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후 코인 재벌 139화
프랑스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던 마크 로어는 전역 후 동료들과 함께 PMC(Private Military Company : 민간군사기업)에서 팀을 꾸려 활동했다.
전쟁 용병이나 마찬가지였던 그의 가드팀은 전 세계를 떠돌며, 경호, 경비, 각종 공작에 참여하며 실적을 쌓았다.
업무의 위험도가 높은 만큼 보수는 만족스러웠다. 다만, 일거리가 계속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몇 달을 놀면서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랬던 로어의 가드팀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제압 작전에서 연이 닿은 WHTS컴퍼니 측이 정식 계약을 제안한 것이다.
보수는 기존 PMC 때보다 2배 이상 많았고, 일거리가 없어도 돈이 나왔기에 꿈의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다.
WHTS컴퍼니와 정식 계약을 맺은 로어의 가드팀은 일상 경호 업무만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거의 반년이 지났을 때쯤, 드디어 일다운 일이 그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목표물 두 마리 모두 생포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로어의 목소리를 들은 목표물들이 동시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그것은 양팔이 결박된 채로 눈가리개를 하고, 입까지 밀봉 당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표시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로어는 결박된 사내들의 머리를 붙잡는다.
“읍! 읍! 읍! 읍!”
기겁한 사내들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댔다.
로어는 그들을 향해 낮게 중얼거린다.
“이 자리에서 머리통 뽑히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거짓말처럼 사내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빈말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로어는 그들에게 채워뒀던 눈가리개와 입마개를 차례대로 제거했다.
“사, 사,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가진 현금, 가상화폐, 부동산까지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저는 해외 계좌에서 바로 이체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두 사내의 필사적인 읍소가 이어졌으나 그런 행동은 로어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너희는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생사를 결정하는 게 나였다면 너흰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원래 계획이라면 작전은 2주 전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이 거액을 주고 고용한 화교 브로커가 사방으로 허위 정보를 퍼트리는 바람에 작전이 배 이상 지체되고 말았다.
스윽.
로어는 두 사내를 번갈아서 쳐다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내들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보스가 영상통화를 하자고 하신다. 그분이 하는 말씀을 잘 듣고, 최대한 성실하게 답해라. 만약에 허튼 짓거리를 했다간.”
그는 사내들이 묶여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쥔다.
빠드드득.
철제 의자의 팔걸이가 엿가락처럼 구부러진다.
“너희 척추도 이런 모양이 될 줄 알아라.”
놀란 두 사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일반인 수준에서는 감내할 수 없는 공포가 그들을 뒤덮고 있었다.
짧은 대화가 끝난 뒤부터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의자에 묶인 사내들은 그동안 눈알을 열심히 굴려댄다. 그러다 로어나 그의 팀원이 헛기침 소리라도 내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거의 30분을 넘게 기다린 뒤에야 다시 전화가 울렸다.
“예, 알겠습니다.”
로어는 그들이 묶인 의자 앞에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휴대폰 화면엔 그들이 그토록 끌어내리려고 노력했던 사내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야. 두 분을 이런 식으로 다시 뵙게 되는군요. 백승태 부장님은 거의 1년 만이던가요?
백승태는 휴대폰 속 목소리를 듣고는 조건반사처럼 이를 갈았다.
“신우혁……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은 전부 네가 꾸민 짓이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마라. 이 음흉한 것아. 박민교가 개털 된 건, 전부 네가 수작질을 부려서 그런 거잖아!”
소릴 지르던 백승태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옆에 서 있던 로어와 눈이 마주친 탓이다.
-백승태 씨, 일의 잘잘못을 따지려면 두 사람이 회삿돈 횡령을 제게 덮어씌우려고 할 때부터 시작하셔야죠.
“그건 내가 아니라 박민교가 시켜서…….”
그때였다. 지금껏 평이하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일순간에 착 가라앉았다.
-야. 백승태.
그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치켜든다.
-X같은 소리 좀 작작하자. 누가 아이디어를 냈든 간에, 나를 빵에 처넣으려고 작업 친 건 맞잖아? 명품을 사주고, 카지노나 해외로 출장도 보내고 말이야.
“…….”
-쯧쯧쯧. 자기들이 개짓거리 한 건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고 당한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백승태가 입을 다물자 그의 시선이 옆으로 향한다.
-테일러 씨, 당신은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저…… 그, 그러니까…… WHTS컴퍼니 이름으로 관심을 끌어서 다시 가상화폐 사업을 해보려고 그랬습니다.”
-거참, 어이가 없네.
“진짜 모르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뭘 몰랐다는 거죠?
테일러는 주변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중얼거린다.
“당신이 이렇게…… 무서운 분인 줄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절대, 절대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별것 아닌 사람이었으면 공격해도 됐을 거란 소리네요?
“아,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휴대폰 너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넘어온다.
-너는 더 답이 없다.
“대표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진짜 새사람이 돼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저거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게 하세요.
기다리고 있던 로어가 두 사람에게 다시 입마개를 채운다.
백승태는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고, 테일러는 끝까지 무슨 말을 하려고 버둥거렸다. 물론 그의 발악은 로어의 힘 앞에 간단히 제압됐다.
