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왜 놈에게만 허락됐을까?’
여휘가 그 의문을 빛에게 던지길 수차례, 어렴풋이 환한 빛의 뜻 일부가 다가왔다.
‘난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았다.’
서기(瑞氣) 가득한 광휘의 빛이 전한 의지. 그제야 격랑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당장은 무륜을 구할 방법이 없다. 지금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친구를 배웅해야 할 때.
애써 띠운 옅은 미소가 여휘의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지금은…… 여기 있으마.”
빛 속으로 빨려 가는 무륜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래, 네가 있을 곳은 거기야.’
“하지만 널 찾아가겠다. 어떻게든!”
무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여휘의 눈빛이 뭘 말하는지 안다.
‘이놈아, 내가 넌 줄 알아!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하늘에서 보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을.’
여휘의 눈가에 아련함이 더해진 만큼, 빛에 싸인 무륜의 모습이 더 흐릿해졌다.
여휘의 눈도 따라 흐려졌다. 눈가에 차오른 물기 탓이다.
지금 바라는 건 하나뿐.
‘조금만……! 조금만 더!’
사라지는 친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는 것, 그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어느덧, 무륜과 뒤쪽 산봉우리가 합쳐질 것처럼 흐릿해져 갔다. 또 다른 친구 여단을 날려 보낸 그 봉우리다.
그 순간, 여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저거다!’
급히 내력을 올려 웅혼한 목소리를 빛 너머에 보냈다.
“망산(莽山) 동굴! 우리 은신처 알지? 그곳에 꼭 가거라. 잊으면 안 된다. 꼭!”
아무리 천년 후라도 둘만 아는 거기라면 갑자기 떠난 친구를 위해 뭔가 남길 수 있다.
하지만 무륜에겐 이미 악쓰는 여휘의 모습과 소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말이라 짐작만 할 뿐.
여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무륜의 표정이 말해 줬다.
‘못 들었어.’
무륜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았다. 흐린 빛 사이로 눈빛만 간신히 보낼 수 있음을.
이제 죽는 순간 하려고 했던 마지막 말을 전해야 할 때. 흐르는 세월 속에도 언제나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그 말을 눈빛에 담았다.
‘내 친구라서…… 고마웠다.’
무륜의 눈빛에 담긴 뜻을 왜 모를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느끼는 감정인데.
하지만 지금 여휘는 뱉어 내야 했다.
무륜의 늙은 몸이 점차 으스러지고, 영혼이 새 길을 찾는 게 보이는 지금은 그래야 했다.
차오르는 복받침을 그대로 쏟아 냈다.
“이놈아!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순간 엄청난 광휘와 함께 빛의 장막은 사라졌다. 마지막 한 점까지 불살라 버린 듯 홀연히.
샤아아!
친구도 떠나갔다.
* * *
한 달 후, 중원 하남의 대유학관.
이 시대 중원 최고의 현인이라 불리는 중유(仲遊)가 몇 년 전 설립한 곳.
“남길 말이 천 년을 가야 한다. 어찌하면 되느냐?”
“……?”
현인(賢人), 중유의 깊게 팬 주름이 색을 더했다.
모든 문이 닫힌 서재에 소리도 없이 들어온 불청객. 하지만 그 깊이를 자연스레 알려 주는 눈빛과 몸에 밴 기도는 범상치 않은 자임을 알린다.
나쁜 의도로 찾아와 장난 삼아 던진 말이 아니다.
‘천 년이라!’
여휘로서는 무륜이 새 삶을 찾은 것만 알 뿐, 어디에 사는 누군지 전혀 모른다. 다만 빛의 의지는 무륜의 기억을 살렸음이 확실하다.
그런 친구에게 어떻게든 말을 전할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남길 걸 전할 수 있으니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온 걸음.
중유의 눈이 깊어졌다.
이백 년 전, 세상에 뿌려진 공자(孔子)의 가르침에,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 이름 지은 노자(老子)의 사상까지, 모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해 이 시대의 현인이라 불리는 자신.
하지만 그런 자신도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
‘사연이 있을 터.’
중유는 차근차근 풀어 가기로 했다.
“누구에게 전할 말이오?”
“천 년 후 누구나 알아야 한다.”
중유는 옅은 미소를 피워 냈다.
“그대가 찾아온 걸 보면 내가 중원에서 꽤 유명한가 보오. 하나 그런 내 글도 백 년이나 갈까 모르겠소. 그런데 천 년이라.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다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오.”
어떤 생을 살건 무륜이 반드시 들어설 길이 있다.
“강호인이라 해 두지.”
“무림을 말하는 게요?”
“그렇다.”
중유는 짧은 정적 후에 화두를 던졌다. 이걸 알아야 답을 줄 수 있다.
