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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코인 재벌-132화 (132/174)

출소 후 코인 재벌 132화

가슴팍에서 시작된 서늘한 고통이 신체 곳곳으로 퍼져간다.

손가락 마디가 먼저 찌릿해지고 이어서 정강이와 뒤꿈치, 발끝도 아려온다.

그 생경한 감각은 목 뒤를 타고 올라 뒤통수까지 치고 올라간다.

그러다 다시 가슴의 서늘함이 강렬해질 때쯤, 어두워졌던 시야가 환하게 돌아왔다.

“헙!”

무언가에 가로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 놀라서 소릴 지를 뻔했지만, 마른기침만 쏟아질 뿐이다.

“이번 사태의 피해자를 구제하기에 앞서, 대상을 명확하게 분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령과 피해 금액, 상환 능력, 신용도. 더 나아가…….”

지나치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당혹감을 부여잡고 주변을 살핀다. 맞은편 자리엔 중년 관료가 사무적으로 서류를 읽고 있었다.

“…….”

그때 옆자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비서실의 왕정현 실장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예?”

“갑자기 깜짝 놀리시기에…….”

“아,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대답을 끝내고 슬며시 가슴팍을 살펴본다. 상처는커녕 핏자국도 없이 깨끗하다.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또 그 꿈을 꾼 건가.’

얼마 전부터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

분노한 코인 투자자들이 단체로 찾아와서 윽박지르거나, 아니면 엉엉 울면서 절규하거나, 아까처럼 칼이나 둔기, 총으로 죽이러 오는 꿈도 있었다.

하나같이 섬뜩한 일들인지라 꿈을 꿨다 하면 그날 잠은 다 잤다고 보면 된다.

원인이 뭔지 짐작은 간다.

내가 터트린 K스타코인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꿈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더 큰 피해를 낳지 않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은 있었지만, 그들이 돈을 잃은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켰다. 그 행동이 공익에 부합하는 판단일지 모르나, 피해자들에겐 찢어 죽여도 모자랄 짓이겠지…….’

그래서 한 명이라도 피해자를 줄여 보겠다고, 공매도 폭격 전에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여론전까지 벌였다.

처음부터 큰 효과는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해자 구제가 아니라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한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역시 이 정도론 안 되는 건가.’

더는 답답해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홀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내서 번호를 꾹 눌렀다.

뚜우- 뚜우-

신호음 두 번 만에 통화가 걸렸다.

상대 쪽에서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용건부터 들이민다.

“그놈들 위치 파악됐습니까?”

* * *

동트기 직전의 어스름이 깔린 새벽.

싱가포르 창이공항 입국장으로 수상한 차림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까지 눌러 쓴 것도 수상해 보이는데, 양손엔 커다란 캐리어까지 끌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K스타코인 간부들이었다.

“주변을 잘 살펴라. 한국에서 경찰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

“설마 짭새가 여기까지 잡으러 오겠습니까.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요.”

“아직도 한국 스타일을 몰라? 여론이 안 좋으면 무슨 죄를 갖다 붙여서라도 잡아갈 놈들이야.”

두 사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간다. 그런 그들의 뒤를 멍한 표정으로 따라 걷는 사내가 있다.

K스타코인의 대표였던 테일러 킴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데이터 쪼가리가 된 가상화폐가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 시가 총액이 30조가 넘었어. 조금만 더 버텨서 시세 펌핑하고 털었으면 못해도 1조 이상은 먹었을 텐데…….’

재벌가 비자금 마련으로 투자를 끌어내고, K팝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가치를 펌핑한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다.

실제로 상장 열흘 만에 시가 총액 10위 권에 이름을 올렸고, 언론사에서도 앞다퉈서 K스타코인을 띄워줬다.

이대로 해외 진출까지 노리며 시세를 계속 펌핑할 수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이번은 운이 지독하게 없었을 뿐이야. 하필이면 존 소로스 같은 거물이 끼어들다니.’

