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165화 (165/174)

출소 후 코인 재벌 165화

-흐핫핫핫. 우리 파생상품 약발이 제대로 먹혔어. 개인 투자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관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정의 회장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찐득하게 묻어난다. 이번에 출시한 레버리지 상품의 시장 반응이 워낙 좋아서 그런 것이리라.

“벌써 접촉을 시도한 업체가 꽤 있었나 봅니다.”

-있었고말고. 모가지가 빳빳하던 것들이 회사까지 찾아와서 굽실거릴 정도면 끝난 거 아니겠나? 핫핫핫핫!

신정의 회장의 웃음소리가 다시 커진다. 어찌나 호탕하게 웃어대는지 저러다 숨넘어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고위험 상품이라서 월가에서는 당분간 관망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반응이 빨리 나올 줄이야. 정말 자네 말대로 됐구먼.

“가만히 있다간 경쟁사에 밥줄을 다 뺏기게 생겼는데 별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일세. 월가랍시고 추켜세워주는 인간은 많지만 그래 봤자 근본은 영업사원인 게야.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승강기에 올라타서 버튼을 누르고, 느릿하게 문이 닫히는 동안 다시 신정의 회장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허허. 이렇게 반응이 폭발적일 줄 알았으면 취급 수수료를 더 받을 걸 그랬어.

“가상화폐에 현금을 5년이나 묶어두는 상품이잖습니까. 수수료가 너무 높으면 매리트가 떨어집니다.”

-그럴 리 없네. 나 같으면 어쭙잖은 회사채에 돈을 쑤셔 넣느니, 우리 파생상품에 투자할걸세.

그러고 보니 국내 기업에서도 파생상품에 투자하겠다고 연락이 왔었다.

오성그룹을 시작으로 대현, SG, LK그룹까지 주로 재벌가 쪽이 적극적이었다. 아무래도 총수 일가의 개인 자산을 굴릴 용도로 가상화폐를 택한 듯했다.

‘이 양반들이 겁도 없지. 요즘 5년이면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인 것도 모르고.’

어느새 승강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정면에 보이는 집무실 앞에서 비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변경 사항이 있으면 오전 회의 끝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겠네.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러는 동안 비서가 서류를 한가득 들고 내게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금일 개발팀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두껍군요.”

“이소영 부사장님의 몫까지 결재가 올라가서 그렇습니다.”

서류를 따라가던 내 시선이 비서 얼굴 쪽으로 넘어간다.

“음? 이소영 부사장 서류가 왜 여기 있습니까?”

“부사장님은 어제 오후 늦게 조퇴하셨습니다. 오늘도 안 나오신 걸 보면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듯합니다.”

이소영은 회사에서 장려하는 연차 휴가조차 반납하고 출근할 정도로 지독한 워커 홀릭이었다.

그런 그녀가 돌연 조퇴에 결근까지 했을 줄이야.

‘신규 시스템 개발 일정이 빠듯해서 많이 피곤했을 거야. 자기가 제안한 프로젝트라 부담감도 컸을 거고.’

바로 전화부터 걸고 본다. 그러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자동응답 메시지만 돌아올 뿐이다.

진짜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불안함에 비례해서 안 좋은 상상들이 계속 몸집을 불려간다.

“혹시 어디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그런 연락은 따로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았으면 그녀의 개인 오피스텔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결재판과 서류 뭉치를 다시 비서에게 떠넘긴다.

“오전 회의는 저녁으로 연기하겠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나가야 하니까 차 빨리 준비해 주시고요.”

* * *

어제의 이소영은 최악의 컨디션으로 하루를 보냈다.

처음엔 마른기침이 나오더니, 점점 머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여기에 열감과 오한까지 겹치는 바람에 일찍 퇴근길에 올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편의점에서 사 먹은 감기약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

잠들었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까지 떠 있었다.

시곗바늘 숫자는 11이 코앞이다. 너무 늦어서 그런지 서둘러야겠다는 생각보다 체념이 앞선다.

“오전 회의는…… 이미 끝났으려나.”

이소영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서 침대 옆에 떨어진 외투를 주워들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어제 경황이 없어서 충전도 까먹은 모양이다.

그녀는 힘겹게 충전기를 연결하고 전원을 켠다. 오후부터 출근한다고 비서실에 연락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먼저 메시지의 홍수가 쏟아진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부재중 전화 알림과 메시지 도착 알림이었다. 이 알림음은 대부분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우리 대표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6번 도착했습니다.]

[우리 대표님 : 소영 씨, 어제 조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습니까?]

[우리 대표님 : 통화를 하고 싶은데 전화가 꺼져 있네요. 문자 보면 꼭 연락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리 대표님 :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군요. 제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었으면 합니다.]

이소영은 도착한 메시지를 전부 읽어 나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글귀 하나하나마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마음이 전해져서였다.

“헤…….”

이소영은 그가 걱정할까 봐 잽싸게 답장을 입력한다.

[나 : 휴대폰을 이제 확인했네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약 먹고 잤더니 이제 괜찮아졌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거의 몇 초 만에 칼같이 답장이 돌아온다.

[우리 대표님 : 집에 계셨습니까?]

[나 : 네. 방금 일어났어요.]

[우리 대표님 :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제가 소영 씨 오피스텔로 가겠습니다.]

이소영은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우리 집에 온다고?”

