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잠시 후, 방에서 나온 넷은 수군거렸다.
“담 조장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갑자기 너무 달라져서 다른 사람 보는 줄 알았어.”
“죽다 살아났잖아. 그럴 수도 있지.”
대형인 악무길은 주의를 환기시켰다.
“지금 그딴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여차하면 우리 다 죽는다. 각오 단단히 하고 움직여야 해.”
“시팔! 그래. 해보자고. 언제까지 그 새끼 밑에 있을 것도 아니잖아.”
“우리도 해볼 만해. 방주 편이라 해 봤자 이젠 몇 놈 없잖아. 분위기만 잘 만들면 쉽게 끝날 수도 있어.”
“근데 난 아무래도 걱정인데. 먼저 알리는 건 좀.”
“대형 말 못 들었어? 믿었으면 끝까지.”
“에이,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가 보자고.”
지난 일 년, 무윤과 서로 등을 맞대고 싸웠던 신뢰가 결국 넷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넷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파팟!
* * *
간혹 들리는 새소리만 까만 밤의 정적을 깨울 즈음, 무윤은 어둠이 깔린 숲으로 향했다.
‘일류 중상이라!’
그게 지금 무윤이다.
지금의 경지 분류도 천 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삼류, 이류, 일류를 거쳐 고수라 할 수 있는 검기상인의 경지인 절정, 거기에 초고수라 불리는 초절정, 깨달음과 정기신의 일체를 통해 절대자라 불리는 화경,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현경에 이어 생사경까지.
그런데 확실히 차이 나는 게 두 가지 있다.
무인 숫자가 늘어난 건 사람이 늘어 당연한 것이고.
우선 절정, 초절정의 비율이 현격히 높다. 모두 내공심법의 발전이 뒷받침돼서 벌어진 일.
다만 무인의 숫자와 고수가 늘어났음에도 화경 이상 절대자의 수는 큰 차이가 없다. 지금 알려진 화경 무인은 대략 이십여 명. 숨은 자를 감안하면 두 배 정도 될 터.
천 년 전에도 대략 비슷한 숫자였다. 그렇다는 건.
‘효율은 좋아졌는데 정해진 틀에 따르다 보니 자기 길을 찾기 어려워졌겠지.’
예전엔 시쳇말로 무식하게 수련했다.
지금처럼 종이가 있고 문자를 다 알던 시절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도 주로 말로 했고, 듣는 정보도 부족하다 보니 수련에 정답이 없었다. 내공, 외공, 동공, 독공, 환술공, 색공 가릴 것 없이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았다.
소수의 거대 문파들만 죽간이나 비단에 글을 적어 무공을 공유했고 대부분은 혈족 간에 구두로 전해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전승 중에 잘못된 것도 많고, 또 그렇기에 자신만의 길을 찾는 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차이가 불러온 결과이리라.
무윤은 신기심의공(身起心意功)을 떠올렸다.
자신과 여휘가 함께 만든 무공. 정확히는 여휘가 체득한 걸 풀어내면 자신이 체계화했다.
그 외에도 둘이 만든 무공은 셀 수 없이 많다. 척고련의 무공 중 오 할은 둘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절대무학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손에 꼽는다.
전부 여휘가 있기에 가능했다. 모든 무학에 대한 본질적인 의구심을 가진 데다 시도가 가능한 그가 있었기에.
하지만 당장 내일 필요한 건 신기심의공이다.
하단전이 아닌 심장이 있는 중단전부터 시작하는 무공.
이전 생에 사 단계까지 가 봤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 단계까지. 여기까진 감각과 깨달음의 단계라 축기와 같이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따라 내일 행동이 달라진다.
일 단계는 일반 심법으로 보면 호흡으로 자연의 기를 느끼는 과정.
‘다만 심장 떨림이 필요하고 몸속 기운이라는 게 차이지.’
과한 움직임 이후엔 당연히 심장이 헐떡거린다. 우연히 그 격한 호흡을 도가의 진언과 함께 가라앉히던 여휘는 심장을 중심으로 몸 전체를 아우르는 기가 있다는 걸 찾아냈다.