“그대는 강호에서 어떤 사람이오?”
“내 위에 있는 자는 없다. 지금도, 이전에도.”
중유의 놀람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글쟁이인 그도 들어 본 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때 문득 떠오른 호기심에 눈이 반짝거렸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을 사는 이라 물어도 될 듯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거야.”
중유는 엉뚱한 호승심이 올라왔다. 아까 백 년이라 했지만 자신의 글도 삼사백 년은 가리라.
“얼마나?”
순간 여휘의 등 뒤로 여릿여릿한 빛이 오물거렸다.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면 이 정도는 풀어야 한다.
샤아아!
“한 천 년쯤.”
“……!”
강호에 문외한인 중유지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자신에게 뿌려지는 장엄함 빛의 광휘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하고도 남는다.
얼마 후, 중유는 진중한 표정에 그윽한 미소를 담았다. 이런 자라면 답은 너무나 쉽다.
“공자님 말씀 중 사단(四端) 인의예지(仁義禮智)나, 지금 서역에서 전해지는 불타(佛陀)의 진언, ‘나마스아미타브하!’는 천 년이 지나도 웬만한 사람들은 알 게요. 답이 됐소이까?”
[나마스아미타브하]는 나미아미타불의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지금은 한역된 불경이 거의 없는 시대.
여휘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어떻게 말을 남겨야 천 년 후 무륜이 들을 수 있을지 감이 왔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희망, 그걸 남기면 된다.
대신 담긴 뜻은 무륜만이 알아야 남길 것이 무사히 전해진다.
“쉽네.”
“그대라면!”
“고맙다.”
순간의 실수로 떠나보낸 평생의 친구.
여휘는 빛의 뜻을 어렴풋이 헤아리고는 무륜을 위해 뭘 해야 할지 고심 또 고심했다.
우선 무공은 필요 없다.
자신의 신기심의공(身起心意功) 또한 처음부터 무륜과 같이 만든 것. 직접 해 보고 토대를 세우면 무륜이 체계화했다.
무륜도 사 단계까지는 갔었다. 다친 몸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했을 뿐.
게다가 이건 각자의 길이 다른 무공이라, 시작 이후엔 혼자 알아서 가야 한다. 구결이나 영약으로 도울 게 없다.
다른 무공이야 자신보다 많이 아는 놈이고.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친구가 가장 원하는 걸 해 주면 된다. 천 년이나 벌어진 시간이라도.
‘내가 옆에 있어 주면 된다. 그게 가장 큰 선물이자 해야 할 일.’
바로 떠오르는 게 있다.
놈이 좋아하는 귀한 서책들을 필사해서 전하면 매번 그것을 보며 자신을 떠올리리라.
그것이 무륜과 가장 가까이, 오랫동안 있는 길이다.
마음 같아서야 가능한 모든 걸 해 주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빛의 뜻 또한 그렇지 않은 데다, 하나하나 스스로 풀어 가는 걸 좋아하는 놈이라 그 이상 바랄 리도 없다. 옆에 같이 있음으로 응원할 뿐 지나치게 간섭해선 안 된다.
내가 아닌 친구의 삶. 그것이면 족하다.
다만 고민되는 게 있다.
‘돈은?’
그 답을 줄 자가 있다.
* * *
며칠 후, 신강과 인접한 청해.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
“천 년 후에도 돈이 필요하겠지?”
이곳 최고의 상단, 자달목(柴達木)의 전(前) 련주 탑사륵의 웃음이 짙어졌다.
오랜 친구지만 신강과 청해의 주인인 자의 물음. 늙은 장사꾼의 혜안(慧眼)이 빛을 발했다.
“돈 없이 못 사는 세상이 될 걸세.”
“그럼 너 같은 장사꾼이 왕이겠구나.”
“흘흘! 물밑에서는 황제도 가지고 놀 게다. 그때는 무인들이 다 장사치 발아래 있을 게야.”
여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정도란 말이냐?”
“지금은 힘이 돈을 불러 모으지. 하지만 이제 곧 돈이 돈을 끌어당기는 세상이 올 게야. 이 험한 청해도 그럴진대 중원이야 말할 것도 없지.”
“천 년 후엔 나도 네 발밑에 있다?”
“허허! 절대의 무인이야 예외지. 그때도 돈만으로 만들 수도, 부릴 수도 없을 게야.”
“어쨌든 돈이 더 중요한 세상이라……. 난 별로군.”
“나도 맘에 들진 않네. 다만 세상이 그리 흘러간다는 게지.”
여휘는 묻고 싶은 화두를 넌지시 꺼냈다.
“참! 무륜, 그놈은 그런 세상을 좋아할까?”
