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후 코인 재벌 138화
애플사 대주주 모임이 끝난 뒤.
엘론은 객실을 나서는 내내 낄낄거리며 감상을 늘어놓는다.
“대니얼, 당신이 돌아가면서 협업 찬반 의사를 물을 때,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쿡의 안색을 보셨습니까?”
“글쎄요.”
“그 웃긴 장면을 못 보셨다니 정말 안타깝군요. 비 오는 날 개똥을 밟으면 딱 그런 표정이 나올 겁니다.”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입이 1초도 쉬지 않는다.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번 모임에 엘론 씨가 와주셔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덕분에 로워 회장과 버핏 회장을 쉽게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흐흐, 저야 재미난 구경거릴 보러 온 것뿐입니다.”
같은 발언을 해도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발언의 신뢰도가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전기차 업계에서 원톱인 테슬러모터스 CEO는 아주 효과적인 카드였다.
“그보다 애플사와 협업에 들어가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우리가 설계까지 다 도맡는 방식입니까, 아니면 그쪽에서 설계를 짜주는 방식입니까?”
“아직 세부 방침은 확정된 게 없습니다.”
“흐음. 설계까지 우리 쪽이 담당하면 일이 빠르겠지만, 반대라면 출고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내가 기억하는 애플사의 전기차는 2023년까지 이렇다 할 컨셉카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지지부진한 사업이었다.
가능하면 생산의 모든 것을 테슬러모터스 쪽에 일임시키는 게 낫겠지만, 애플사에서 어디까지 양보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우선은 애플사의 전기차 담당자를 만나서 이야기부터 해봐야겠군요. 일정을 최대한 빨리 잡아 볼 테니까…… 엘론 씨?”
같이 걷던 사람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엘론은 멈춰 선 채로 호텔 라운지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걷다 말고 뭐 하십니까?”
“오랜만에 보는 9점짜립니다.”
그가 넋을 놓고 쳐다보는 라운지 테이블엔 금발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영화나 광고에서 본 듯한 정석적인 미인상의 여자였다. 몸 관리까지 끔찍하게 해둔 걸 보면 모델이거나, 아니면 진짜 배우일 수도 있겠다.
엘론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어떻습니까? 대단한 미인이죠?”
“흔히 볼 수 있는 외모는 아니군요. 그런데 저 정도 미인이 9점이면 10점은 얼마나 대단해야 받을 수 있는 건가요?”
“10점은 언젠간 나올 최고의 여성을 위해 비워두는 자립니다. 그래서 9점이면 사실상 최고점수나 마찬가지죠.”
우리가 수군거리는 동안, 모델녀는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 그런 것 같다.
엘론은 어떻게든 해볼 생각인 건지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켜서 얼굴을 체크한다.
“저기…… 엘론? 휴대폰 쳐다볼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잠시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그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여인이 이쪽을 쳐다보며 걸어온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과할 정도로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엘론은 휴대폰을 얼른 집어넣고는 복화술을 하듯이 속닥거린다.
“당신 취향의 여자입니까? 아니면 제가 들이댑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엘론은 다가오는 여인에게 한걸음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어린 고양이. 난 테슬러모터스의 엘론 머스크입니다. 내 이름은 들어 봤죠?”
여인의 새하얀 미간에 주름이 진다. 그녀는 손을 내민 엘론을 무시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WHTS컴퍼니의 대니얼 신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저는 애플사의 애플카 담당자인 안젤라 그레이스예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애플사에서 두 명이 왔다는 소리는 들었다.
지분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라서 쿡만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함께 온 일행이 그녀였나 보다.
“마침 우리도 전기차 협업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엘론?”
바람을 맞았던 엘론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 앞에 섰다.
“맞습니다. 회사의 보안 정책상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전기차 개발의 핵심 노하우가 나오기 직전이었죠.”
엘론은 열심히 자신을 어필했으나 그레이스는 불쾌하다는 듯 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지금껏 저희를 쓰레기통 취급해 놓고 잘도 지껄이시네요.”
“아, 아니 저는 그레이스 양에게 그럴 의도는 전혀…….”
“저랑 SNS에서 대화도 자주 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 보죠?”
“오우. 제가 워낙 많은 사람의 메시지를 받고 있어서 일일이 기억을 못 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그레이스 양의 아이디를 불러주시겠습니까?”
은근슬쩍 SNS 아이디를 알아내서 작업 치려는 속셈이 투명하게 보인다.
그녀도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순순히 아이디를 불러준다.
“Apd_Angel_13이에요.”
“Angel_13? 어디서 본 듯한…… 헙!”
“우리 저번 주에도 대화했었잖아요. 아주 장문의 메시지로요.”
그녀의 아이디를 들은 엘론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탈색된다.
“어, 음…… 대니얼. 저는……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두 분이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엘론은 도망치듯이 호텔 출입문으로 빠져나간다. 대체 그녀의 SNS에 대고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러는 걸까?
“엿 같은 개자식.”
안젤라는 욕설과 함께 엘론의 뒤에 대고 중지를 치켜든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손가락을 회수하고 활짝 웃어 보인다.
“흠흠. 그레이스 씨.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십니까?”
