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적묘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젠 멀찍이 호위를 선 자들의 야릇한 눈도 대놓고 자신을 향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참을 수 없는 게 있다. 한 층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에 분기를 참지 못하고 있을 지인들.
그중엔 얼마 전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한 염중탁도 있다. 서로 마음을 열어 가고 있는 상대 앞에서 이런 꼴이라니.
‘창피해.’
끓어오르는 분기와 모멸감에 이를 악물고 있던 찰나, 꾹 참고 있던 지랄 같은 성격이 홧김에 터져 나왔다.
속곳을 뚫은 손이 어디로 향할지 빤한 순간이라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탁!
“전 이만 가 볼게요.”
갑자기 일어난 그녀 탓에 쏟아진 술이 설진광의 앞섶을 가득 적셨다. 그의 입꼬리가 확 올라갔다. 건수를 제대로 잡았다.
“호! 그새 간덩이가 많이 커졌네.”
“죄송해요. 기녀가 필요하시면 불러 드리…….”
순간 땀에 젖은 설진광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휘익!
“아악!”
그녀의 혈도 몇 군데를 점하는 동시에 설진광의 섬뜩한 미소가 청호방주 곡정필을 향했다.
“방주가 날 망신 주려고 부른 거 같군.”
곡정필은 놀라는 대신 화답하는 야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감히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럼 이년이 날 우습게 보는 거겠지.”
곡정필은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제가 주의를 더 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제가 손을 볼까요? 아니면?”
“계집 하나 때문에 방주와 얼굴 붉혀서야 되겠나. 내 알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물러나 있겠습니다.”
비릿한 웃음과 함께 설진광의 손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하던 찰나.
삼 층에 올라선 여인의 날 선 음성이 설진광을 향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순간 설진광의 절로 부릅떠진 두 눈이 그녀를 마주했다.
‘누구?’
놀람은 두 가지다.
우선 미인이다. 하지만 눈처럼 흰 얼굴이나 별빛처럼 빛나는 눈, 날카로운 콧날과 굳게 다물린 선홍빛 입술 같은 이목구비보다 더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게 있다.
‘묘해!’
그녀에겐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기운 같은 게 느껴진다. 건드려서도 안 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같은 오묘한 향기.
설진광을 바로 안색을 붉혔다. 꾸짖듯 바라보는 여인을 향해 멍하니 벌린 입이라니.
그제야 현실이 자각됐다. 두 번째 놀람.
삼 층을 막고 있던 호위들을 가볍게 뚫은 몸놀림.
‘고수.’
한데 난생처음 보는 미모에 붉게 달아올랐던 눈이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온 젊은이들.
자신들이 누군지 대략 알 텐데 당당히 저럴 놈들이면.
‘정파 놈들.’
이곳 침주에선 정파 하후세가를 무시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파 중 최고라 하는 자신들 적운문도 고양이 앞의 쥐 신세. 저들은 아마도 하후가와 연관이 있을 터.
‘건드릴 놈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꼬랑지를 내리는 건 용납이 안 된다.
그때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던 청호방주 곡정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오히려 잘됐어.’
오늘은 미끼만 던지려고 했는데 이참에 낚을 기회가 생겼다.
그 목표 둘 중 이 자리에 있는 놈을 향해 목청을 올렸다.
“야! 담 조장!”
담사운이라 불리는 조장 무윤이 급히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곡정필은 말 대신 턱짓으로 의사를 알렸다.
순간 무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들한테?’
나서라는 신호다. 물론 저들의 상대가 아닌 건 자신도 방주도 안다. 감춘 실력을 다 끌어내도 일류 중반인 자신인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약자인 자신들이 꼬랑지 내리지 않는 방법이 있다.
방주는 그걸 자신보고 하라는 거다.
조장 무윤은 여인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우린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오. 강호의 법도에 따라 참견하지 마셨으면 하오.”
여인, 진서연은 어이없는 한숨이 절로 흘렀다.
“저게 같은 편한테 할 짓이에요?”
이럴 때 할 말은 이런 것밖에 없다.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진서연은 귀찮은 듯 손사래를 쳤다. 이런 일이 어찌 한두 번일까.
“저 짓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여기서 나가든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
진서연은 더 말하기도 싫다. 한 걸음 나서서 뜻을 알렸다.
“그럼 불러오세요. 빨리!”
이제 지시대로 실행할 때. 무윤은 검집 그대로 칼을 들어 올렸다.