탑사륵의 입가에 싱거운 웃음이 흘렀다. 생각할 것도 없이 빤한 모습이 그려진다.
“허허! 무륜이야 진저리를 치지. 무소유가 인생의 화두고 정의(正義), 자존과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친구 아닌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할 게야.”
여휘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자면 돈이 엄청 필요하겠군.”
“뜻을 세운다면 그렇겠지. 하나 처음부터 돈이 많으면 달리 살지 모르네. 자네들이 어릴 때 풍족했으면 지금처럼 살았을까? 난 아니라 보네.”
답을 찾은 여휘의 눈가에 불꽃같은 정광이 스쳤다.
“쓰고자 하면 쓸 수 있되,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돈이면 되겠어.”
“……?”
그렇게 전할 게 있다. 엄청난 돈이되 무륜이면 웬만해선 돈으로 쓰고 싶지 않을 물건, 천설청옥(天雪靑玉)이란 게 있다.
이젠 무륜이 자신을 회상하며 즐거워할 것만 있으면 된다.
그놈이 좋아했던 건 불경과 도경, 그리고 약초서.
거기에 재미 삼아 볼 몇 가지 더하면 된다. 예를 들면 다른 곳의 절대무공이라든가. 이미 자신의 무학을 정립해 다른 건 거들떠도 안 보는 놈이지만 심심풀이는 된다.
* * *
한 달 후, 중원 남쪽의 광동.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것이 무엇이냐?”
중원 최고의 사찰, 광동 영흥사의 전대 장문인이자, 불문 최고의 고승 반각은 눈을 껌벅였다. 갑자기 찾아와 선문답(禪問答)을 던지는 이.
다른 절의 고승도, 당대의 유명한 학자도, 초야에 은둔한 기인도 아니다.
하지만 감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불리는 자의 물음.
천산에서 모습을 감춘 지 십여 년이 넘었는데 난데없이 찾아와 묻는 질문이 장난일 리 없다.
현경에 다다른 자신이지만 상대의 몸에서 그 어떤 기운도 살필 수 없다. 그런데도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압박감이라는 건.
절로 속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허! 그새 거기까지 가셨소? 생사경이라…….’
그 긴 세월 부처님 말씀을 새긴 가슴이건만, 무인으로서 부러움과 경외감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자의 질문에 허투루 답할 수 없다. 그 뜻을 헤아리는 선문답이 흘렀다. 사물인지 의념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구하려는 게요? 알려는 게요?”
“뭐든 상관없다. 천 년 후에도 쓰일 것이면.”
한참을 생각하던 반각의 말문이 담담히 열렸다.
“빈승 입장에선 당연히 부처님 말씀부터 떠오르는구려.”
이미 여휘가 예상했던 답.
서역과 접한 천산이라, 무륜은 웬만한 범어 불경은 이미 탐독한 놈이다. 다만 이곳 광동은 해상으로 전해진 게 있을 터.
“바다 건너온 게 있으면 내놔 봐.”
고승 반각의 의아한 시선이 여휘를 향했다.
삼십 년 전 자신을 포함해 이곳 무승들을 혼자 박살 내고는 불경까지 태워 버리려던 그다. 그때 온갖 애걸복걸 끝에 간신히 말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럴 리 없다 여겼지만 묻기는 해야 했다.
“그대가 보려는 게요? 아니면?”
“그 냄새나는 걸 내가 왜 봐?”
“그럼?”
“친구 놈 줄 거야.”
그가 친구라 부를 자는 세상에 단 한 사람.
‘무륜!’
당시 이곳 불경이 무사한 것도 사실 무륜이 나서서 여휘를 말렸기 때문이다. 세상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여휘지만 그의 말만큼은 대부분 따랐으니까.
반각도 너무나 잘 안다. 만약 무륜의 생각이 지금과 달랐다면 중원 무림은 이미 없어졌을지 모른다. 아니, 그리됐을 것이다.
여휘가 군림은 하되 통치하길 원하지 않았던 무륜.
중원이 여휘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온전히 그 명맥을 이어 가고 다시 성세를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무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인가. 수십 년 동안 강호에 커다란 피바람이 일지 않은 것도 사실 그걸 원한 무륜 덕분이거늘.
그런 그가 요즘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나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살아 있다니 다행이로구나.’
그런 이유라면 어떤 불경도 아깝지 않다. 필사본을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인데.
“군사께서야 웬만한 건 다 보셨을 테니 추려 보겠소.”
“근데 한 천 년 정도는 삭지 않아야 한다. 가능하겠나?”
반각은 눈을 껌벅였다.
“천 년? 그건 왜?”
“그놈이 오래 살 거 같거든.”
“……?”
여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불경이라면 질색하던 자신이 뭘 했는지 안다면 박장대소할 놈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