그 후 무륜은 중단전이 그 흐름의 근간임을 알아냈고.
즉 뛰는 심장의 울림이 온몸으로 퍼질 때 그때 나오는 기를 느끼는 게 시작이다.
이 단계는 중단전을 깨닫고 흐름을 교류하는 것.
심상에 집중하다 보면 온몸에 퍼져 나갔던 기운이 다시 심장 어림에 모이는데 그곳이 중단전이다.
지금 시도하려는 건 여기까지다.
몸의 장기와 근육, 혈도 등 모든 곳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심장과 교류하게 되면 가능한 게 있다. 바로 오감을 벗어난 초감각과 초극의 동작.
이건 특히 방어에 있어 탁월한 효과를 낸다. 상대의 공격을 찰나라도 빨리 감지할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 간다면 내일 단목가 놈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 지금의 목표는 그것.
거기에 지금 무윤이 익힌 가문의 무공, 비류단혼검을 심상에 적응해야 한다. 지금은 생각과 몸이 따로 움직이는 곳이 분명 있을 테니까.
가볍지 않은 흥분이 무윤의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해 본다.’
마음이 안 설렐 수 없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해야 했던 아쉬움, 이제야 달랠 수 있다.
움직임 전임에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심장이 반갑다.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부터 뛰던 가슴이 이젠 천둥 치듯 쿵쾅거린다.
즐거운 흥분이다.
짜릿한 쾌감이다.
벅찬 설렘이다.
문득 여휘가 떠오르자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오른다.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무의 절대자 여휘를 옆에 두고 어찌 부러움과 시기가 없었을까.
하지만 친구 여휘는 그런 어설픈 감정으로 쳐다보다가도 이내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놈이다. 비교이니 평가이니 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놈. 여휘는 그런 무인이었다.
지금 부푼 가슴은 첫 검을 손에 잡고 흥분에 떠는 어린 무인의 감성 그 자체다. 이 순간만은 어떤 욕심도 목표도 생각하기 싫다. 그저 내 손에 잡은 이 검을 저 하늘에 맘껏 뿌릴 수 있다는 벅찬 희열을 느끼고 싶을 뿐.
검을 가볍게 모아 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검 끝이 하늘을 향했다.
슈욱!
다시 무인이 되는 첫걸음이 대지를 쓸었다.
사라락!
내디딘 발에 힘이 들어가자 호흡이 이끄는 대로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은은한 바람이 허공을 향한 검 주변을 살랑거렸다.
휘이익!
지금은 빠름을 담을 때가 아니다. 한없는 부드러움과 물 흐르듯 끊이지 않는 흐름이 먼저다. 지면을 쳐 낸 발끝이 가벼이 낙엽을 헤쳤다.
파라락!
바닥을 스치듯 쓸어 가며 자연스럽게 체중을 옮겼다. 팔과 손에 이어진 검이 허공의 바람을 쫓았다.
슈우욱! 화라락!
그렇게 일각이 흐를 무렵, 조금씩 움직임이 커지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색함이 사라진 감각이 그다음을 바란 탓이다.
미풍 같이 살랑이던 바람 소리도 거세졌다. 몸도 검도 따라 빨라졌다.
검이 허공을 세차게 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거두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부웅! 휘리릭!
그러길 한참, 순간 영혼의 바람 소리와 같은 환청이 귀에 메아리쳤다.
-축하한다, 이놈아.
여휘가 있었다면 분명 환한 웃음과 함께 그리 말했겠지만 혼자의 상상이다. 그래도 무윤은 옆에 있는 것처럼 화답했다.
‘그래, 너무 좋구나!’
가문인 천가장의 무공 비류단혼검. 극에 이르면 간신히 초절정인 검법이지만 지금은 그 어떤 절대무공보다도 격한 환희를 불러왔다. 지금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눈물도 두말할 것 없이 기쁨이다.
일각의 시간이 더 흐르자 바람 가득 안은 돛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절로 뛰는 심장의 고동과 맥박이 흥분과 설렘을 알린다.
그때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전했다.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
지금 단계에선 심장은 적당히 격해야 한다. 턱 끝까지 찬 숨은 오히려 심상에 방해만 될 뿐.
