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라 불린 내 친구
1화
중원 하남의 대유학관.
천 년을 이어 온 유서 깊은 학문(學問)의 도장.
“뭐라? 그럼 지금 천마라 불리는 자도, 천마신공도 가짜란 얘기 아닌가?”
“여기 천 년 전 죽간(竹簡)의 내용으론 그렇습니다.”
“허! 이게 사실이면 세상에 없던 고금제일인, 그것도 사상 처음으로 강호를 평정했던 자가 따로 있었다는 건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 보십니까?”
“그 죽간은 천 년 전 이 학관의 설립자이신 중유(仲遊) 님이 남긴 것 아닌가. 강호를 잘 모르신다 하나 허튼 기록을 남길 분이 아니지.”
“한데 천 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요? 전 강호란 곳을 잘 몰라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진실이 감춰질 때가 많지. 한데 만약 이런 기록이 더 있어 사실로 회자된다면? 그땐 천 년간 쌓아 온 강호 질서를 뿌리째 흔들어 버릴 것이네.”
“그렇습니까? 한데 그거야 강호 무부(武夫)들 일 아닙니까?”
“거기에 국한되면 얼마나 좋겠나. 한데 이런 사안이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네. 그 걱정인 게지.”
“그럼 이 죽간은 어찌할까요? 옛 서고 정리는 저만 하던 차라 다른 이는 모릅니다만.”
“강호 일이니 우리가 나설 게 아니지. 하나 또 모르니 잘 보관하고 있으시게.”
“알겠습니다.”
“참! 그 고금제일인 이름이 뭐라 했나?”
“여휘(餘輝)라 했습니다. 군사란 자는 무륜이라 했고요.”
“여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빛이라. 허허! 꼭 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으려 지은 이름 같구먼. 정말 그리되려는 것인가?”
이 시대의 현인(賢人) 중 하나로 불리는 조자헌의 한숨은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허! 망각 속에 있던 진실이 다시 살아나 세상에 기억된다면?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거늘. 게다가 그 꼬인 실타래가 아직 남은 것이라면 더욱이.’
* * *
천 년 전.
중원의 서북쪽 끝 신강(新疆).
‘세월이 어찌 이리 빠를까!’
천산(天山)의 새하얀 만년 설산 위, 밤 따라온 초승달이 속살거리듯 노인의 마음을 핥았다. 옥빛 빙하 호수에 담긴 별 무리 반짝임도 눈가의 시름을 부추겼다.
외로운 노인, 무륜의 입가에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 겨울이구먼.’
기나긴 겨울 삭풍(朔風)을 예고하듯, 초원의 풀잎 바람도 몸을 웅크리게 만든다. 서서히 산자락 넘어가는 선홍빛 노을도 차디차게 느껴지는 늦가을.
깊어 가는 어둠과 흩어진 별빛이 심란한 마음을 부채질했다. 돌아본 기억엔 흐뭇함보다 뒤늦은 후회와 한이 아픈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찔러 댄다.
무륜은 스스로 그 답을 내렸다.
‘늙은 게지.’
나이 든 게 아닌 늙음이다.
그 긴 세월 비우지 못했던 욕심을 이제야 훌훌 털어 버렸지만, 흐르는 강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둠을 더해 차가워진 바람이 시린 무릎을 저미며 칠순이 다 된 노인임을 알렸다.
하지만 인생이란 무게가 가져다준 그 짙은 회한에도 삶의 덩어리를 파헤쳤던 눈빛은 깊고 그윽했다.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니.
머리를 가벼이 휘저어 마음을 다스렸다.
‘쓰리고 아픈 기억이 더 깊게 뿌리내리는 법.’
* * *
잠시 후.
무륜이 남모를 감회를 안고 대전 깊숙이 들어오던 순간,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은 온유한 미소 대신 씁쓸함이 자리했다.
그건 평생의 친구 여휘 때문이다.
죽마고우로 만나 평생을 같이한 벗. 한데 요즘은 예전에 없던 잔소리만 늘게 하는 놈.
특히나 환골탈태 후 탱탱해진 놈의 얼굴, 그걸 볼 때면 절로 심사가 뒤틀린다. 어느새 속 좁아진 노인이 돼 버렸다.
‘그놈 얼굴 참!’
거친 세파를 우리 힘으로 헤쳐 가자고 척고련(滌苦聯)을 세운 지도 어언 삼십 년.
천산 척고련의 련주 여휘.
군사였던 자신, 무륜.
그랬던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다 물려주고 뒷방 늙은이가 된 지도 벌써 오 년이다.
순간 무륜의 눈썹이 한껏 휘어져 올랐다.
‘저놈이 또!’
환술에 미친놈들을 죽이고 가져온 기문진법, 그게 깔려 있는 밀실에 또 놈이 있다.
처음엔 여휘가 재밌겠다며 심심풀이로 만든 공간.
한데 요즘 들어 자주 있는 게 심상치 않다. 예의 잔소리가 또 입가를 흔들었다.
“이놈아, 작작 좀 해. 또 무슨 사달을 일으키려고 잡스러운 짓을 하는 게야!”
