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후 코인 재벌 170화
전통의 금융 강자인 JP모간이 승리할 것이냐, 아니면 신성 IT 기업인 WHTS컴퍼니가 승리할 것이냐.
금융계의 미래 먹거리를 두고 펼치는 신구 싸움이 될 것이란 전망이 있었지만, 결과는 JP모간이 기권하면서 WHTS컴퍼니의 부전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소 김빠진 결과가 나오자 전문가들은 WHTS컴퍼니의 파생상품까지 판매 부진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릴 쏟아냈다.
WHTS컴퍼니 본사 8층 대회의실.
영화관처럼 배치된 테이블에는 50여 명의 투자사 대표들이 모여서 발표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대기 시간에 참석자들끼리 잡담이라도 나누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삐익-
마이크가 켜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실내를 가로지른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신우혁입니다.”
짧은 인사말만 내뱉었음에도 회의실을 채우고 있던 공기가 한층 더 가라앉는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농담부터 꺼낼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이번 가상화폐 파생상품은 역대 최대 투자금이 투입된 프로젝트.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만큼, 모두의 신경이 날카롭다 못해 송곳의 끝처럼 예민해진 것 같다.
“서론은 생략하고 제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일 출시된 파생상품 판매 현황과 향후 계획을 알려드리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로는…….”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뜸을 들이다 입을 뗀다.
“WHTS컴퍼니의 경영진 및 경영 방식 변동 건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경영 방식 변동은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사안인지라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회의실 가장 앞자리에 앉은 중년인이 번쩍 손을 든다. 이번 프로젝트의 최대 협력사인 소프트포우의 신정의 회장이었다.
“경영진 변동이라니,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린가? 판매 실적이 안 좋게 나왔다고 한들, 실패 한 번으로 경영진이 물러나면 앞으로 WHTS컴퍼니를 어떻게 믿고 돈을 맡기겠어?”
신정의 회장에 이어 바로 옆에 앉은 피닉스 파이낸셜의 존 로만 CEO와 사우디 펀드의 압둘하비 대표도 발언에 나섰다.
“신정의 회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투자자들이 누굴 보고 투자를 결정했겠습니까? 전부 대니얼 신의 투자 감각을 보고 투자한 것입니다!”
“나도 동의하는 바요. 대니얼이 경영에서 물러나면 우리 사우디 펀드도 투자금을 회수하겠소.”
WHTS컴퍼니의 최대 투자자들이 앞장서서 의견을 내자, 이에 질세라 다른 투자처들도 옹호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시장통처럼 변해버렸다. 보다 못한 내가 도중에 말을 자르고 해명을 내놓는다.
“여러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대표직에서 사임하지 않습니다.”
투자자들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특히 앞장서서 이의를 제기했던 신정의 회장은 얼굴에 물음표가 100개는 찍힌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표직 사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분명히 아까는 경영진 변동이라고…….”
“전혀 아닙니다. 우선은 우리 파생상품이 실적 미달이라는 헛소문부터 바로 잡아야겠군요.”
“실적 미달도 아니라고?”
“파생상품 실적 미달은 언론사들의 근거 없는 허위 뉴스며, 실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의실에 미리 배치해 둔 대형 스크린을 톡톡 두들겨서 화면을 켠다.
화면에는 DT코인 레버리지X4 상품의 판매 예상치와 실제 판매량을 비교한 그래프가 떠 있었다.
“예, 예상 실적의 220%? 그럼 1조 달러가 넘게 팔렸단 말인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결과가 나오자 신정의 회장은 물론이고,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입을 떡 벌린다.
“이토록 결과가 좋게 나왔는데 경영진 사임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당연히 승진 소식이 나와야겠지요.”
나는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옆을 돌아본다. 그곳엔 살짝 긴장한 듯한 이소영이 앉아 있었다.
“이소영 부사장은 이번 파생상품 프로젝트를 기획부터 개발, 운영까지 모든 업무를 성공적으로 이뤄냈습니다. 이에 그녀의 직급을 사장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가상화폐, 금융, 재무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겠습니다.”
그녀는 일어나서 투자자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와 함께 축하 인사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프로젝트팀에 참가했던 직원들의 승진 소식을 줄줄이 발표한다.
투자자들의 호응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긴장했던 직원들의 표정에도 한결 여유가 생긴 모습이다.
“자, 다음은 WHTS컴퍼니의 경영 방식 변경에 관한 건입니다.”
축하 일색이던 들뜬 분위기가 빠르게 전환된다.
“이번에 출시한 파생상품은 이름에서 언급된 것처럼 4배의 가상화폐를 운용하는 상품입니다. 즉, 1조 달러의 투자금이 파생상품에 들어왔다면 4조 달러의 가상화폐가 발행된 거나 마찬가지지요.”
4조 달러.
가상화폐 전체 시가총액과 맞먹는 엄청난 액수다. 그래서인지 잠시지만 장내가 술렁거린다.
“저희에게 막대한 투자금이 몰렸다는 것은 그만한 성과를 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것도 연간 17%를 웃도는 성과를 내야 한다.
누가 봐도 미친 소리였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기적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WHTS컴퍼니는 공격적인 투자로 테슬라모터스를 인수했고 애플사의 최대 주주가 됐습니다. 제가 다음은 어떤 기업을 선택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지금까지의 WHTS컴퍼니는 모든 투자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왔습니다.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굴리는 돈의 규모가 10배, 20배가 됐을 때도 가능하겠습니까?”
질문을 받은 참석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는다.
“투자금의 규모가 커질수록 보안이 중요해지는 건 맞아. 큰돈이 움직이면 필시 이용해 먹는 세력이 나타나는 법이니까.”