이젠 좌선으로 기운을 느낄 때.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심장의 흐름에 맞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고는 몸의 상태를 찬찬히 살폈다.
그러길 반 시진, 무윤의 두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 지난 생에 느꼈던 그 기운이다
일 단계가 시작됐다.
자그마한 줄기 한 가닥이 조금씩 가지 치듯 뻗어 나갔다.
근육과 신경, 혈도 등 가릴 것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돌기 시작했다. 세기는 미약했지만 분명 지난 생에 몸과 영혼에 새겨졌던 그것이다.
일반적인 심법은 시전자의 의지로 하단전에서 끌어올리지만 이 기운은 다르다. 시작점도 끝점도 없이 그저 몸 구석구석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혈도만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근육, 신경, 장기 등 몸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명한 기운을 뿌렸다. 면면히 이어지는 기운이 몸속을 헤집으며 호흡을 같이하길 한 시진여.
무윤은 심장 어림에 따스한 기운이 모임을 느꼈다. 낯선 기운이지만 또 한편 익숙한 기운. 바로 직감했다.
‘중단전!’
간질간질한 느낌이 올라오더니 심장 주변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흐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무윤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지로 눌렀다. 입술과 눈매가 저절로 파르르 떨렸다.
사십 년 세월이지만 어찌 이 느낌을 잊을까.
‘이거였어.’
긴 세월이건만 다시 그 길을 열어 줬다. 감은 두 눈에서 작은 눈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스륵!
무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감정의 격랑을 애써 다스렸다.
얼마 후, 기운이 하나의 형체가 되어 심장 어림에 미약하게나마 자리 잡는 게 느껴졌다.
주변 바람의 기운도 달리 느껴진다. 초감각이 생겼음을 뜻한다. 또한 따라오는 초극의 움직임 또한.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심장이 벅차오르고 사지가 떨려 왔다.
‘됐어, 이젠.’
여휘와 다른 무인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이제 심상을 정리할 때가 됐다.
무윤은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형형한 정광이 반짝였다 사라지자 벅찬 환희의 미소가 절로 따라왔다. 그럴 이유가 하나 더 늘어서다.
‘삼 단계, 축기까지 갔어.’
몸의 장기와 근육, 혈도 등 모든 곳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교류하다 보면 몸을 채우고 난 기운이 서서히 중단전에 쌓인다.
아주 미세한 양이지만 지금 이 느낌은 분명 기운이 쌓였음을 알린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갈 수 있다는 뜻.
몽롱하게 홀린 듯했던 눈빛이 금세 타올랐다.
‘할 수 있다.’
아까가 다시 무인이 됐다는 기쁨이라면, 지금은 무적의 무인 여휘가 갔던 길을 나도 갈 수 있다는 벅참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함이 온몸에 가득했다.
덕분에 상황에 따라 바꾸려던 계획 하나는 고정됐다.
하후가 일이 잘 마무리되면, 침주 밖으로 도망칠 필요는 없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바로 씁쓸함이 가슴을 아려 온다.
항상 있던 누군가가 없어서다.
누구보다 기뻐해 줄 놈이 없어서다.
짧은 탄식만 안타까움을 감쌌다.
‘여휘야!’
밤이 깊어 가다 풀잎에 새벽이슬이 맺힐 때까지.
하늘 높이 흩어진 별빛만이 허공을 휘젓는 이의 마음을 달랬다.
* * *
다음 날 오후, 하후세가 연무장.
정파 무인 몇이 모여 떠들어 댔다.
“이봐, 철진. 그놈 어떡할 거야?”
옆에서 대신 답이 나왔다.
“크크! 어떡하긴! 팔 하나 아니면 단전을 박살 내면 되지.”
다른 이가 은근슬쩍 어제의 실수를 꺼냈다.
“그래. 그 정도로 하게. 어제처럼 또 죽이려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자네 명성에 흠만 될 텐데.”
단목철진은 마뜩잖은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찡그려지는 미간은 어쩔 수 없었다.
‘버러지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그때 누군가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 저기 오네.”
모두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맴돌았다.
심심한 차에 재밌는 구경거리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