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한 달 후, 노승 반각의 미소가 시간이 갈수록 그 색을 더했다.
‘나마스아미타브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직접 겸백(縑帛, 글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만든 비단)에 불경을 필사하는 여휘를 보고 있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필사본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더니 직접 하겠다고 나섰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거기에 죽간(竹簡) 대신 그 비싼 겸백을, 그것도 황실에서나 쓰는 최고급에다, 송연묵(松煙墨, 소나무를 태워 아교풀과 섞어 만든 고대의 묵)도 가장 귀한 걸 직접 구해 왔다.
그리고 한 달 내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저러고 있는 모습에 어찌 흐뭇하지 않을까.
거기에 필사를 하다 가끔 툭 던지는 화두도 반각을 즐겁게 했다.
-이봐! 부처라는 자, 생각보다 괜찮은데?
-허허! 어찌 그러시오?
-세상 이치를 좀 알아. 같은 시대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신 남긴 말씀이 있잖소. 그 뜻을 헤아리면 그대가 부처가 될 수도 있음이오.
-어디서 시답잖은 소릴 해. 난 무륜에게 주기만 하면 돼.
-……!
오늘은 또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함에 다가갈 즈음, 여휘는 마지막 필사 후 원본을 건넸다.
“다 했다. 가져가.”
반각은 매번 필사가 끝날 때마다 하던 물음을 던졌다.
“이번 건 볼만했소?”
여휘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쳤다. 알려 줄까 말까 하다 넌지시 운을 떼었다.
“이 [바라타 나티암] 불무(佛舞)를 해 봤나?”
반각은 눈을 껌벅였다. 이번에 준 건 자신이 잘 모르는 불무인 데다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춤사위가 너무나 많다.
“훑어보긴 했소만.”
“심심하면 한번 해 보든가. 쉽지 않겠지만.”
반각의 눈이 반짝였다. 가볍게 던진 화두가 아님을 직감했다. 게다가 쉽지 않다는 건 무공과 관련된 의미일 수 있다.
함의를 담은 짧은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되더이까?”
무(武)의 하늘이라 일컬어지는 이라면 이 짧은 시간에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묻는 의도를 아는 여휘의 입이 살짝 비틀어졌다.
“너희 것 중에 좀 나아 보일 뿐이야.”
이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다.
“무공이란 말이오?”
“익히는 자에 따라선.”
반각의 고개가 정중히 숙여졌다. 그가 저리 말할 정도면 무가지보나 다름없다.
“빈승이 부족한 건 아오. 하나 인연이 닿는 자가 분명 있을 터. 가르침을 부탁드리오.”
“너 정도 무인이 불문에 또 어디 있을까.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럼?”
“너 같으면 이걸 익히겠어?”
“그거야…….”
“네가 그랬지? 인연이 닿는 자가 있을 거라고. 넌 억지로 해 봐도 소용없을 거야. 그냥 잘 간직해 둬. 언젠가 그런 자가 나오겠지.”
반각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혜정이라면!’
절강 주산군도에 보타암이란 절을 만들기로 하고 막 떠나려는 여승. 반각이 아는 한 불무에 있어선 가장 뛰어난 여인.
며칠 후 반각은 따로 필사한 [바라타 나티암]을 혜정에게 전했다.
고대 천축 왕가의 춤에서 유래한 [바라타 나티암] 필사는 여휘도 당초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보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그리했다. 피로 점철된 생을 살아온 자신과 친구, 무륜이다.
‘이번엔 달리 살아 보려무나.’
그래서 선택한 것이 춤이다.
하지만 무륜은 말만 전한다고 춤출 놈이 아니다.
자신이 먼저 춰야 한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는 걸 남기면 놈도 하는 척은 하리라.
여휘는 생각지도 않은 춤의 무공을 만들게 됐다.
그런데 도중에 하나가 늘어났다.
[바라타 나티암]엔 남녀가 춤추는 부분도 있다.
평생 여인이라곤 사귀어 본 적도, 관심도 없던 무륜이라 억지로라도 뭘 안겨 줘야 생각이라도 해 볼 것이다.
여휘가 떠나는 날 반각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려오?”
“사라산(謝羅山)에 가 보려고.”
수많은 도인의 암자가 칠십이 봉에 널려 있는 곳. 후일 무당산(武當山)이라고도 불린다.
반각은 그곳에 있는 도백파(道白派)의 전대 장문인을 떠올렸다.
“행우자, 그분께 가려는 것이오?”
“그놈이 도경을 많이 가지고 있다며?”
“허허! 그 또한 필사해 군사께 주려는 게요?”
“불경만큼 좋아하는 게 그거잖아.”
“……!”
몇 년 후, 세상을 한참이나 돌아다니던 여휘의 준비는 대략 끝이 났다.
이제 유일하게 알려야 할 사람만 기다리면 된다.
가서 알릴 수도 있지만 억지 인연이 될 터.
