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124화 (124/174)

출소 후 코인 재벌 124화

화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뢰성이다.

사용자가 이 화폐를 제시했을 때, 원하는 물건, 혹은 동급의 화폐로 교환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없다면 화폐는 화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가상화폐는 국가나 기업에서 보증해주는 화폐가 아니었기에 태생적으로 신뢰를 쌓기 어려웠다.

그래서 초창기엔 과장된 청사진을 제시해서 사용자를 모았고, 몇몇 가상화폐는 높은 보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상화폐 다방면으로 사용자를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화폐보다는 투자 상품으로 분류됐다.

끝끝내 화폐의 필수 덕목인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가상화폐에 신뢰가 없다면 많은 이자 보상을 약속해도 가상화폐는 투자 상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상화폐를 다른 현물과 엮을 계획을 세웠다.

미국 대통령 후보와 친분을 맺고, 베네수엘라 사태에 직접 개입하면서까지 내가 얻어내려 했던 것.

바로 베네수엘라산 원유였다.

계획 수립부터 실행까지, 무엇 하나 순탄했던 적이 없었지만, 그 결과는 그간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베네수엘라 원유 거래가 시작된 이후부터 도토리코인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유통량부터 기존 대비 420% 폭증했고, 시가 총액은 91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지금 추세라면 이번 주 내에 1,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시가 총액 1,000억 달러를 한화로 환산하면 100조 원이 넘는 돈이었다.

기업이 아니라 국가 규모로 운영될 화폐 단위가 나오자, 회의장에 있던 다른 팀장들도 놀람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비슷한 시기를 겪어봤었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말았다.

‘비트코인 2차 광풍 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몰렸었지.’

비트코인은 한때 시세가 6만 달러가 넘게 올라갔었다.

시중에 유통된 비트코인이 1,800만 개라고 가정하면 비트코인의 시가 총액은 1조 달러가 넘어갔다는 뜻.

지금 도토리 코인의 시가 총액이 1,000억 달러 수준이니, 아직도 10배 이상의 상승 여력이 있었다.

나는 보고 중인 자산관리팀 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 거래량 폭증은 누가 주도한 거죠? 개인입니까, 아니면 기관입니까?”

“개인과 기관, 양쪽 모두 도토리코인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시카고옵션거래소(CBOE·Chicago Board Options Exchange)에서 가상화폐를 취급하면서 기관들이 일제히 매수에 나서고 있습니다.”

“기관 투자자들이 나섰으면 도토리코인 물량이 부족할 수도 있겠군요.”

“우려하신 대로 일부 거래소에서는 도토리코인 물량이 동나서 시세에 10%가량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합니다.”

프리미엄이라는 말이 나오자 지금껏 잠잠하던 가상화폐팀, 이소영이 냉큼 대화에 끼어든다.

“말도 안 돼요! 전 세계의 어느 거래소든 도토리코인 물량은 절대 부족할 수 없는 구조예요.”

“그럼 어째서 프리미엄 같은 소리가 나온 겁니까?”

“일부 거래소들이 차익을 챙기려고 붙인 핑계일 거예요. 이번 일로 거래량이 확 뛰니까 이때다 싶었던 거죠.”

도토리코인은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자 상품이 아니라 화폐다.

화폐에 프리미엄이 붙어서 시세가 오르내리는 상황은 ‘신뢰성’ 측면에서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이번에 프리미엄 받아먹은 거래소에 연락 돌리세요. 앞으로 한 번만 더 헛짓거리하면 물량 진짜로 끊어버리겠다고요.”

“우리가 경고한다고 먹힐까요? 걔들 완전 양아치던데요.”

“그땐 한두 업체를 시범적으로 골라서 진짜 물량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거래소에 시가 총액 1위 가상화폐가 없다는 건 치명적이니까요.”

이후에도 거래소 관련 주제가 팀장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간에 쌓인 게 많았는지 거래소 불만이 반, 욕이 반이었다.

“요즘 비트코인 시세 보셨어요? 다시 5,000달러 회복했던데요.”

“도토리코인에 돈이 몰리니까 다른 가상화폐도 시세도 덩달아 뛴 것 같더군요.”

“가상화폐 시세야 원래 올랐다 내렸다 했잖아요. 그러는 동안 거래소만 돈을 쓸어담는 거고요.”

그러다 얼마 전, 싸이클럽 개발부에서 통합 사업부로 자릴 옮긴 공민준이 목소릴 낸다.

“저…… 가상화폐가 살아나서 그런가, 슬금슬금 신규 코인 상장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소영도 여기에 맞장구를 친다.

