 운선의 눈이 커다래졌다.

“호! 요즘도 그런 불호를 쓰는 이가 있는 줄 몰랐구나.”

바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오랜만에 듣는 그 불호 하나에 눈앞에 선 자는 파락호이건 뭐건 그냥 불자일 뿐이니까.

무윤의 눈가에 당혹감이 서렸다.

‘지금은 뭐라고 하지?’

지금 무윤의 기억엔 불교와 관련된 지식은 거의 전무한 상태.

천 년의 세월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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