안 오면 그만이다. 그 또한 운명인 것을.
* * *
일 년 후, 월소려의 커다래진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뒤도 안 돌아본 여휘의 무심한 답이 흘렀다.
“왔느냐.”
유일하게 알려야 할 자가 이제야 왔다. 무륜이 딸로 키운 여인.
월소려는 여휘가 있는 곳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바람에 휘날려 엉킨 머릿결이 얼굴을 반이나 가렸지만 인식도 못 했다.
오만 가지 상상이 뇌리를 휩쓰는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십오 년 만에 찾은 이곳, 척고련.
어릴 적 고아인 자신을 딸처럼, 아니 딸로 키워 준 무륜.
그 옆에서 항상 웃음 짓던 여휘.
그 둘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이곳은 행복의 낙원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여인이 되어 가던 어느 날, 숙부에서 남자로 변해 버린 눈앞의 여휘.
숙부 무륜이 그걸 알았을 때의 허망한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가슴으로 키운 딸이지만 차마 그것까지 축복해 줄 수 없었던 무륜 숙부는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서던 그날 이후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때 떠난 이후 십오 년 만에 돌아왔는데 무륜의 흔적이 없어졌다. 방 안의 가재도구나 쓰던 물품 몇 개가 사라진 게 아니다. 언제나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던 침실과 집무실 전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억누르기 어려운 가슴 떨림이 입가를 열게 만들었다.
“무륜 숙부님 처소가 왜?”
“그놈한테 돈이 필요할지 몰라서 옮겼다.”
월소려는 무슨 말인지 의아했지만 먼저 확인할 게 있다.
“숙부님은……?”
“멀리 떠났다. 죽은 건 아니야.”
기쁨의 눈물 한 방울이 가만히 떨구어졌다.
‘다행이야.’
살아 계시면 됐다. 머물던 호남 악양에서 여기까지도 칠천 리가 넘는 길인데 멀면 얼마나 더 멀까, 찾아가면 그만인 것을.
“어디 가셨어요?”
“먼 곳이다.”
“……어디?”
“갈 수 없는 곳이다. 너도, 나도.”
“……?”
잠시 후, 여휘의 긴 설명이 끝나자, 그녀의 풀썩 무너진 몸이 바닥을 헤맸다. 눈가에 서서히 맺혀 가던 물기가 한순간 주르륵 흘러내렸다. 형언할 수 없는 후회가 밀물처럼 쏟아져 드는 덴 그럴 수밖에 없다.
“크흐흑! 흑흑! 크흑!”
얼마 전, 무륜이 만들어 준 빙옥섬수(氷玉纖手)의 화후가 화경을 넘는 순간 무인으로서 벅찬 환희도 잠시, 손에서 나는 빛을 보자마자 금세 입가가 이지러지고 격한 울음이 토해졌다.
무륜은 강한 무인이 되라고 빙옥섬수를 만들어 준 게 아니다.
어릴 적 자신은 무륜의 방과 집무실에 있는 걸 좋아했다.
-소려야. 놀 데가 없어 여기 있는 게야? 뭐라도 만들어 줄까?
-아뇨. 여기가 좋아요.
-왜?
-이 방 안에 푸른빛은 보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져요.
천설청옥(天雪靑玉)!
신강 서쪽의 만년설산에서 여 숙부가 의형검강을 시험한다고 빙하를 갈라내다가 찾았다는 그 청옥. 여 숙부가 무륜의 건강을 위해 통째로 갖고 와 온 방에다 깔아 놓은 그 빛. 세상 어떤 보석보다 비쌀 거란 말이 절로 실감 나는 색.
-이 빛이 좋아?
-예, 이 빛하고 평생 같이 있고 싶어요.
-……그렇게 해 주마.
-예? 어떻게?
-시간은 좀 걸릴 게다.
-……?
그러다 여길 떠나던 그날, 무륜이 말없이 건넨 게 빙옥섬수(氷玉纖手)다.
그런데 화경에 올라 그 빛나던 손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벽옥처럼 푸르스름한 광채가 뭘 말하는지. 무륜이 어릴 때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음을.
이별 선물이라 여겼던 그것에 무륜의 마음이 가득 담겼음을 깨닫는 순간, 정신없이 이곳 신강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그런데 가슴을 찢어 대는 이 아픔은 뒤늦은 후회와 부질없음을 알린다.
늦어 버렸다.
가슴 저 구석에 처박혀 문드러지고 후벼 파던 응어리들은 이젠 풀 방법이 없다. 여릿여릿했던 어둠이 칠흑이 될 때까지, 눈물에 점철된 회한은 십오 년을 그랬듯, 멈추지 않는 울음을 토해 냈다.
“크흐흑! 크흑!”
얼마 후, 마른 눈물에 눈꺼풀이 달라붙을 즈음, 지그시 깨문 어금니 사이로 뜨겁게 달궈진 숨이 뿜어졌다.
여휘의 말을 되새기다 떠오른 각오 때문이다.