명색이 천뇌(天腦)라 불리던 자신이다. 강호 무공을 가장 많이 안다고 붙여진 별호. 한데 여휘가 현경을 넘고서 하는 짓은 매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처음엔 저 짓도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있으니, 대놓고 윽박지를 수도 없다.
약관의 젊은이로 보이는 여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호! 눈속임이라 할 땐 언제고 이젠 저 공간을 믿는 게냐?”
“크흠! 믿는 건 아니고 살펴볼 필요는 있음이야.”
“허! 그놈 참! 말 꼬는 거 하고는.”
무륜은 눈을 부라렸다.
“이놈이! 그 공간을 인정하는 건 세상의 질서를 파괴함이야. 학사로서 어찌 그리 경거망동한단 말이냐?”
여휘는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네놈에겐 파괴일지 몰라도 내게는 진리 탐구니라.”
“그건 그렇다 치고! 그걸 열어서 어쩔 셈이냐? 들어가 보기라도 하려고?”
“지금은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밖에 몰라. 앞서가지 마라.”
무륜은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웃기는 소리.’
평생을 같이한 친구, 그 말버릇을 모를 수 없다. 저건 되면 무조건 한다는 소리다.
무륜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말리고 싶었다. 그 거친 세파를 헤치며 육십 년을 같이했는데, 여휘가 떠나 버리면 그나마 남은 생의 미련도 없어지리라.
그 우려 반, 걱정 반이 담긴 진중한 말이 흘렀다.
“세상의 균형을 깰 수도 있음이야. 심사숙고해라.”
여휘는 짜증스러운 표정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놈의 심사숙고! 그 소리 몇 번째인 줄 알지?”
잘 안다. 하지만 저놈 장단에 맞춰 줄 이유가 없다.
“글쎄.”
“중원을 박살 낼 때도 그랬고, 운남을 불태우고 북해를 녹일 때, 서역 놈들을 빙하 호수에 처넣을 때도 넌 그랬다.”
“갑자기 자랑질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누가 아니라더냐? 예전이야 그렇다 치고, 이젠 강호에 군림하는 놈이 좀 봐주고 살면 어때서, 매번 멱을 다 따 버리니 했던 소리지!”
“같이한 놈이 할 소린 아니지.”
“아니까 하는 소리다. 더 말렸어야 했거늘. 휴! 몸이 늙으니 후회도 많아지더라. 너도 같이 늙어 갔으면 알 것을.”
“미안하다, 이놈아. 같이 못 늙어 가서.”
두 번의 환골탈태는 여휘의 몸만 바꾼 게 아니다. 생각과 행동까지 젊어진 그에겐 다가오지 않는 소리다. 게다가 앞으로 오십 년은 더 이 몸일 텐데.
하지만 여기서 더 하면 늙은 친구를 슬프게 한다.
“들어가서 쉬어라. 난 더 살펴보련다.”
“네놈 세월은 좀먹지도 않는데 뭐가 그리 급할꼬, 쯧쯧!”
“……!”
아까만 해도 세월의 빠름을 한탄했던 무륜.
한데 지금은 전혀 다른 말을 내뱉어야 한다.
친구 여휘는 세월을 거스른 놈이니까.
* * *
삼 년 후, 어느 날 밤.
무륜은 이상한 기운에 눈을 떴다.
우우웅! 위이잉!
‘이게 무슨?’
자연스레 발걸음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했다.
터덕터덕!
어느 순간,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던 손이 멈춰 버렸다.
‘여긴!’
기문진법을 깔아 놓은 밀실.
밖으로 퍼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두 눈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그래도 저 공간에 급히 뛰어들면 안 된다. 갑작스럽게 난입하면 현경에 든 여휘라도 위험할지 모른다.
서서히 문을 열고는 숨죽여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락!
그렇게 안을 살피는 순간, 무륜의 눈이 부릅떠졌다.
‘헉!’
포말로 부서지는 물결처럼 사방으로 비산하는 광휘가 눈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휩싸인 여휘까지.
환한 햇빛을 가슴 가득 껴안은 모습.
사아아! 샤아아!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다. 다급한 고성과 함께 발이 절로 움직였다. 삼십여 년 전 여휘를 구하려 달려들 때처럼 고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본능이나 마찬가지.
타다닥!
“멈춰!”
여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지 살필 필요도 없다. 여기 들어올 자는 하나뿐이니까.
‘무륜!’
지금은 빛의 기운과 힘겨운 줄다리기 중이다.
두 시진 전, 밀실을 조금씩 밝히던 빛의 존재를 깨달았다.
의아했다. 한 번도 이런 빛은 나온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일은 시작됐다.
처음엔 살펴볼 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한데 어느 순간 빛 너머로 보이던 풍경은 그런 마음을 단숨에 바꾸기에 충분했다.
‘망산(莽山) 그 봉우리!’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풍광.
무륜과 또 다른 친구 여단(黎旦), 그 셋이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던 호남의 최남단 침주(郴州).
