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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코인 재벌-115화 (115/174)

출소 후 코인 재벌 115화

미국 대선이라는 빅 이벤트가 끝난 직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베네수엘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반년 만에 다시 찾은 볼리바르 공항의 풍경은 더 삭막해져 있었다.

기존엔 드문드문 관광객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어서 무장한 경찰만 돌아다닐 뿐이다.

“대니얼 씨! 여깁니다!”

공항 입국장엔 로메로 가문의 삼남이자 제시의 동생인 시몬 로메로가 마중 나와 있었다.

“베네수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메로 씨, 반갑습니다. 그간에 별일 없으셨죠?”

“예, 대니얼 씨가 다녀갔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달라진 게 없다는 뜻은 여전히 베네수엘라가 위기 상황이란 뜻이었다.

애초부터 베네수엘라의 경제난이 단기간에 나아지리란 기대는 없었다.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미국의 경제 제재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예정된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마두로 대통령이 미리 손을 쓴 겁니까?”

“선거뿐만 아니라 연타로 준비했던 탄핵 투표도 무산됐습니다.”

“저런.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우리 같은 정치꾼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 그만입니다만, 시민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베네수엘라는 앞으로도 쭉 이런 상태가 유지될 거다.

독재 정권이 반미를 외치면 외칠수록 국민은 더 고통받을 것이고, 여기에 코비드 사태까지 찾아오면.

‘말 그대로 현실판 지옥도가 펼쳐지겠지.’

이런 미래를 아는 나로선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쉬이 외면할 수 없었다.

물론 미리 투자해둔 게 있는 만큼, 수익을 내기 위해서라도 베네수엘라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제시는 안 나왔습니까? 전화할 때마다 언제 오냐고 성화를 부리더니, 정작 공항에 마중은 안 나왔네요.”

“아, 누나는…….”

시몬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제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흘 전, 마두로 퇴진 시위에 참석했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라니요? 갑자기 무슨.”

“시위 도중에 군이 쏜 포격에 휩쓸리는 바람에…….”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포를 쐈다고?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서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화상을 크게 입어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걱정만 가득했던 머릿속에서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빨리 제시가 있는 곳으로 갑시다.”

* * *

“이쪽은 로메로 저택으로 가는 방향 같은데요.”

“누나는 집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심한 화상이라면서요? 그럼 병원에서 치료해야죠.”

“베네수엘라 병원엔 의사가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당장은 집에서 치료받는 것 말곤 방법이 없습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이곳 베네수엘라에선 그 황당한 소리가 일상이 돼 있었다.

“누나는 저택 별채에 있습니다. 가보시죠. 지금쯤 대니얼 씨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로메로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별채 쪽으로 뛰듯이 걸어간다. 지난 방문 때 별채에서 생활했었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똑똑.

별채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서 노크를 먼저 했다. 그러자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넘어온다.

“우혁이야?”

“그래. 나야.”

“그렇게 오라고 할 땐 안 오더니, 왜…… 이제야 온 거야.”

“미안. 최근에 일이 좀 많아서. 지금 들어갈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가로막는다.

“잠깐만. 들어오지 마. 그냥 문밖에서 이야기하자. 나…… 좀 보기 흉해서 그래.”

“얼굴이라도 다쳤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들어간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별채 안에는 병원에서 쓸법한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로 제시가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등부터 시작해서 오른팔 전체가 새빨간 수포로 가득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전화로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이 이렇게 될 줄이야.

‘내가 더 빨리 손을 썼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하다못해 선거가 치러질 수 있도록 신경만 썼더라도…….’

지금껏 베네수엘라에서 수차례 시위 소식을 들었지만 크게 감흥이 없었다.

원래 제3세계에서 독재자에 맞서는 시위는 흔하디흔한 일 아닌가. 게다가 위치도 지구 반대편인 남미였고.

그러나 다친 제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멀게 느껴졌던 시위가 지독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상처가 많이 흉하지? 가리고 싶은데 지금은 뭘 입을 수가 없네.”

“그냥 있어.”

“멀리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누워 있을 순 없잖아.”

제시는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내가 제지하려 했으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쨘. 그래도 앞은 멀쩡하지?”

“…….”

“표정이 계속 왜 그래.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봐. 나 멀쩡해. 아니면 가슴이라도 만질래?”

“지금 농담할 때냐.”

제시는 웃으며 혀를 쏙 내민다.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미소 속에 그늘이 보이는 것 같다.

“시위하다가 그렇게 됐다며?”

“맞아. 일종의 훈장 같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멋있지 않아?”

“훈장은 무슨. 내가 그러니까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잖아.”

“나라가 위기 상황인데 같이 싸워야지. 너도 한국이 위기에 빠지면 앞장서서 싸울 거잖아. 안 그래?”

“글쎄. 나는 그렇게 애국심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국이 베네수엘라처럼 끔찍한 꼴이 되면 도우러 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나저나 성공했더라?”

“뭐가?”

“트럼프 대통령 만들기 작전. 언론에서 전부 힐러리 당선을 예상하길래, 솔직히 안 될 줄 알았어.”

“나는 승산 없는 판엔 돈을 안 걸어.”

“그럼 베네수엘라에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제야 그늘졌던 그녀의 얼굴에 진짜 미소가 피어난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왠지 안심이 돼.”

“너도 알겠지만, 베네수엘라 건은 나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내부에서 받쳐주지 못하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어.”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곧 결판이 날 것 같으니까.”

“결판이라니?”

그녀는 화상으로 엉망이 된 자기 오른팔을 가리킨다.

“내가 다친 것 때문에 우리 집 남자들 독이 바짝 올랐어. 특히 원칙주의자였던 첫째 오빠가 충격이 컸나 봐.”