“물러섰으면 하오.”
진서연의 애잔한 눈길이 무윤을 향했다.
‘어쩜 저렇게 똑같을까.’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훤하다. 이게 저들이 사는 방식인 걸 알면서도 매번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제 남은 건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저들이 알아서 할 터.
그런데 잠시 시간이 흘러도 예정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진서연의 의아한 눈이 무윤을 향할 때, 무윤의 의아한 눈은 방주를 향했다.
‘왜?’
이제 방주가 나서서 호통을 쳐야 한다. 물론 자신에게.
그리곤 감히 정파 무인 앞에서 무슨 짓이냐며 열나게 두들겨 팬 다음, 저 여인에겐 가벼운 사과와 함께 물러나면 된다. 이게 정파 무인들에게 기죽지 않고 벗어나는 방법이다.
물론 자신은 여기저기 터져야 하지만.
그런데 방주의 차가운 눈빛은 다른 뜻이 있음을 알렸다. 그제야 무윤의 등골이 시릿해졌다.
‘나였어!’
그렇지 않아도 최근 자신과 다른 조장 악무길을 견제하는 방주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데.
검을 상대 앞에 들어 보이는 건 싸울 의사가 있다는 뜻. 이젠 저쪽이 공격해 와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검을 집어넣으면 그걸 트집 잡아 방주가 엄히 문책할 것이고.
진퇴양난이 바로 이런 경우다.
그렇게 결정을 못 내리고 머뭇거리던 찰나, 한 줄기 바람이 검집 그대로의 공격을 알렸다. 상대는 여인 옆에 있던 남자 무인.
쇄애액!
무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 쪽의 둔탁한 충격이 눈앞에 어둠을 불렀으니.
그렇게 죽음에 이른 순간, 천 년 전 무륜이 그 몸에 자리했다.
* * *
무윤은 두 시진 전의 기억을 정리했다.
이제 하나씩 짚어야 할 때. 익숙하지 않은 어투를 감추려면 말을 줄여야 한다.
“그놈, 누구지?”
악무길의 의아한 눈이 무윤을 향했다. 당연히 물을 얘기긴 한데 왠지 평소와는 다르다. 긴장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고 저렇게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을 흘리다니.
우선 급한 일부터 꺼냈다. 그래야 상황을 파악할 테니. 그만큼 나선 상대의 신분은 상당했다.
“절강 단목세가 소가주 놈이다.”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어쩐지.’
아무리 흑도라 해도 일류 중반인 자신인데 검집째로 한 공격으로 절명시킬 정도면 그 정도는 되리라.
그때 악무길의 묵직한 음성이 흘렀다.
“근데 자네보고 내일 오라더군. 칼을 빼 든 책임을 아직 못 물었다고.”
무윤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 버렸다.
‘왜?’
방주 곡정필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끝났다고 생각한 위험이 아직 남았다.
지금은 강호 오대세가에서 빠졌지만 그래도 칠대세가엔 이름을 올리는 단목이다. 그런 곳의 소가주고 그 나이라면 절정은 무조건 넘은 자.
그런 자가 상대도 안 되는 흑도 파락호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 놓고도 다시 오라니.
강호에서도 위협 아닌 상대가 검만 들었다고 마냥 죽이진 않는다. 특히 협의 기치를 내건 정파에선 잔인하다는 불명예만 얻을 뿐. 대부분 어디 한 군데 자르거나 내상을 입히는 정도로 끝내는 게 보통인데. 실수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왜 그랬을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며 나선 여인. 그녀를 향한 그놈의 눈빛이 기억났다.
그 눈빛의 의미.
‘나 같은 놈이 감히 대들 여인이 아니라 이거겠지.’
그 분노에 흥분한 게 틀림없다. 이러면 또 물을 게 생겼다.
“그 여인은?”
“보타문 검각의 무인인데 소검후 후보래. 늦게 온 하후가 소가주도 그렇고 다들 쉽게 대하지 못했어. 보타문주가 하후가에 와 있어서 더 그럴 수도 있고.”
그제야 상황이 대략 이해됐다.
같은 절강에 있는 두 문파라 서로 잘 알 테고, 소검후 후보에다 그런 미인이라면 관심을 안 가지는 게 이상할 정도.
보타문은 문주가 승려로서 전체를 관할하지만 검을 수련하는 여인들은 검후라 불리는 검각주가 따로 통솔한다.
