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살았구나.’
무윤의 떠지지 않는 눈자위가 세차게 떨려 왔다. 감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기문진에 빠진 후 몸의 기력이 빠져나가자 곧 죽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눈을 감는 순간 전혀 생소한 기억의 편린이 물밀듯 밀어닥쳤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다른 이의 몸에 빙의했음을.
환술엔 관심 없었지만 무륜도 자신이 빠진 진에 대해 대략은 안다. 여휘와 자신이 잡아 죽인 놈들이 만든 것이니.
환술에 미친 진령파(眞靈派) 놈들은 선인(仙人)의 강림(降臨)을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다 인간의 업(業)이 열쇠임을 알고는 생사람과 시체를 섞어 넣기까지 하다, 결국 여휘의 손에 멸문당했다.
그때 모든 서적과 자료들을 불태워 버렸지만, 선기(仙氣)가 느껴지는 그 환술진만은 차마 없앨 수 없어 원형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그걸 여휘가 재미 삼아 연구하다 이리된 것이고.
그 환술진에 있던 글이 떠올랐다.
-본생의 업이 경계를 넘지 못하면 영혼이 흩어지거나 빙의한다.
새로운 삶이 주어졌음을 아는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한순간에 변한 인생. 이 짧은 순간 몇 가지 소회로 정리될 리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 무륜의 생각을 이어 갈 상황이 아니다. 그저 대해처럼 밀어닥치는 기억의 파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다 알았다.
‘천 년이라니!’
세월의 무상함을 논할 기간이 아니다. 백 년이 지나도 남은 인연의 고리가 거의 없는데, 그 열 배인 천 년이면.
망망대해, 아득히 떨어진 무인도에 혼자 남은 꼴이다.
거기에 업의 굴레가 절로 느껴지는 이름.
‘무윤(霧昀)이라!’
이젠 과거의 이름이 된 무륜(霧輪).
안개 낀 어느 날, 어린 고아였던 그가 마차에 치였는데도 멀쩡히 살아남아 지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지금, 이 몸뚱이의 이름은 무윤이다. 안개 빛 가득한 날 태어나, 혼탁한 곳에서 밝은 빛이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은 이름.
호남의 수십 개 소도시 중 하나인 뇌양(耒陽).
나름 그곳에선 괜찮다는 가문의 장자로 살다가, 한순간 인생이 꼬여 도망자 신세가 돼 버린 지금의 무윤. 어찌 보면 한심하고 한편으론 기구한 삶을 시작하게 된 인생이다.
하지만 그 거친 세파와 역경을 헤쳐 나온 천 년 전 무륜이 보기엔 그저 닥친 어려움일 뿐, 앞으로 천천히 풀어 나가면 될 그 정도다.
그리고 이곳 침주(郴州).
과거의 무륜이 젊을 때 이십 년을 흑도로 살았던 도시. 한데 지금 무윤도 당초 신분을 감추고는 이곳 흑도의 조장으로 숨어 있다.
뭔가 인연의 굴레가 엮여 있음이 느껴진다.
‘이유가 있겠지.’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된다.
그런데 낯선 기억의 파도를 한참 헤매던 어느 순간, 경악스러운 탄성이 절로 흘렀다.
‘이럴 수가!’
기억의 물결을 헤엄치다 간혹 하나씩 전해진 일들은 억장이 무너지게 만들고, 세상에 인생무상이란 말이 왜 있는지 절절히 깨닫게 만든다.
감은 눈 위가 파르르 떨려 왔다. 평생을 같이한 친구 여휘의 얼굴이 떠오르자 속 깊은 한탄이 흘렀다.
원망 같은 건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놈에게 절로 푸념이 흘렀다.
‘이놈아. 어찌…… 어찌 이리된 게야!’
이 몸뚱이의 주인인 무윤 또한 무가의 자식이라, 강호의 역사는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의 울타리 어느 곳에도 여휘와 자신이 만든 척고련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강에 대한 기억이라곤 단 하나.
천마라는 절대의 무인이 천마교란 걸 세워 세상에 악을 뿌리고 만마의 종주로 군림했다는 것과 그 후인들이 아직도 남아 있고, 마공이란 걸 만들어 세상 도처에 뿌려 놓았다는 것밖에는.