첫째 오빠라면 에드윈 로메로, 현 베네수엘라 야당의 수장이다.

그는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마두로를 끌어내려야 한다며 몇 번이나 국민투표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투표는 무산됐으며, 최근엔 그의 지지도까지 하락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나 보네.”

“맞아. 그래서 이번엔 고집을 버리고 과격한 방법을 쓰더라도 마두로를 끌어내릴 생각인가 봐.”

지금 쓸 수 있는 과격한 방법이라면 쿠데타나 암살밖에 없다.

양쪽 모두 성공하더라도 베네수엘라는 한동안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동안 베네수엘라 국민은 다시금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겠지.

‘혼란을 수습하려면 최대한 빨리 망가진 경제를 되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역시…….’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제시가 거의 기다시피 해서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 과정이 어찌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미 그녀의 이마와 어깨, 가슴골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제시, 무슨 짓이야? 그만둬!”

내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신음을 참으며 끝까지 기어 와서는 내 발치에서 엎드렸다.

“부탁해. 제발 우리를, 우리 베네수엘라를 도와줘.”

“알겠으니까 일어나.”

내가 몸을 붙잡고 일으키는 동안,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전신은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진짜 도와주는 거…… 맞지?”

“내가 투자한 걸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도울 거니까.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마.”

“헤헤. 다행이다.”

제시는 내게 기대서 다시금 배시시 웃더니 눈을 감는다. 체력의 한계가 왔나 보다.

“미안한데 원래 자리로 데려다줄래? 움직이기가…… 좀 힘드네.”

나는 그녀를 안았다가 깜짝 놀랐다.

몸이 너무 딱딱했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사람이 아니라 나무토막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너 바보야? 몸이 이런 꼴이 됐으면 네 걱정부터 할 것이지. 앞으로 이런 짓 하면 가만 안 둬. 알겠어?”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빨리 대답부터 해.”

“알겠어…….”

짜증이 확 치솟는다. 그녀 때문에 난 짜증이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절박한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을 후순위로 미뤄 버렸던 내게 내는 짜증이었다.

* * *

서울 이스턴 호텔의 프라이빗 룸.

방 안에는 한 명 보기도 힘들다는 재벌 총수가 4명이나 모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흠……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요?”

테이블 좌측에 앉은 SG그룹의 유성광 회장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이어서 대현그룹의 이태석 회장도 목소릴 높였다.

“바쁜 사람들 앉혀놓고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구먼. 상황 설명이라도 해줘야 기다리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그들의 시선은 중앙에 앉은 오성의 전용택 부회장을 향해 있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듯 고갤 숙이며 수습에 나선다.

“죄송합니다. 곧 연락이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아니, 그러니까 정확히 뭘 하려고 우릴 모았는지부터 말해달라니까? 트럼프와 관련됐다고 해서 모이긴 했는…….”

바로 그때, 프라이빗 룸의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곧장 ‘철걱’ 하고 문이 열린다.

“안녕하십니까. 오래 기다리셨나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기껏해야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재벌 총수들이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전용택이 그를 맞이한다.

“아닙니다.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전용택은 그를 상석으로 안내한다. 그러는 동안 이태석 회장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혹시 WHTS컴퍼니의?”

“맞습니다. 제가 WHTS컴퍼니의 대표인 신우혁입니다. TV에서만 보던 분들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재벌 총수들은 기가 막혔다. 트럼프와 관련된 일이라고 해서 직접 여기까지 왔건만, 나타난 것은 겨우 풋내기 회사 대표였다니.

그는 총수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화를 끌고 나간다.

“제가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바로, 해외 대규모 투자 건을 제안하기 위해섭니다.”

“갑자기 투자라니,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냥 투자가 아니라 대규모 플랜트 사업 건이니까요.”

이곳에 모인 재벌가는 오성그룹, 대현그룹, GT그룹, SG그룹.

전부 해외 플랜트 건설 경험이 있는 회사들이었다.

해외 플랜트는 했다하면 조 단위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만큼, 재벌 총수들도 가만히 경청에 들어갔다.

“본 석유 플랜트 프로젝트는 계약금액만 총 70억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70억 달러라는 소리에 이태석 회장은 깜짝 놀라서 헛숨을 삼켰다. 기존 플랜트 사업은 기껏해야 5억 달러, 많으면 10억 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치솟았던 기대가 짜게 식어버린다.

“장소는 베네수엘라의 라구니야스 지역입니다.”

베네수엘라라는 이름이 나오니 바로 반박이 쏟아진다.

“잠깐만. 베네수엘라는 국가 부도 상태라서 돈을 낼 형편이 안 될 텐데?”

“거긴 원유와 관련된 사업 자체가 국가 소유잖아.”

“미국 제재 때문에 진입 자체도 힘들지.”

총수들 입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쏟아졌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WHTS컴퍼니는 해외기업 중 유일하게 베네수엘라의 석유채굴사업우선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재 문제도 이미 이야기가 진행 중이고요.”

해명을 내놔도 총수들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베네수엘라 관련 사업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치켜든다.

오성그룹의 전용택 부회장이었다.

“오성은 참여하겠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이태석 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본다.

“자네 베네수엘라가 어떤 상탠지 몰라서 그러는 게야?”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는 이태석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다른 분들이 참여 의사가 없다면 오성 혼자서라도 진행하겠습니다.”

“전용택 씨, 그러기엔 프로젝트 규모가 너무 큽니다.”

“신 대표님, 저희 오성입니다. 이 정도 프로젝트쯤은 단독으로도 너끈히 해낼 수 있습니다.”

총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베네수엘라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전용택만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멍청이들. 이게 황금 동아줄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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