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후 코인 재벌 122화
베네수엘라의 제61대 대통령으로 에드윈 로메로가 취임했다.
로메로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임을 고려해 당선 이틀째에 취임식을 진행했고, 바로 다음 날 조직 개편까지 강행.
역대 어느 정부보다 국정 운영에 속도를 내고 있었다.
“정원 내부를 엄청 잘 꾸며뒀네.”
과할 정도로 화려하지만 어딘지 비어 보이는 정원이다.
이곳의 길을 쭉 따라가면 베네수엘라의 심장이라 불리는 대통령궁이 나온다.
“조각상도 전부 으리으리하고…… 여기서부터는 아예 도로 전체를 대리석으로 깔아놨구나.”
정원의 길을 걷는 내내 박태식은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앞서 걷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녀석을 돌아본다.
“긴장할 필요 없어. 이번 협상은 전부 내가 할 거니까. 너는 얼굴도장만 찍으러 가는 거야.”
“누, 누가 긴장했다고 그래?”
“넌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잖아.”
박태식은 속내를 들켜서 그런지 급하게 화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이번 대통령은 당선부터 취임식까지 후다닥 해치워 버렸네.”
“그들에겐 빨라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하긴, 나라 꼴을 보니까 빨리 뭐라도 해야겠더라. 수도인 카라카스에서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이 많더라고.”
“그보다 과할 정도로 모인 국민의 기대가 더 부담스러울걸. 2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는데 생활은 그대로 시궁창이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실망하려나.”
“그냥 실망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분노해서 들고 일어날 거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상황이 거기까지 몰리면 마두로의 잔당들이 다시 정권을 잡겠다고 나설 거다. 아니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고.
“로메로 대통령은 하루라도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 하겠구나. 어? 이거…… 우리 쪽에 많이 유리한 상황이네?”
“그 이상이지. 우리가 일방적으로 벗겨 먹으려 들어도 꼼짝 못 할걸.”
“오호라.”
“물론 너무 노골적으로 굴면 저쪽도 가만있진 않을 테니,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게 좋겠지.”
대화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대통령궁 정문에 도착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커다란 목재 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혀서 우리를 들여보낸다.
끼익-
대통령궁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에드윈이 앉아 있다.
그리고 양옆으로 백여 명에 달하는 관료들이 포위하듯 쭉 늘어서서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다.
박태식이 입구에서 주춤거리는 걸 보고, 녀석의 등을 툭 쳤다.
“신경 쓰지 마. 기선 제압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니까.”
“이걸 보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협상 대상은 에드윈 하나야. 나머진 나무나 풀떼기 같은 배경이라고 생각해.”
나는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에 맞춰서 한 박자 정도 늦게 에드윈이 우릴 맞이하러 나온다.
“신 대표님,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일행분도 환영합니다. 성함이……?”
“박태식입니다.”
우리는 번갈아 악수를 나누고 대화를 재개했다.
“대통령님, 그런데 환영식이 너무 과해 보입니다.”
“저희가 오늘 협상에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이후에 에드윈은 지난번의 감사 인사를 재차 꺼내서 나를 추켜세운 뒤, 바로 본론을 꺼내 든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희가 정권만 넘겨받았을 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래 보이더군요.”
“거기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거듭된 인플레이션입니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면 베네수엘라의 미래는 없었다.
“인플레이션을 멈추려면 지속적으로 외화가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석유 플랜트는 언제부터 작업에 들어갑니까? 전해 듣기론 이미 준비를 끝내두셨다고 하던데요.”
“저도 빨리 사업을 시작하고 싶지만, 업체가 본격적으로 넘어오려면 미국의 제재가 풀려야 합니다.”
“적어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은 지나야겠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에드윈은 살짝 이맛살을 구겼다가 주제를 바꾼다.
“베네수엘라는 즉각적인 외화 수급이 필요합니다.”
“저희의 가상화폐가 필요하단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그렇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에드윈은 고민 없이 손가락을 3개 펴 보인다.
“도토리코인 3,000만 개가 필요합니다.”
환산하면 3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이다. 예상했던 금액을 웃돌았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상환 조건도 들어보고 싶군요.”
“전액 베네수엘라 국채로 처리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향후 20년간 석유 판매 세금 면제, 그리고 지정해주신 8곳의 광산 채굴권도 20년을 보장하는 조건입니다.”
20년간 세금 면제와 채굴권 보장은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다. 사실상 미래에 받을 세금을 미리 이자까지 쳐주고 끌어오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할 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제안은 감사하나, 저는 석유채굴사업 우선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에드윈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눈치다. 이 정도로 퍼줬으면 무조건 승낙할 줄 알았나 보다.
“무려 20년입니다. 원유 세금을 20년간 면제해 주면 그게 얼만 줄 아십니까?”
“20년이든, 30년이든, 어차피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채굴권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저는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원합니다.”
에드윈은 물론이고 우릴 지켜보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답을 재촉한다.
“향후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될 원유의 판매를 전량 도토리코인으로만 결제한다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기간은 3년 정도가 좋겠군요.”
“가상화폐로만요?”