어젠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서 쓰러졌기에 씻지도 못했다.

당연히 머리는 산발이고 화장은 지우지 않아서 떡 진 그대로였다. 게다가 방도 엉망진창이었으니.

“이런 곳에 대표님이 오게 둘 순 없어. 절대 안 돼.”

이소영은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오지 말라는 내용을 최대한 둘러서 표현했다. 그러나 메시지를 읽었다는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쩔 줄을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전화벨까지 울린다.

베네수엘라에서 걸려 온 국제전화였다.

-엥. 전화 받네?

수화기 너머에서 제시카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제시, 무슨 일로 전화했어?”

-아프다고 하길래 연락했지.

“어젠 많이 힘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괜찮아졌어. 약 효과가 좋더라.”

-약? 드러그(drug)?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종합감기약이야.”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감기약인 줄 알면서 놀리려고 물어본 게 분명했다.

“제시, 내가 일이 있어서 그러는 데 나중에 다시 통화해. 알겠지?”

-아픈 사람이 무슨 일? 혹시 우혁 때문이야?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멈칫거린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우혁이 방금 내게 전화했거든.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고 했지. 그런데 전화하는 내내 목소리가 아주, 걱정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더라고. 듣는데 질투가 나더라니까.

“에이, 무슨 질투야. 나랑 대표님은 그런 사이 아니야.”

방금까지 살랑거리던 제시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가라앉는다.

-소영, 최근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고약한 농담이었어.

“농담이라니?”

-둘이 그런 사이 아니라는 거. 지금쯤이면 결혼하고 낳은 아들이 손주까지 봤을 시간이잖아. 그런데 아직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말을 듣다 보니 그가 주말에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것도 아주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주말에 약속까지 따로 잡아서 진지하게 해야 할 이야기.

머릿속에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고백? 에이, 아니겠지. 그냥 이번 시스템 개발 건으로 만나자고 했을 거야. 그런데 일 이야기를 주말에 만나서 할 필요가 있나?’

그때 잠시 잠잠하던 제시가 무심하게, 폭탄을 툭 던진다.

-너희들 섹스는 했지?

“무, 무슨 소리야!”

-설마, 아직이야? 아니면 잠은 잤는데 손만 잡고 있었다거나……?

“아, 아, 아니. 아니. 아니. 나는 그런 건 전혀 아니고.”

이소영은 제시카가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다행이네. 진짜 손만 잡고 잤으면 성 정체성 상담을 해주려고 했거든. 가끔 남자보다 여자에게 끌리는 애들이 있더라고.

“농담하고 있을 시간 없어.”

-농담 아닌데?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옅은 현기증까지 나는 것이, 몸 상태가 다시 어제로 돌아간 느낌이다.

“약 먹어야겠다. 이만 끊을게.”

-그래. 푹 쉬어.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러자 그녀가 잠시 잊고 있던 현실감도 함께 돌아왔다.

“맞아, 대표님!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다고 하셨었는데.”

할 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등졌던 한 단어가 떠오른다.

“고백…….”

* * *

“들어오세요. 대표님.”

이소영의 개인 오피스텔에 도착한 뒤, 현관 앞에서 30분이 넘게 기다린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죄송해요. 밖에서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어서…….”

안에서 쿵쿵거리며 급하게 뛰어다니는 소리,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 뭔가 우당탕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었기에 오래 걸린 이유가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제 잘못이죠.”

“아, 아니에요. 제가 전화를 안 받아서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아픈 사람이 사과할수록 제가 더 미안해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잘못했다는 결말로 마무리 짓죠.”

이소영은 입을 가린 채 쿡쿡 웃는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굳어 있었는데, 드디어 좀 풀린 느낌이다.

“그보다 몸은 좀 어때요? 많이 힘들면 병원에 데려다주겠습니다. 아니지, 여기로 의사를 오라고 할까요?”

“한숨 푹 잤더니 괜찮아졌어요. 보세요. 멀쩡하잖아요.”

“그래도 환자가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됩니다.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직접 움직이지 말고 제게 말하세요. 다 해드릴 테니까요.”

“고마워요. 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대표님뿐이네요.”

그녀가 나를 지그시 응시한다. 나 역시 눈을 마주하고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분위기가 둥둥 뜬다. 아까보다 더 짙고, 더 가까우면서, 더 두근거리는 분위기가 됐다.

남자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본능 따위는 가볍게 누를 만큼 냉정한 상태였다.

“소영 씨. 할 말이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아파져 온다. 누가 송곳으로 푹푹 찔러대는 것 같다.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나를 원망하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해야 했다. 이미 미루고 미뤄서, 더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지금껏 제가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입니다.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

나는 뒤로 숨긴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입을 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나요. 가상화폐 강연장이었죠.”

“그때 제가…… 소영 씨에게 했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상 밖의 발언이 나오자 이소영은 혼란스러운 듯 눈을 크게 뜬다.

“소영 씨가 뛰어난 가상화폐 개발자가 된다는 걸 알고, 제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겁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그때 저는 햇병아리 개발자였어요. 미래에 제가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러겠어요.”

“미래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요?”

“또 농담하신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어색하게 미소 짓던 이소영의 표정이 싹 굳는다.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거의 진실에 다가간 듯하다.

나는 그녀의 추측에 확신을 얹어주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신 그게 맞습니다. 저는 미래에서 온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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