“저한테도 가상화폐 연설이나 세미나 참석 요청이 정말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또 예전의 가상화폐 광기가 다시 찾아올까 봐 걱정입니다.”

“그것도 그렇고…… WHTS컴퍼니면 가상화폐 쪽에선 원톱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을 빼가려고 접근하는 업체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더니 거의 동시에 내가 앉아 있는 쪽을 쳐다본다.

“대표님, 그래서 말인데 회사 직원들 지키려면 임금인상이나 인센티브 같은 당근을 더 챙겨줘야 할 듯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회사가 최대 실적을 냈으면 은근히 기대하는 게 사람 심리잖아요.”

“흠흠. 우리 직원들이 애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옆에서 억 소리 나게 바람 넣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공민준과 이소영의 죽이 척척 맞는다. 아무래도 회의 시작 전에 두 사람이 작당 모의를 하고 들어온 것 같다.

“안 그래도 올해 신년에 관련 이야기를 꺼내려 했습니다만, 일이 바쁘다 보니 타이밍을 놓친 것 같습니다.”

팀장들은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광대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소영이 묻는다.

“신년이면…… 인센티브 지급인가요?”

“일시적인 대책으론 직원 이탈을 막기 힘들 겁니다. 이미 소영 씨 부서엔 몇 명 나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번 주에 2명 나갔어요. 들리는 말로는 억이 넘는 연봉을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최근 프로그래머 몸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억대 연봉을 퍼 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가상화폐 판에 다시 거품이 끼고 있다는 증거다.’

앞으로 가상화폐 판은 몇 번이고 거품이 차올랐다가 꺼짐을 반복할 것이다.

그때마다 바다 위의 부표처럼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으려면 확실한 대책을 마련해둬야 했다.

* * *

민철은 작년 이맘때쯤, 헤드헌팅 업체의 소개로 WHTS컴퍼니에 입사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WHTS컴퍼니는 흔한 중소 IT 기업이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민철도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면 무조건 그리했으리라.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난 지금.

그 평가는 180도 뒤집혀서, 업체들이 WHTS컴퍼니 출신 프로그래머면 서로 모셔가려고 돈을 퍼 주고 있었다.

“하암…… 피곤해 죽겠네.”

가상화폐 개발팀 소속인 민철도 신생 가상화폐 업체 3곳에서 제의를 받았다.

적게는 연봉 8천에서, 많게는 1억 2천.

액수가 워낙 크다 보니 이직을 생각하느라 어제도 잠을 못 이뤘다.

‘괜히 옮겼다가 회사가 망하면 어쩌지? 그래도 1억 2천이면 5년만 버텨도 6억인데…… 바짝 벌어서 카페라도 차릴까.’

잡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개발팀 입구까지 도착했다.

평소라면 한산했을 사무실 입구지만, 오늘은 어째선지 사람이 잔뜩 모여서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다들 입구에서 왜 이래?”

민철도 호기심에 이끌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들은 게시판에 붙은 공지문을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사내 메신저로 보냈을 공지를 왜 붙여둔 걸까? 민철은 공지문의 제목을 보고 이유를 알게 됐다.

[임직원 임금 인상안 및 근무시간 조정 안내]

그동안 타 업체로 이직하는 사람이 늘면서 연봉이 올라갈 거란 소문은 많았는데 그 소문이 진짜였을 줄이야.

‘연봉만 올려주면 안정적인 WHTS컴퍼니에서 이직할 이유가 없지.’

타사에서 최소 8천을 제시했으니까 못해도 25%는 인상해 줄 거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공지문 마지막에 적힌 실질 연봉 인상률은 겨우 10%.

개발직군이라고 우대도 없었다. 개발직, 비 개발직 따질 것 없이 일괄 10% 인상이었다. 게다가 그 아래에는 추가 채용으로 직원을 더 뽑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직원이 떠나도 다시 채우면 그만이라는 건가? 이건 너무하잖아.’

이쯤 되면 연봉을 올려줘도 불만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고문 주변의 다른 직원들의 반응은 호평 일색이다.

“이야, 이번에 회사가 돈을 많이 벌었다더니 그게 정말인가 봐요. 이 정도면 회사 다닐 만하겠는데요?”

“우리 회사가 원래부터 연봉은 높은 편이었잖아요.”

“저번 주에 이직한 사람들만 배 아프게 생겼네요. 그러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쯧쯧.”

민철은 주변 직원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서 외딴 섬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참다못한 그는 안면 있는 직원을 찾아서 묻고 나섰다.

“심 과장님, 겨우 10% 올려줬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좋습니까?”