“그레이스가 아니라 안젤라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저는 성으로 부르는 게 편합니다.”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우리, 앞으로도 자주 볼 사이잖아요.”
그녀는 내게 바짝 다가와서 눈웃음을 흘린다.
방금 엘론에게 중지를 들던 사람이 이러니까 머리가 혼란스럽다.
“알겠습니다, 안젤라. 이러면 됐나요?”
“좋아요. 그러면 나도 대니얼로 불러도 되는 거죠?”
“마음대로 하시죠.”
안젤라는 입을 가린 채 쿡쿡 웃다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는 우리 애플사가 테슬러와 협업을 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에요.”
“쿡 대표가 직접 하겠다고 말한 사안입니다.”
“하겠다고 말만 했지, 정확한 날짜까지 정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계속 시간만 미루다가 엎어질 수도 있어요.”
담당자인 그녀가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테슬러와 애플사의 협업이 성사되면 애플카 부서의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레이스 씨가 테슬러모터스에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안젤라예요.”
누가 애플사 직원 아니랄까 봐 사소한 부분에서 고집이 세다.
“당신이 이번 결정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대주주와 대표 사이에서 결정된 사안을 번복할 순 없습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저는 협업에 찬성이에요.”
내가 이해를 못 해서 고갤 갸웃거리고 있자 그녀가 말을 덧붙인다.
“출시 기약도 없는 제품을 개발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세요? 저는 테슬러든 어디든 좋으니까, 애플카를 빨리 출시시켜 주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그럼 어째서 협업이 안 될 거라고 말씀하셨죠?”
“그건…….”
안젤라는 말을 하다가 말고 호텔 엘리베이터 쪽을 쳐다본다.
그곳에선 쿡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 쪽에 고집을 절대 안 꺾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 * *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애플카 사태는 쿡이 직접 협업을 인정하면서 마무리됐다.
물론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애플사에서 진짜 협업해 줄지 말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큰 걱정은 안 된다. 애플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전기차는 단기적으로 성과가 나올 만한 사업이 아니었으니까.
결국은 테슬러 쪽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을 거다.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소화한 뒤, 나는 곧장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까지 온 김에 휴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정리 못 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헤지펀드의 공매도 건부터 시작해서, 그 외에 자잘한 일들까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밀려왔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도착해보니 어지간한 골칫거리는 저절로 해결된 뒤였다.
“이번에 애플사 지분 인수 건이 뉴스 1면에 계속 올라온 건 아시죠? 그 뉴스에 우리 회사 이름이 같이 언급되면서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유입됐어요.”
인천공항까지 마중 나온 이소영은 나를 만나자마자 기쁜 듯이 성과를 자랑했다.
“유입이 얼마나 늘었던가요?”
“놀라지 마세요. 기존에 빠졌던 금액보다 27%나 더 늘어난 3,300억 달러가 순 유입됐어요.”
“시가 총액이 오히려 늘었으면 하락에 베팅한 세력들은 전부 비상이겠군요.”
“후훗. 어디 비상만 걸렸으면 다행이죠.”
그녀는 마녀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업계에 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공매도 사태로 헤지펀드 4곳이 박살 났대요.”
“도토리코인만 건드린 게 아니라, 테슬러까지 같이 공매도 쳤다가 그 사달이 났을 겁니다.”
“자업자득이죠.”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공매도 사태는 성장통처럼 우리에게 오히려 득이 됐어요.”
“성장통이라…… 마음에 드는 비유군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성장까지 이뤄내고 있어요. 지금 같은 추세라면 시가 총액 1조 달러 돌파도 꿈은 아니에요.”
가상화폐 시가 총액 1조 달러.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가상화폐 2차 버블 시기에 비트코인이 달성했던 기록 중 하나였으니까.
사실, 도토리코인이 비트코인을 밀어냈을 때부터, 시가 총액 1조 달러 달성은 예정된 미래라고 봐도 무방했다.
‘중요 포인트는 시가 총액 1조 달러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냐는 거지.’
그 대단했던 기세의 비트코인조차 가상화폐 거품이 꺼지면서 1년 만에 무너져 내렸다.
도토리코인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내실을 다지면서, 가상화폐가 ‘가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어야 했다.
“베네수엘라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공매도로 시끄럽고부터 원유 거래가 뚝 끊겼다고 들었는데요.”
“우리가 애플사 최대 주주라는 게 알려진 이후부터 그쪽도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어요.”
“원유 거래 쪽은 특별히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이익은 발생하지 않더라도, 원유가 거래된다는 것 자체가 도토리코인의 셀링 포인트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박태식 이사님 말로는 기름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래요.”
어?
그러고 보니 태식이가 교대 인원을 빨리 보내달라고 몇 번이나 우는 소릴 했던 게 떠올랐다.
‘최근에 일이 바빠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이러다 무단 이탈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회사 임원 중에 누구를 베네수엘라로 보낼지 고심하던 도중, 주머니에서 긴장감 넘치는 벨소리가 울린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일반 벨소리가 아니라 특별한 전화에만 울리게 지정해 둔 벨소리였다.
나는 이소영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해 두곤, 공항 화장실까지 가서 휴대폰을 꺼낸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내가 말하자마자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목표물 두 마리 모두 생포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