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후 코인 재벌 152화
워싱턴에서 사흘간의 일정을 소화한 북한 사절단은 다음 목적지인 베네수엘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워싱턴DC에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직선상으로 약 3,000마일 정도.
그러나 직항이 없어서 13시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기에, 이번은 전용기를 구해서 이동했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비행기는 곧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공항에 착륙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좌석 벨트를 매주십시오.
비행이 시작되고 약 4시간이 지나자 베네수엘라 공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카라카스 공항에 와봤던 터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함께한 북한 사절단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의 표정으로 창밖을 살핀다.
그러다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어? 저게 뭐네?”
활주로 앞을 가득 메운 인파가 시야에 들어온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적어도 무장한 군인이 수백 명 모여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우혁 동지. 이게 어찌 된 거요?”
당황한 리권세가 내게 물어온다.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환영 인파 아닐까요?”
“베네수엘라에서 우릴 환영할 이유가 없잖소. 차라리 잡아가려고 모였다면 믿겠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내려보면 알겠죠.”
리권세가 뭐라고 더 항의하려고 했으나 김설화가 그를 막아 세운다.
“국장 동지,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순 없슴다. 조국의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렸으니, 호랑이 굴에 간다고 생각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시라요.”
잠시 후, 비행기는 카라카스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북한 대표단 사람들은 진짜 나라를 구하러 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출구 앞에 선다.
“제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아닙네다. 우리가 선봉으로 가겠슴다.”
“뭐, 편한 대로 하시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문이 열린다.
그리고 리권세가 먼저 밖으로 고갤 들이밀자 우레와 같은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빰빰- 빠라빰빰빰- 빠밤빰!
두두두두두두두!
쿵! 쿵! 쿵! 쿵!
시작은 백여 명의 베네수엘라 군악대가 연주하는 웅장한 환영곡이었다.
비행기 계단에서부터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을 받든 채 도열해 있었고, 공항 건물 쪽에는 수백 명의 인파가 태극기와 꽃을 든 채로 손을 흔드는 중이다.
“어…….”
리권세와 김설화가 얼이 빠져서 굳어 있는 동안, 내가 먼저 나서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와아아아아아!
베네수엘라 방문을 환영합니다!
함성과 함께 어설픈 한국어도 드문드문 들린다. 베네수엘라 교민뿐만 아니라 현지인들까지 동원한 듯하다.
“베네수엘라는 원래 거창하게 환영 인사를 합네까?”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면 왜……?”
나는 대답하지 않고 먼저 비행기 계단을 내려간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제복 군인들의 절도 있는 경례가 따라온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대통령이라도 온 줄 알았을 거다.
카펫과 꽃가루로 만든 길 끝에 다다르자 아예 폭죽과 신호탄까지 터트리며 요란함을 자아낸다.
두두두두두두두.
소란 끝에 다시금 북 치는 소리가 이어진다.
드디어 이번 행사를 기획한 장본인이 등장한다.
“대니얼, 환영합니다!”
베네수엘라 유력 가문의 일원이자, 현 대통령의 동생인 시몬 로메로였다.
“반갑습니다. 시몬, 잘 지냈습니까?”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보다 자주 좀 오십시오. 이러다 얼굴을 까먹겠습니다.”
“하핫. 다음부터 꼭 그러겠습니다.”
시몬과 잠시 인사를 나누는 동안 새까만 선글라스와 까맣게 탄 피부, 폭탄 머리의 사내가 다가온다.
“나는 보이지도 않냐?”
폭탄 머리가 선글라스를 벗는다. 남미 지부 대표로 와 있는 박태식이었다.
나는 반가움에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야, 박태식. 완전 현지인 다 됐네.”
“이게 다 네 덕분이지.”
녀석은 끌어안은 두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내 귀에 속삭인다.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이젠 북한에 가라고?”
“야, 잠깐만. 그건 나중에 둘이서 이야기하자. 응?”
“그래. 그때까진 살려주마.”
박태식과 격한 포옹을 마치고 우리는 준비된 차에 올랐다.
환영 행사는 차에 오른 뒤에도 계속됐다.
카라카스 공항에서 대통령궁으로 이어진 거리에도 환영 인파가 줄을 이었고, 거리 곳곳엔 태극기와 WHTS컴퍼니 회사 로고가 함께 흩날리고 있었다.
“…….”
환해진 베네수엘라 거리를 보고 있자니 뿌듯함이 느껴진다.
내 능력으로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바꿨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행동이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확실했다.
* * *
대통령궁에서 우릴 맞이한 이는 베네수엘라의 61대 대통령인 에드윈 로메로였다.
로메로 대통령은 카메라 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나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네수엘라 내에 WHTS컴퍼니의 인기가 높아서, 이러는 게 지지율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어쨌든 환영 행사는 대통령궁에서 준비한 파티까지 이어졌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다가, 배가 꺼지면 또 먹고 마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마셔댔으면 해가 중천일 때 파티를 시작했는데 어느덧 새벽이 돼 있었다.
“으…… 너무 마셨나.”
술을 깰 겸 홀로 테라스로 나왔다.
베네수엘라가 따뜻한 동네라지만 새벽바람은 꽤 쌀쌀한 편이었다.
칙.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을 들이마신다.
그러고 잠시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잽싸게 다가와서 몸을 밀착시킨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로메로가의 장녀, 제시카 로메로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와서 자릴 잡는다.
“당연히 보고 싶었지. 어디 갔었어?”
“파키스탄에서 방금 돌아오는 길이야. 내가 요즘 영업 뛴다고 바빠.”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려다가 급하게 손을 멈춘다.
“상처는 좀 어때?”