그 또한 시점을 알 수 없는 기억이다. 결국 천마라는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여휘가 죽고 척고련은 사라졌으리라.
무너지는 억장과 솟구치는 한을 가슴에 꾹꾹 담았다.
아쉬움 하나가 바로 밀려왔다.
‘떠나면 안 되는 거였어.’
무인으론 가장 위대했지만 조직의 수장으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휘다. 자신이 떠난 후 모든 걸 다른 이들에게 맡겼을 테고, 그 어리숙한 놈들이 어떻게 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저 연이은 한숨만이 문드러져 가는 속을 달랬다. 환술진을 넘기 바로 전만 해도 잘 살아온 인생이라 여겼는데.
‘허! 참으로 인생무상이로다!’
물론 척고련이 천 년을 이어 왔으리라 기대는 안 했다. 다만 자신들이 남긴 흔적은 있으리라 믿었다. 강호 역사상 처음으로 무림을 일통하고 군림했던 자신들이니까.
많은 걸 원한 것도 아니다. 최소한 세상에 내민 기치만이라도 남으면 족했다. 마지막 결전에 앞서 중원 연합군을 오연히 쳐다보며 친구 여휘가 했던 그 말.
-당당히 살기 위해 우리 길을 걸었을 뿐! 그 길이 하늘에 죄를 지었다 여기는 자, 내 앞에 칼을 들라.
그 웅혼한 외침을 쏟아 내는 순간, 벅찬 감동으로 날뛰던 가슴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가진 것, 배운 것 없고, 위해 주는 자도 없었지만 그런 우리끼리 스스로 길을 열었다. 그걸 세상에 보였다.
그래서 그 흔적만은 남아 있길 바랐던 것인데.
순간 무윤은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아등바등했다.
‘이게 전부가 아닐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이 무인 같지도 않은 놈의 조잡한 기억이 세상의 다가 아닐 것이다. 그 어딘가에 분명 우리 흔적이 남아 전해지고 있을 터. 분명 그럴 것이고, 설령 그게 아니라면 이제부터 찾아서 남기면 된다.
마음을 다잡자 흥분된 가슴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자 이 몸뚱이와 지금 세상이 궁금해졌다.
머리에 밀어닥친 기억들을 하나하나 다시 헤집어 정리하길 한참.
또 다른 의미의 장탄식이 흘렀다.
‘허! 천 년이 흘렀건만!’
그 장구한 긴 세월 왜 달라진 게 없을까. 눈이 팽팽 돌아갈 만한 변화가 끝없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그것들이 세상의 광휘를 불러오는 것도 잠시, 감내하기 어려운 허탈함이 아린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살피고 나서였다. 자신처럼 가진 것 없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들.
‘달라진 게 없어.’
그래도 세상은 나아가리라 여겼다. 하루 이틀은 몰라도 십 년이면 조금, 백 년이면 눈에 띄게, 그렇게 천 년이 흘렀으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됐을까 하는 설렘도 잠시.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삶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을 뿐, 어려움은 예전보다 더했고 고통의 종류만 늘어났다. 그저 병들고 굶어 죽는 사람이 약간 줄어들었을 뿐 삶은 역시 고통의 연속이다.
그 천 년의 세월이 그리된 이유, 그리 만든 건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가진 자들의 탐욕을 아직도 제어하지 못하다니.’
그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가 한동안 다른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러길 한참.
다시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허망함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내가 쓸 몸뚱이를 살펴야 한다. 스물셋 젊은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육체를.
이 순간만은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젊음이라!’
이전 생의 서른다섯 때, 살기 위한 처절한 도주 중 여휘를 구하려다 단전이 파괴되고 혈맥이 끊어졌다. 수많은 무공을 만들어 내고 천뇌(天腦)로 불리기도 했지만 무인의 삶은 그때 끝났다.
이후 친구 여휘와 함께 만들어 가던 신기심의공(身起心意功)으로 다시 도전했지만 다치고 병든 몸을 고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친구를 천하제일의 무인으로 만든 무공이지만 자신은 자질이 부족하고 몸이 따라 주질 않았으니.
매번 환골탈태한 여휘를 보면서 꿈에서나 바라 마지않던 일이 현실로 닥쳤다.