보타문 여승과 달리 이 여인들은 자기 의사에 따라 혼인할 수 있다. 물론 그러면 검각을 떠나야 하지만.
어쨌든 일이 복잡하게 꼬여 버렸다.
방주 일에다 단목가 소가주, 게다가 여기 침주의 터줏대감인 하후가도 고려해야 한다. 그 자리에 늦게 왔다지만 초대한 이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 버러지같이 여기는 놈들이 귀한 손님 앞에서 꼼수를 부린 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은 이전 생의 험난함에 비하면 장난일 뿐.
이럴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철칙.
‘매듭은 하나씩 푼다.’
무윤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넷의 시선을 마주했다.
‘믿을 수 있는 자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문을 떠나 광동 남쪽 해안에 숨어 살길 이 년, 그리고 이곳 침주로 와 조장으로 산 지 일 년. 그 인연의 시작이 이들 넷이다.
산적 패와 싸움을 돕던 게 인연이 돼 지난 일 년을 동고동락했다. 최근 의남매인 넷이 무윤도 함께하자고 했지만 에둘러 거절했다. 자신 또한 알게 모르게 의지하는 이들을 위험에 빠트릴 순 없으니.
넷 또한 무윤에게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고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라 우선 믿고 가야 한다.
단목가 일이야 혼자 처리해도 되지만 방주는 이들도 연관된 일.
이 사단을 만든 원흉.
“방주는?”
악무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빤하지. 자네보고 알아서 풀래. 그러다 다쳐서 나오면 칼침을 쑤셔 박을 테고. 안 그래?”
이미 방주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무윤의 성난 입이 비틀어졌다.
이전 생에 무륜이 결심하고 꼭 실행한 철칙이 또 있다. 이곳 침주 흑도에 몸담은 이후 평생 바뀌지 않았던 것.
‘적은 만들지 않는 게 최선,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때 주저하면 우리가 죽는다.’
약한 적이면 빨리 처리한다. 강한 적이다 싶으면 우선 웅크리고 꼬랑지를 내린다. 그럴 때 만용은 곧 죽음이니까.
그러다 판단이 서면 우물쭈물하면 안 된다. 도망가든 싸우든 양단간에 결정은 빨리 내려야 한다. 망설이다가 소중한 친구, 여단을 잃은 이후론 절대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았다.
무윤은 생각을 정리하고는 나직이 말을 꺼냈다. 이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게 있다.
“같이할 건가?”
악무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당연한 걸 왜 묻나. 안 그럼 왜 이러고 있겠어. 몸도 이상 없는 거 같은데 바로 움직이지. 대충 준비해 뒀어.”
준비가 뭔지 바로 감이 왔다.
“도망가자고?”
“우선 살고 봐야지. 방주를 조지는 건 그 후에 생각해도 돼.”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있다.
“아니, 날 부른 건 단목가 그놈이지만 하후가에서 오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야. 근데 무시하고 도망치면 방주가 아니라 그들 손에 다 죽는다.”
“그럼 어쩌자고?”
“생각이 있다.”
“뭔데?”
모든 답을 미리 낼 수는 없다.
“결정은 내일 하후가에서 한다. 상황에 따라 판단할 게 있다.”
잠시 생각하던 악무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은 자신이 낫지만 머리는 아니다.
“흠! 알았네. 자네야 생각 없이 움직이진 않으니까 믿어 보지.”
하후가 다음 일도 준비해야 한다.
“해 줄 게 있어. 내일 하후가를 나오자마자 우리가 다른 패거리를 모아서 방주를 조질 거라고 소문을 내.”
넷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응? 뭔 소리야? 몰래 해도 어려운 판에 소문이라니.”
이럴 때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다.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 봐.”
“……?”
한동안 말이 없던 넷은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인 걸 알고 각오를 다졌다. 거기에 오늘따라 뭔가 달라진 무윤의 눈빛에 믿음이 간다.
그래도 악무길은 이건 물어야 했다.
“그놈이 다시 부른 건 최소 어디 하나 자를 생각일 거야.”
무윤은 불꽃같은 정광과 함께 타오르는 숨결을 내던졌다. 비단 오늘만의 의지가 아닌 탓이다.
“어떻게 살아났는데. 다시는 병신이 되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걸 버틸 수 있겠냐고?”
무윤은 솔직하게 말을 건넸다.
“밤새 수련해 봐야지.”
“……?”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