“겨우가 아니죠. 연봉을 깎아도 이해할 사람이 많을걸요?”

“연봉을 깎다뇨?”

“어머, 민철 씨는 공지문 두 번째 페이지 못 봤어요?”

그녀가 손으로 공지문 아래를 가리킨다. 그곳엔 인파로 가려져 있던 추가 공지문이 붙어 있었다.

[개발직군 주4일제 시범 운영 안내]

IT 업계에선 주5일 근무도 생소한데 주4일제 근무라니, 거기다가 기존 인원을 쥐어짜는 형식이 아니라 추가 채용까지 한단다.

“아직도 겨우 10%라고 생각하세요?”

“아이고, 무슨 소리세요. 연봉을 10% 깎아도 인정, 무조건 인정입니다.”

주5일 근무로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는데, 주4일 근무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주4일만 출근할 생각으로 흥분한 민철의 머릿속에서 이직이라는 단어는 깨끗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베네수엘라 원유 거래가 성사된 직후부터 관련 뉴스가 늘어나자, 모든 가상화폐는 폭등을 거듭했다.

한때 3,000달러까지 떨어졌던 비트코인 시세는 사흘 만에 7,000달러를 돌파, 그 외에 알트코인은 기본 2배, 많게는 10배가 넘게 오른 코인도 수두룩했다.

가상화폐의 관심도가 다시 늘어남에 따라 관련 행사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게 된다.

-가상화폐는 최근 2년 사이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습니다. 쌀을 사고, 빵을 사고, 최근엔 석유를 사는데도 쓰였습니다.

행사장에는 2천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모여 가상화폐 세미나를 듣고 있었다.

이번 세미나에는 유명인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가수와 아이돌의 축하 무대를 시작으로 대학교수, 여기에 전직 장관의 축사까지 있었다.

“휴…… 이게 뭔 시간 낭비람.”

초청인 좌석 중에서도 유독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 앞자리엔 이소영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가 총액 1위인 도토리코인을 만든 개발자였기에, 가상화폐 업계에서 추앙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코인 세미나에 참석한 이유는 대학교수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서였다.

-이젠 가상화폐를 한류에 맞게 엔터테인먼트와 융합하여 전 세계 팬들과 연결할 때입니다.

-우리 K스타코인은 전 세계 K팝 팬들에게 국경의 자유를 선사할 것이며……

단상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대표가 자사의 가상화폐 홍보에 한창이다.

썩 나쁘지 않은 외모에 훤칠한 키, 그리고 호감 가는 목소리까지.

업체 대표가 아니라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한 인상이었다. 이소영은 그를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름이 테일러 킴? 어디서 봤던 사람 같은데…… TV에서 봤었나? 아니면 대학에서?’

기억이 날 듯 말 듯, 밀당만 이어질 뿐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가 생각을 포기했을 때쯤, 테일러 킴의 연설이 끝났다.

짝짝짝짝!

이소영은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나오자 형식적으로 박수를 몇 번 쳐줬다.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온 테일러 킴은 그대로 무대 바로 앞 좌석인 이소영의 자리로 다가온다.

“이소영 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귀하신 분께서 저희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는 영국의 귀족처럼 우아하게 허릴 숙인 채, 이소영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이소영은 돌발 행동에 당황했지만, 주변 시선이 너무 많아서 뿌리치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최근 도토리코인의 소식에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가상화폐가 원유 거래에 사용되다니요. 이런 발상을 누가 해냈습니까? 소영 씨가 해내셨습니까?”

“아뇨. 저희 대표님이…….”

“아하. 그러셨군요. 정말 대단한 행보입니다. WHTS컴퍼니가 이룩한 거래로 인해 앞으로 가상화폐는 더 놀라운 성장을…….”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컸다. 얼마나 컸으면 세미나 참석자들이 계속 이쪽을 쳐다볼 정도다. 그럼에도 테일러 킴은 목소릴 낮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사람 좀 이상해. 대화를 시작한 이후부터 계속 칭찬만 하고 있잖아.’

모르는 사람에게 받는 칭찬 세례는 기쁨이 아니라 부담이었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져서 당장에라도 자릴 뜨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신우혁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유 없이 칭찬하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이 단어가 떠오른 뒤에 다시 테일러 킴의 모습을 살펴본다.

굉장히 익숙한 머리 스타일과 캐주얼 블랙 재킷, 워싱 처리된 청바지, 베이지색 로퍼, 그리고 그가 찬 손목시계 브랜드마저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설마……?’

이소영은 아까부터 느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테일러 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우혁의 모든 것을 카피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