그곳 망산(莽山)의 맑은 구름 낀 봉우리다. 먼저 떠난 그리운 친구, 여단을 바람에 날려 보낸 그곳인데.
인연이라 여겼다.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온 내력과 의념을 다해 들어가려던 것인데.
공간 앞에 있는 장막은 그 빛 다해 자신을 거부했다.
두 시진 넘게 사투에 가까운 힘을 쏟았다. 대해와 같은 내력도 거의 바닥이 난 이때, 무륜이 다가오면 어떤 변화와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여휘 자신이야 현경을 훌쩍 뛰어넘은 데다 죽음 또한 언제든 각오한 몸. 걱정은 온통 늙고 허약해진 무륜 뿐이다.
하지만 거대한 빛의 압력은 토씨 하나 내뱉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 무륜이 다가올 걸 아는 여휘는 그저 속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다친다, 이놈아. 오지 마!’
하지만 예상대로다.
헐레벌떡 뛰어온 무륜의 두 손은 허공의 빛을 향해 마구 저어졌다.
“안 돼!”
휘릭!
순간, 현경의 무인을 거부하던 빛의 장막이 일렁거렸다.
위이잉!
빛과 여휘 사이를 향했던 무륜의 몸이 빛의 공간으로 사르륵 스며들었다. 들어오는 걸 반기듯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여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찌!’
감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불리는 자신이다. 그런 이의 힘을 거부하던 빛인데, 늙은 무륜의 몸은 허공을 지나듯 빛의 장막을 넘어섰다.
자신을 구하다 다친 후론 머리로만 무공을 아는 무륜인데.
얼마 후, 무륜의 몸이 거의 넘어갈 즈음, 여휘의 몸을 옥죄던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제야 여휘는 급히 내력과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안 된다! 내 손을 잡아라!”
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빛의 기운은 또다시 여휘를 거부했다.
그때 빛에 잠겨 가던 무륜의 고개가 돌려졌다. 아련한 눈빛이 친구를 향했다.
‘여휘야!’
여휘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뭘 하려는지 안다. 눈빛만 봐도 아는 친구니까.
무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영혼의 불꽃같은 빛이 알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음을. 암담한 마음은 속 깊은 허망함을 불렀다.
‘허! 이리되다니!’
하지만 나설 때 이미 각오한 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밀어닥쳤지만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다. 남아 있는 여휘를 다독이고 이별하는 것.
지금은 그래야 한다.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고 입가엔 아련한 미소가 흘렀다.
친구를 향한 눈에 진정을 담았다.
‘이놈아, 내 몫까지 오래오래 살아!’
여휘의 눈도 세차게 떨렸다. 지금은 어찌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무륜아!’
언제 흘렸는지 생각도 안 나는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온몸 가득한 분노가 타올랐다. 환골탈태한 몸이건만 꽉 쥔 손에선 핏물이 새어 나왔다.
악에 받친 고함이 밀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기다려라! 내가 따라가마! 꼭 가마! 꼭!”
무륜의 고개는 살며시 저어졌다. 말은 들리지 않지만 무슨 말인지 빤하니까. 그저 눈으로 답했다.
‘여휘야. 친구로서 마지막 부탁이다. 오지 마라. 넌 거기 있어야 해. 그래야 그 세상이 평온해. 절대 오면 안 된다.’
눈빛의 의미를 아는 여휘의 고개가 단호히 저어졌다. 감히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자의 웅혼한 음성이 흘렀다.
“나는! 간다!”
무륜이 있었기에 여휘, 자신도 있었던 인생.
평생을 같이 울고 웃었던 벗이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릴 때도 무작정 구하러 달려들던 친구다.
다 늙어 빠진 저런 허약한 몸에도 무작정 나섰던 놈이다.
그런 친구다.
천하제일인이란 위명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
그런 친구를 이렇게 떠나보낼 수 없다. 그것도 한순간 정신을 흩트린 자신 잘못으로.
우선 의아함부터 풀어야 한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의문.
‘왜 저놈만?’
무륜에게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은 이미 현경을 훌쩍 넘어 생사경을 앞에 뒀다. 그저 늙은 무륜의 한숨이 깊어질까 감추고 있었을 뿐.
그런 자신도 항거할 수 없는 빛의 힘인데.
그제야 차분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길 한참.
여휘는 문득 무륜 뒤로 보이는 망산 봉우리에 눈이 갔다. 순간 더할 수 없이 눈이 빛났다.
‘다르다.’
분명 두 사람의 친구인 여단이 죽자, 화장해 바람에 날렸던 망산(莽山) 봉우리인데, 뭔가 느껴지는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여휘는 얼마 되지 않아 그 차이를 깨달았다.
‘분명 그 봉우리다. 한데 바위가 깎이고 새겨진 글이 저렇게 흐릿해졌다는 건.’
천재지변으로 바뀐 모습이 아니다. 저런 변화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뜻한다.
그것도 수십 년이 아닌 수백 년은 족히.
아니, 천년이라 해도 될 듯했다.
그런 곳으로 가는 길이 자신이 아닌 늙은 친구에게 허락됐다.
‘왜?’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