그들이 쏟아낸 공매도 폭탄으로 K스타코인은 수명을 다했다.

여기서 억지로 살려 보겠다고 붙잡고 있으면 같이 침몰할 뿐이다. 테일러는 이미 다음 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공항 밖으로 빠져나온 테일러는 일행과 함께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현지 브로커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들은 자체적으로 머물 곳을 찾아야 했다.

“서둘러라. 해 뜨기 전에 호텔에 도착해야 한다.”

“형님, 호텔로 간 뒤엔 어쩔 생각이십니까? 이 동네에서 죽치고 있어 봤자 할 것도 없을 텐데요.”

“할 게 왜 없어? 싱가포르에 널린 게 가상화폐 업체야. 우리는 그들과 접촉해서 K스타코인을 대신할 새로운 코인을 만들면 돼.”

“이번에 K스타코인으로 털린 놈들이 이를 갈고 있을 텐데요. 그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또 속아 줄까요?”

테일러는 마스크를 턱으로 내린 채 큭큭거리는 비웃음을 터뜨린다.

“손모가지가 잘려도 못 끊는 게 도박이야. 이미 코인에 중독된 놈들이 한 트럭인데 뭐가 걱정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내가 장담하는데 K스타코인 시즌2 떡밥만 뿌려도 사겠다는 인간들이 줄을 설 거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차도를 건너서 택시 정류장에 도착했다.

깜깜한 새벽임에도 정류장엔 택시 3대와 일반 승용차들이 줄줄이 주차돼 있었다.

테일러 일행은 가장 앞에 주차된 택시 문을 열고 짐을 쑤셔 넣는다.

그리고 차에 딱 올라타는 순간.

끼이이익.

주차돼 있던 자동차가 택시의 앞을 가로막는다. 이어서 다른 자동차에서 줄줄이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내린다.

테일러 일행은 사색이 돼서 소릴 질렀다.

“형님, 저것들이 우릴 잡으러 온 것 같습니다.”

“X발! 밟아! 얼른 밟으라고!”

택시 기사에게 소릴 질러봤자 소용없었다. 앞이 막혔는데 어쩌겠는가.

어느덧 사내들이 택시 지척까지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는 즉시 흩어져서 도망가라. 그게 유일한 살길이다.”

“알겠습니다.”

“셋을 세겠다. 하나. 둘.”

마지막으로 ‘셋!’이 나올 차례가 됐을 때 문밖에서 굉음이 쏘아진다.

쿵!

둔탁한 타격음의 정체는 SUV가 사람을 들이받는 소리였다.

테일러 일행, 정장 사내들, 택시 기사, 모두가 당황해서 얼어 있는 동안 SUV의 문이 열린다.

“빨리 타십쇼.”

한국인이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유창한 한국어였다. 테일러는 본능적으로 차를 갈아탔다.

그가 차에 올라타고 문을 닫기도 전에 SUV가 출발한다.

“잠깐! 내 일행은?”

“다른 사람까지 챙길 여유 없습니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차 돌려!”

“돌리는 건 안 되고, 원하면 다시 내려는 드릴게.”

테일러는 택시가 있던 뒤쪽을 돌아보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SUV 문을 닫아버렸다.

* * *

뒤늦게 정장 사내들이 차를 타고 SUV를 쫓아 왔지만, SUV 운전수는 능숙하게 싱가포르 거리를 헤집으며 추격을 따돌렸다.

도심 외곽까지 나와서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자 테일러는 참았던 질문을 내놓는다.

“저기…… 누구십니까?”

갑자기 공손해진 테일러를 보고 SUV 운전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해줘도 내가 누군지 모를 겁니다. 싱가포르에 널리고 널린 한국 범죄자 중 한 명이니까요.”

“그럼 저를…… 어째서 도와주셨습니까?”

“그쪽이랑 나랑 목적지가 같아 보였거든.”

테일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운전수의 행색을 살핀다.