“예. 그 조건이면 가상화폐 수량을 더 얹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때 관료들 사이에 껴 있던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건 불가입니다!”
에드윈의 동생인 시몬 로메로였다.
“원유를 가상화폐로 거래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씀입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십억 달러 가치의 도토리코인을 판 돈으로 올려놓은 거고요.”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단호히 말을 내뱉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조건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우려하는 그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3년의 계약을 했다가 가상화폐의 사고가 터지면 어쩔 겁니까?”
“정확히 어떤 사고를 말씀하시는지.”
“화폐 가치가 폭락한다거나, 아니면 해킹이나 보안 등의 문제로 거래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나는 일부러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당연히 장내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군요.”
“무슨 의미입니까?”
“방금 로메로 씨가 도토리코인의 부실을 우려하시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툭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도토리코인의 부실을 우려하는 분께서, 타인에게 베네수엘라 국채를 떠넘기는 것은 모순 아닙니까?”
“베네수엘라의 신용등급이 낮다곤 하나, 실체가 없는 가상화폐와 비교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글쎄요. 베네수엘라 국채가 도토리코인보다 뛰어났다면 이미 국채를 찍어서 외화를 조달하지 않았을까요?”
시몬은 입을 우물거렸으나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네수엘라 국채는 시장에서 이미 정크 본드(junk bond : 신용등급이 낮은 고위험 채권) 수준을 넘어, 휴짓조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통령님.”
호명 당한 에드윈은 말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업이 베네수엘라에 투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이리스크입니다. 제가 위험을 짊어진 만큼, 베네수엘라 정부도 같이 따라와 달라는 게 무리한 부탁입니까?”
“국가를 기업처럼 운영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시몬이 끼어들려는 것을 에드윈이 도중에 가로막는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형님!”
“조용히 하거라. 그는 베네수엘라의 은인이시다. 예우를 갖춰도 모자랄 판에 소릴 지르게 돼 있느냐?”
“…….”
에드윈은 시몬을 가볍게 제압해버리고 다시 내게로 시선을 둔다.
“우린 이미 뜻을 같이한 동지입니다. 그러니 과실은 물론이고 위험도 같이 나누는 것이 옳습니다.”
그는 시몬을 시작으로, 방 안에 있는 모든 관료를 한 번씩 돌아보고 말을 잇는다.
“저 에드윈 로메로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권한으로 귀사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 *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 에드윈 로메로 당선! 20년 만에 이룬 민주적인 정권 교체.
-에드윈 로메로 “국민 생활 안정이 최우선. 물가와 인플레이션부터 해결하겠다.”
-WHTS컴퍼니, 베네수엘라 국채 30억 달러 매입. 향후 3년간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원유는 도토리코인으로만 거래할 수 있어.
베네수엘라의 정권 교체로 가상화폐 업계는 오랜만에 큰 폭풍을 맞이했다.
다른 소식은 둘째 치더라도, 원유를 가상화폐만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소식은 업계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이에 가상화폐 투자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기관 투자자, 심지어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까지 이번 안건으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원유를 가상화폐로 거래한다니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연준 이사회에서도 대표적인 강경파로 꼽히는 로버트 피셔 총재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물꼬를 트자, 다른 총재들도 한마디씩 말을 거들고 나선다.
“저도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상화폐? 정확한 이름이 도토리라고 했던가요?”
“대체 가상화폐가 뭔데 그러십니까?”
“사이버 머니에 보안성을 강화한 물건입니다. 거래소가 있어서 사고, 팔 수도 있다더군요.”
“데이터 쪼가리로 무슨 거래를 하겠다고. 쯧쯧…….”
가상화폐가 메이저 시장에 알려진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그러니 미국 연준에서도 가상화폐의 개념을 이해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이후에도 가상화폐의 개념으로 설왕설래가 오가자, 피셔가 책상을 소리 나게 내리친다.
“여러분, 지금 가상화폐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 데이터 쪼가리가 원유 거래에 쓰인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원유 거래에 쓰이는 화폐는 달러였다.
달러로 원유를 살 수 있다는 믿음은 금본위제도를 폐지한 이후에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해 줬다.
달러를 찍어내고, 찍어내고, 또 찍어내고.
거의 무제한에 가깝게 달러를 시장에 뿌려도 달러의 가치는 끄떡없으니.
이로 인해 미국은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번 가상화폐 사태는 달러에 대한 도전이고, 그것은 곧 위대한 미국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린 그들이 허튼 생각을 못 하도록, 응징할 의무가 있습니다.”
평소엔 지독하게 의견이 갈리던 연준 이사회였으나, 이번 일엔 만장일치로 피셔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러다 뒤늦게 누군가 번쩍 손을 든다.
“잠깐만요. 피셔, 지금은 시기가 안 좋습니다.”
“어째서죠?”
“이미 오바마 대통령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렇다면 후임인 트럼프 대통령과 이번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건데…….”
그는 얕게 한숨을 토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인 WHTS컴퍼니 대표는 트럼프의 최측근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워진다.
덕분에 피셔는 다시 책상을 내리쳐야 했다.
“조용! 상대가 누구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 사태의 엄중함을 잘 말씀드린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상식적인 대응을 해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