“대표님,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제가 직접 분쇄기로 갈아서 마셔 버리고 싶군요.
“원하신다면 분쇄기 사이즈에 맞게 미리 잘라두겠습니다.”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부림을 쳤다. 그래 봤자 의자에서 벗어날 순 없었지만.
-아뇨.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할까요?”
-될 수 있으면 죽이는 건 피하고 싶군요. 요즘 꿈자리가 사나워서 말이죠. 평생 빛도 못 보는 곳에 던져두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의자에 묶인 두 사람은 살려준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어는 그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엔 죽는 게 더 나은 삶도 있는 법입니다.”
* * *
백승태와 테일러는 몇 날 며칠을 군인들에게 묶여서 끌려다녔다.
그동안 계속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여기가 어딘지,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을 못 할 지경이었다.
계속 끌려다니면 두려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떨 때는 몽롱했다가, 또 어떨 때는 예민했다가, 가끔은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열 번도 넘는 밤이 지나간 뒤에야 군인들의 이동이 멈췄다.
“으으…… 제기랄.”
백승태는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어두컴컴한 실내엔 테일러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급하게 테일러를 흔들어 깨웠다.
“어이! 어이! 일어나 보십쇼! 잘 때가 아니야.”
테일러는 잠에서 덜 깬 건지, 혀 꼬부라지는 소릴 내며 고갤 돌린다.
그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출구 쪽으로 향한다.
“칫. 역시 잠겼나.”
백승태는 문을 열 만한 도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구석엔 박스가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컴퓨터 두 대와 노트북, 서류 뭉치가 굴러다닌다.
그게 실내에 있는 전부였다. 아쉽게도 쇠막대기나 머리핀 같은 물건은 없었다.
“으…… 머리야.”
뒤늦게 테일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참이나 머릴 꾸벅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방금 깨어나서 모릅니다. 염병할,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네. 불은 어떻게 켜는 거야.”
“그래도 죽이진 않았군요. 그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다행은 무슨. 우릴 평생 빛도 안 들어오는 곳에 가둬놓는다잖습니까. 그런 꼴 당하기 싫으면 빨리 문을 열 만한 물건 좀 찾아보십쇼.”
백승태가 컴퓨터 서랍을 뒤지는 동안 테일러는 컴퓨터 옆에 쌓여 있는 서류를 확인했다.
“어? 이거 중국 주소네요. 난하이구 포산시 광둥성…….”
“중국어를 읽을 줄 압니까?”
“쉬운 단어만 살짝 아는 수준입니다.”
테일러는 한참이나 서류를 살펴보다가 입을 연다.
“서류에 주소랑 수량, 그리고 금액이 쓰여 있는 걸 보면, 어떤 물건을 거래한 장부 같습니다.”
“중국어 서류가 이만치나 쌓여 있는 걸 보면, 여기가 진짜 중국일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를 중국의 강제 수용소 같은 곳에 넣으려는 게 아닐까요? 티베트나 위구르 지역의 소수민족 수용소에 끌려가면 나오기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백승태는 서랍을 뒤지다가 지쳤는지 자리에 풀썩 소리 나게 주저앉는다.
“후…… 수용소행이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게 왜 다행입니까?”
“중국의 꽌시 문화 모릅니까? 돈을 찔러주면서 윗선까지 길만 뚫을 수 있으면 나가는 건 일도 아닙니다.”
바로 그때, 출구 문이 ‘쿵쿵’하고 흔들리면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公安, 快开门. 知道在里面就来了!
깜짝 놀란 백승태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밖에서 뭐라고 한 겁니까?”
“공안이랍니다. 빨리 문 열어달라는데요. 어떡하죠?”
백승태는 여기서 군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중국 공안에 잡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안 쪽은 최악의 경우라도 돈을 주고 빠져나오면 그만이었으니까.
“헤이! 헬프! 헬프! 안에 사람 있어요! 밖에서 열어주세요!”
공안들이 백승태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더 강하게 문을 흔들어 재낀다.
“그렇지. 더 세게! 더 세게!”
밖에서 계속 중국어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백승태는 그들이 그냥 가버릴까 봐 고래고래 고함까지 질러가며 문을 두드렸다.
“저것들은 뭐 하고 있어? 쇠막대기 같은 걸 구해와서 문을 따면 되잖아! 플리즈! 오픈 더 도어! 오픈 더 도어!”
그러다 뒤에서 테일러가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기…… 백승태 씨. 그 문 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신우혁 새끼가 보낸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것보다 공안에 잡히는 게 백배 낫습니다.”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 같은데요.”
백승태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미친! 이게 다 뭐야?”
테일러가 들고 있는 박스에는 하얀색 결정체와 형형색색의 알약, 주사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백승태는 하얀색 결정체를 보자마자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최근 미국과 남미 지역으로 불티나게 수출된다던 싸구려 합성 마약이었다.
며칠간 몽롱했던 의식, 상자에 쌓여 있는 수상한 알약, 컴퓨터와 장부,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공안까지.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너무 명확했다.
“신우혁, 이 더러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