나이는 40대 중반쯤.

분위기를 보니 범죄 조직에 소속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유야 뭐든 간에 구해주신 건 감사하게 됐습니다. 명함이라도 주시면 나중에 꼭 사례하겠습니다.”

“사례 같은 건 됐고.”

그는 한적한 도롯가에 차를 세운 뒤에 말을 계속한다.

“나랑 일 하나 합시다.”

“죄송하지만 저는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신우혁이와 관련된 일인데?”

테일러가 신우혁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SUV 운전수가 쯧쯧거리며 혀를 찬다.

“이 사람이 보기보다 맹탕이네. 여태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제가 뭘 모른단 말입니까?”

“아까 당신네를 잡으러 왔던 사람들, 전부 신우혁이가 보낸 겁니다.”

신우혁과 접점이라고 해봐야 행사장에서 한 번 만난 게 전부였다. 그런데 뭐하러 싱가포르까지 사람을 보낸단 말인가.

테일러가 좀처럼 답을 못 찾고 있자 운전수가 답답하다는 듯 또 혀를 찬다.

“쯧쯧쯧, 그쪽이 만든 가상화폐…… K, 뭐시기였더라?”

“K스타코인입니다.”

“아, 그거. 신우혁이가 존 소로스에게 의뢰해서 그 꼴이 난 거요.”

테일러는 여전히 운전수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신우혁이 K스타코인을 무너트리고 얻는 이득보다, 가상화폐 판이 흔들릴 때 잃는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더 자세히 파고들기로 한다.

“그…… 신우혁이 소로스에게 사주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운전수는 말없이 대시보드에서 사진을 꺼내준다.

사진은 신우혁이 어떤 공항에서 나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룩셈부르크 공항. 존 소로스가 지내는 호텔과 10분 거립니다. 지난달에 찍힌 사진이니 시기상으로도 딱 맞아떨어지죠.”

테일러는 그 말을 듣고서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가 무슨 이유로 나를…….”

“그건 나도 모릅니다. 단순한 경쟁사 제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일 수도 있는 거죠. 확실히 밝혀진 사실은 그가 소로스를 만났다는 겁니다.”

테일러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이 꼴이 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제게 이런 증거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같이하자는 일이 뭡니까?”

“어려운 건 아닙니다. 신우혁이 지은 죄를 당신이 폭로해 주면 됩니다. 범죄자 나부랭이가 폭로하는 것보다, 유명한 당신이 폭로해 주면 약발이 잘 먹힐 테니까요.”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요?”

“나열하면 끝도 없습니다. 횡령부터 시작해서 가상화폐 해킹, 시세 조작, 공문서 위조, 감금, 폭행, 살인미수 그리고…….”

테일러는 깜짝 놀라서 그의 말을 끊는다.

“자, 잠깐만요. 그걸 진짜 신우혁 대표가 다 했다고요? 증거는 있습니까?”

“일부 사건의 증거는 있습니다.”

“증거가 확실한 게 아니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건수만 제공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여론이 알아서 물어뜯을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가상화폐 폭락으로 투자자들은 분노에 차 있다.

그의 말처럼 이럴 때는 증거가 중요치 않다. 그저 두들길 샌드백이 필요할 뿐이다.

‘괜찮은 제안이야. 이번 사태가 그의 짓임이 밝혀지면 K스타코인의 재기도 노릴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처음 만난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냐는 것.

테일러는 그를 떠볼 생각으로 슬쩍 운을 띄운다.

“그런데 신우혁 대표와는 어떤 악연이 있으셨길래, 이렇게 증거까지 모으신 겁니까?”

“사실은 제가 신우혁이랑 한솥밥 먹던 사이였습니다. 그때 살짝 트러블이 있었죠.”

“아…….”

그는 히쭉 웃으며 테일러를 쳐다본다. 입꼬리는 웃고는 있었지만, 눈빛에는 소름 끼치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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