“많이 나아졌어. 피부 이식으로 흉터는 거의 안 보일 정도야. 다만 이게 좀 문제지.”
제시는 팔을 들어서 까딱거린다. 그녀의 한쪽 팔은 허수아비처럼 어색한 직각이 돼 있었다.
“주치의 말로는 신경이 손상됐다나 어쨌다나. 몸에 가방걸이 하나 생긴 셈이지.”
“제시…….”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킥킥거린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일이 년 치료하면 낫는다고 했어.”
“아, 다행이네.”
“다행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만약 안 낫더라도 나는 상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야. 조국을 해방하다가 생긴 영광의 상처잖아.”
그녀는 반정부 시위 도중에 날아온 유탄에 맞고 화상을 입었다. 그러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조국을 해방하다가 생긴 상처인 셈이다.
“그나저나…….”
제시는 내 가슴팍으로 더 깊게 파고들더니 얼굴을 묻고서 킁킁거리며 냄새까지 맡는다.
“네 품에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
“그냥 술 냄새야.”
“이건 하루 이틀 밴 게 아니라 꽤 오랫동안 찌든 냄새야. 내 코는 못 속여. 빨리 이실직고하시지.”
제시가 다시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두 팔로 세게 끌어안았다.
“웁! 웁! 숨 막혀!”
힘으로는 안 되겠는지, 가슴팍을 깨물어서 팔을 풀어낸다.
“숨 막혀서 죽을 뻔했잖아!”
“네가 냄새를 못 맡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그랬지.”
“진짜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닌 거 아니야?”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이 없었어.”
“내가 듣기론 미국에서 모델이랑 같이 다닌다고 하던데. 이번에도 여자 한 명이랑 같이…….”
제시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눈을 깜빡거린다.
“진짜 아니야?”
“그럼 가짜로 아니냐?”
“아니, 뭐, 여자 만난다고 잔소리하려던 건 아니었어.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 거 알잖아.”
나는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팔짱을 꼈다.
“변명하는 게 아니라…… 아 씨. 이러니까 진짜 변명 같네.”
“변명이니까 변명처럼 들리는 거다.”
“웃기지 마. 나는 네가 소영이한테 너무 소원한 것 같아서 해본 말이거든? 그러다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
“뭔 소리야? 소영 씨가 도망가다니?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라도 온 거야?”
제시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
“음…… 아니야. 아직은.”
“뭐야. 애매하게. 확실히 해두라고.”
제시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 이렇게 애매한 사이로 남아 있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응어리가 나를 끝까지 망설이게 만든다.
* * *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지 닷새째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나는 북한 사절단과 함께 베네수엘라에 지어진 각종 시설들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입국 둘째 날엔 한국 기업들과 합작으로 설립한 석유 플랜트 단지에 방문했다.
북한 사절단은 플랜트 단지 규모에 놀란 듯했지만, 북한에서 석유를 파낼 것도 아니었기에 금세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
셋째 날과 넷째 날엔 배터리의 원료인 코발트 광산을 둘러봤다.
베네수엘라 코발트 광산은 투입된 인부만 무려 3만 명으로, 세계 2위 규모의 채굴량을 자랑했다.
덕분에 투덜거리던 리권세의 입이 봉해져서 한결 조용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닷새째인 오늘, 베네수엘라 방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기차 배터리 공장에 도착했다.
김설화와 리권세의 첫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가 전부 전동차 전지를 만드는 공장이란 말입니까?”
“말도 안 됨다. 여길 어떻게 다 돌린다는 거요?”
베네수엘라 배터리 공장은 단순히 배터리만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기차에 들어갈 배터리 팩의 완제품을 만드는 특수 공장이었다.
그러니 공장의 규모가 큰 것은 당연했고, 내부도 연구소처럼 깨끗한 환경을 자랑했다.
“이곳 공정에서 배터리를 폴리우레탄으로 접착하여 튼튼한 구조로 만듭니다. 여기서 굳힌 셀은 이 자체만으로도 차량의 하중을 받아낼 수 있으며…….”
안내를 맡은 공장장은 긴장했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려가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공정을 설명했다.
그래 봤자 설명을 알아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김설화와 리권세는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다.
그러다 배터리를 적재하는 창고로 들어섰을 때.
“으어어억!”
리권세는 창고 내부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꺽꺽거리는 소릴 냈다.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창고에는 배터리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것들이 아까 만든 배터리요?”
“예. 맞습니다.”
“왜 날래 보내지 않고 여기에다가 잔뜩 쌓아뒀소?”
“베네수엘라 공장에서 생산된 배터리 팩은 해상으로 디트로이트까지 수송합니다. 그러니 배가 올 때까진 여기 쌓아둘 수밖에요.”
나는 북한 사절단을 더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공장장에게 질문을 던진다.
“일 년에 생산되는 배터리 팩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군요.”
“아, 옙! 작년에 나간 전기차 배터리 팩은 총 28만 개입니다. 가치로 따지면 50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50억 달러는 북한의 한해 GDP 절반에 달하는 돈이다.
그런 거금을 배터리 공장 하나가 뽑아낸다는 소릴 듣자, 두 사람은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작년은 공정을 안정화한다고 상반기 물량이 덜 나왔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올해는 공정 안정화가 끝나서 40만 개까지도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김설화와 리권세는 더 놀랄 것도 없는지 저들끼리 숙덕거리다가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건다.
그 후, 한참 뒤에 통화를 마친 김설화가 내게 다가온다.
“우혁 동지, 며칠 뒤에 공장을 다시 견학해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오늘 다 둘러봐서 다음엔 볼만한 게 없을 텐데요.”
“저희가 아니라 위원장 동지께서 직접 공장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