“WHTS컴퍼니가 지금껏 이상했던 거죠. 세상에 어떤 투자사가 실시간으로 포트폴리오를 공개해요?”
“그래도 자금 흐름을 갑자기 비공개로 바꾸면 신뢰성을 의심받지 않을까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도 혐의없음으로 나왔다면서요? 그거면 된 거 아닐까요.”
“핵심은 포트폴리오 공개가 투자에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거요.”
길고 긴 논의가 오간 끝에 결과가 한 방향으로 정리된다.
“앞으로 WHTS컴퍼니의 투자 과정이 비공개로 전환되는 것에 찬성하시는 분은 기립해 주십시오.”
투자자들이 우르르 일어선다. 놀랍게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참석자 50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예상했던 결과임에도 실제로 마주하자 묘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모두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만족감이 듦과 동시에, 이들의 등에 내가 손 수 칼을 박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양립한다.
“표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50명 전원 찬성으로, 향후 WHTS컴퍼니의 투자 과정은 비공개로 전환됨을 알려드립니다.”
* * *
가상화폐 파생상품은 전문가들의 우려와 달리 나날이 판매량 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간 17%에 달하는 이자를 지급하는 상품은 경제가 파탄 난 국가의 예금 금리를 제외하면 불가능한 것이었으니.
눈치를 보던 투자사는 물론이고, 나중엔 각국의 연기금까지 가상화폐와 파생상품의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가상화폐에 연기금이 유입된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한때 3조 달러 수준이었던 도토리코인의 시가총액은 판매 1년 만에 5배 수준인 15조 달러를 상회했으며, 덩달아 WHTS컴퍼니가 소유한 기업 가치까지 치솟게 된다.
-WHTS컴퍼니가 미국 최대의 군수업체인 록히드 마틴의 지분을 매집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전문가들은 WHTS컴퍼니가 록히드 마틴이 소유한 기술 특허를 노린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ASML에 거액을 투자한 의문의 투자사가 화제입니다. ASML은 반도체 노광장비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WHTS컴퍼니의 자회사인 L&P가 보스턴 다이노믹스를 인수했습니다. 예상 인수 가는 2조 원이 넘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드론으로 유명한 중국기업 DJL이 테슬라모터스와 400조 원 규모의 투자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입니다. 이번 협약으로 양사는 배터리와 소형 비행체를 공동 개발하게 됐습니다.
-이번은 제약입니다. WHTS컴퍼니가 화이자와 모더나, 존슨앤드존슨의 주식을 대량 매집했다고 알려지면서 제약 관련주가 덩달아 치솟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규모가 크다 싶은 투자 소식에는 전부 WHTS컴퍼니나 자회사 이름이 언급됐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실제로 인수한 기업 목록은 알려진 것보다 배 이상 많았다.
거칠 게 없는 투자 배경에는 파생상품 판매로 들어온 막대한 투자금과 함께 비공개 투자 권한이 버티고 있었다.
돈을 쓰면 그보다 많은 돈이 투자금으로 들어왔고, 다시 돈을 쓰고 돌아서면 더 많은 투자금이 모여 있다.
돈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고객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투자금이다.
투자를 받은 이상 수익을 내야 했기에, 나는 온종일 어디에 돈을 쓰면 좋을 지로 고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으아. 우혁아, 나 죽겠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진짜 단명하겠어.”
대표실 문을 열고 박태식이 들어온다.
녀석은 들어오면서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잔 깔끔하게 비울 때까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앓는 소리가 기네. 미국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말도 마라. 록히드 마틴 기술 유출 건으로 미국 국무부까지 끌려갔다가 온 참이다.”
나는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던 손을 멈추고 녀석을 쳐다본다.
“국무부에서 뭐 때문에 불렀대?”
“자기네 기술이 어째서 우리 드론에 탑재됐냐고 묻더라고. 처음엔 잡아뗐는데 그 자리에서 추진체 비교 영상까지 틀어주더라니까.”
“원래 같이 일하다 보면 알음알음 배우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면 걔들이 잘도 이해해 주겠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반대편 소파에 걸터앉는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어?”
“중국 업체에 기술 안 넘기는 조건으로 합의 봤지.”
“어? 그거 벌써 DJL 측에 넘겼는데?”
박태식의 얼굴색이 실시간으로 거무튀튀하게 변해간다.
“농담이야. 걔들이 뭐 이쁘다고 기술을 넘겨주냐.”
“야! 심장 멎는 줄 알았잖아!”
농담에 이어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가 투자로 연결된다.
“우혁아, 그런데 최근 투자 흐름 말이야. 좀 위험한 거 아니냐?”
“뭐가?”
“올해도 거의 다 저물어가는데 투자 수익이 마이너스잖아. 투자는 길게 봐야 한다지만 2년 연속 마이너스는 좀…….”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내가 괜히 파생상품 만기를 5년으로 잡아뒀겠냐.”
파생상품 만기일은 2023년 10월.
앞으로 3년도 넘게 남았기에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그 전에 투자 대박이 터진다는 뜻이야?”
“대박까지도 필요 없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쏟아질 거다.”
전 세계를 강타하는 코비드 사태가 터지면 갈 곳을 잃은 현금들이 가상화폐 판으로 유입된다.
그때가 되면 투자금 부족이 아니라 투자금 과잉을 걱정해야 할 터.
‘진짜 위기는 투자 자산의 버블이 꺼지고 파생상품 만기가 돌아오는 코비드 사태 이후부터야.’
그 시기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가상화폐는 투기성 자산이 아니라 진정한 화폐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