그런데 그런 흥분도 잠시, 수십 년 전 잊어버렸던 활기 충만한 몸에 희열을 느껴야 하건만.
이 자리에 왜 누워 있는지 깨닫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 주어진 희망의 삶을 어찌 살아갈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눈앞에 닥친 현실부터 풀어야 한다.
속 깊은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찌 이리 아둔할꼬!”
이 세상에 처음 입 밖에 나온 말은 그랬다.
아직 세상 연륜이 없다지만, 윗대가리가 딴마음을 품었는데 의심만 하고 있었다는 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당장 사는 걸 걱정해야 한다.
한편, 소리가 울리자마자 넷이 방으로 튀어 들어왔다.
파팟! 타닥! 드륵!
“담 조장! 정신이 들었나?”
담사운은 지금 무윤의 가명이다. 덥수룩한 수염과 함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이름.
기억과 합쳐진 얼굴이 앞에 있는 자의 이름을 생각나게 했다.
무윤의 의지로 내뱉는 첫마디라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면 상대는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
“악무길?”
입꼬리까지 찢어진 환한 웃음이 답했다.
“하하! 이제 정신이 들었네. 다행이야.”
그 옆으로 셋의 이름도 떠오르자 차근차근 하나씩 읊조렸다.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흥분이 입가에 번졌다.
“적묘예, 염중탁, 염리웅.”
이곳 침주의 흑도, 청호방의 같은 조장이자 내 지인들.
유일한 여인인 적묘예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녀를 힐끔거리던 염중탁이 버럭 했다.
“야!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다 방주하고 그놈의 새끼들이……. 어휴!”
“……!”
저 표정과 말은 지금 기억이 정확하다는 증거다.
아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 *
두 시진 전, 호남 최남단에 위치한 침주(郴州).
장사, 형주에 이어 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그런 곳의 맨 밑바닥을 훑는 파락호 집단이 청호방이다.
저잣거리 사람들에겐 가장 두려운 존재, 하지만 웬만한 무인에게는 같잖지도 않은 존재, 그게 파락호다.
다만 쪽수에 있어선 근 이백에 가까운지라, 비슷한 규모의 침도방과 함께 밑바닥의 양대 세력이라 불린다.
물론 그래 봤자 이곳 최고 무가인 정파 하후세가나, 상납해야 하는 사파 적운문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드는 존재들이지만.
이곳 최고의 반점, 청월루 삼 층.
술이 거나하게 오를 즈음, 청호방 방주 곡정필은 작심했던 계획을 슬며시 꺼내 들었다.
“헤헤! 소문주님. 이런 자리에 계집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적운문 소문주 설진광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둑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벌써 자리를 옮기잔 말인가?”
“기루는 이따 가시고 여기서 말입죠.”
“무슨 소린가?”
“제가 일 층에 적묘예를 불러 놨습니다만.”
설진광은 후끈 달아오른 속내를 감췄다.
“호! 이게 무슨 일일까. 방주께서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인데.”
“아닙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난 즐기기만 해라?”
“물론이죠.”
이곳 침주 최고의 사파, 적운문의 장자인 자신이야 그냥 주는 대로 즐기면 된다.
“뭐 그렇다면.”
잠시 후, 소문주 설진광 옆에서 술을 따르던 적묘예가 몸을 비틀었다. 추잡한 손이 계속 가슴 언저리를 더듬지만 평소 성격대로 할 자리가 아니다. 회가 동한 남자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
“저기 이만큼 드셨으면 기루로 가시는 것이…….”
설진광의 눈빛이 더 야릇해졌다. 평소 눈독 들인 먹이가 옆에 있는데 어딜 갈까.
“조금만 더 있지.”
“…….”
가슴을 헤집던 손은 그대로인 채 다른 손이 허리춤을 비집고 조금씩 아래로 향했다.
적묘예의 꿈틀거리던 눈동자는 그 원흉이 아닌 다른 이를 향했다. 이 일을 사주한 방주 곡정필에게로.
‘개새끼! 나를 팔아먹겠다 이거지?’
방주란 작자가 이러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흑도에선 다반사인 일이니.
다룰 수 없을 만큼 대가리가 커 가는 놈을 그냥 둘 두목은 없다.
그것도 두 놈이나.
적묘예 자신은 그들을 잡기 위한 먹잇감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