벗인 여휘 숙부가 했듯 딸인 자신 또한 그럴 수 있으리라.
열기 서린 눈빛에 진중한 목소리가 흘렀다.
“저 갈게요.”
여휘는 마지막으로 물을 게 있었다.
“전할 게 있으면 다오.”
현생에 하지 못한 말, 아니 그 마음을 전하려면 스스로 하는 게 맞다.
“아뇨. 제가 전할 거예요.”
“알았다. 그래도 힘들면 찾아오너라.”
“제가 할 일이에요, 설사 전하지 못하더라도.”
여휘의 미소가 그윽해졌다.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이제 은야문(隱野門)의 문주인 그녀에게 부탁할 일만 남았다.
자신들을 도우려고 그녀가 은밀히 만든 정보단체 은야문.
그곳이라면 무륜에게 전할 말을 세상에 가장 잘 퍼트리리라.
“부탁할 게 있다. 세상에 내 이름으로 소문 하나 내 다오.”
“뭔데요?”
“첫 새벽(黎旦, 여단)을 만나러 가는 자, 나를 볼 것이다.”
여휘의 계획을 들은 그녀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거면 되겠네요. 알겠어요.”
새벽을 뜻하는 여단은 두 숙부 친구의 이름. 그를 만나려면 화장해 뿌린 망산 봉우리에 올라야 하는데 그건 무륜 숙부만이 안다. 그것과 여휘가 산 아래에 벌인 일이면 남긴 걸 찾을 수 있으리라.
여휘는 문득 그녀가 전하려는 게 궁금했다.
“넌 뭘 남기려느냐?”
월소려도 새로운 삶을 찾은 숙부라면 지금과는 달리 살길 바랐다. 한데 여휘가 선택한 그 길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그걸 도와줄 만한 게 자신에겐 있고.
“춤에 꼭 필요한 게 있잖아요.”
“……!”
이후 발길을 돌리려던 월소려의 시선이 여휘를 향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무륜 숙부였을까요?”
천하제일인도 못 건넌 경계를 늙고 허약했던 무륜이 갈 수 있었던 이유.
여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하늘의 뜻을 어찌 알까, 짐작만 할 뿐.”
“어떤?”
“난 경계를 넘었더라도 이 몸으로 갔을 게다. 놈은 늙은 육신이 버티지 못해 새로운 삶으로 갔고.”
잠시 생각하던 월소려의 말문이 진중히 열렸다.
“그 시대의 사람이 돼서 해결할 일이 있다는 건가요?”
“내가 가면 풀기는 쉽겠지. 하나 남이 해결해 준 게 그 세상에 체득돼서 이어질까? 하늘은 그 뜻이지 싶다.”
“……!”
순간 월소려는 여휘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무륜 다음으로 여휘의 능력과 성격을 잘 아는 그녀다.
“그래도 가 볼 생각이세요?”
여휘의 눈가가 아련해졌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뭔가 여운이 남는 말이다.
“그럼?”
여휘는 지금 눈빛 그대로 그녀를 마주했다. 아직도 홀로 걸음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 눈빛을.
“지난번처럼 인연의 빛이 다가온다면 또 모르지.”
“그럴 수 있을까요?”
“어찌 알까, 하늘이 정하는 것을. 그저 노력할 뿐이다.”
“……!”
다음 날, 천상천하 유아독존, 고금제일인이라 불렸던 무인이 강호를 떠났다.
하지만 여휘는 몇 번은 더 세상에 나와야 했다.
무륜과 자신이 남긴 인연의 굴레 때문에.
원하지 않았던 걸음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월소려 또한 그랬다.
두 숙부가 한 일을 왜곡하는 이들 때문에 몇 번 나섰다.
은야문주임을 감춘 탓에 세상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소수마후(素手魔后)라고.
하얗다 못해 푸르게 투명한 그 손 때문에 붙여진 별호다.
* * *
천 년 후, 중원 북쪽의 한 밀실.
“허! 척고련이란 곳에다 천마라 불릴 자가 따로 있었다니! 이 죽간에 있는 내용이 사실이요?”
“어찌 알겠습니까? 천 년 전 것인데.”
“하면 이걸 왜?”
“우리에겐 이 죽간이 천 년이나 된 게 중요할 뿐입니다.”
“……무슨 뜻이오?”
“이 기록을 잘 이용하면, 마(魔)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천마교와 혈교를 흔들 수 있을 겁니다. 거기다 갑자기 고금제일인이 나타나면 정, 사 양쪽도 혼란스러울 거고. 그 와중에 모색할 게 한두 개겠습니까?”
“호! 그거 괜찮구려. 그럼 이걸 언제쯤?”
“믿게 하려면 완벽하게 준비해야죠. 몇 년은 걸릴 겁니다.”
“……!”
* * *
같은 시각.
무륜(霧輪)이 눈을 떴다.
무윤(霧昀)이란 자의 몸으로.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