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후 코인 재벌 112화
내가 디트로이트 건으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WHTS컴퍼니의 오전 회의는 화상통화로 방식을 바꿨다.
회의 시간도 이른 아침에서 저녁으로 조정했다.
-미국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정치적인 민감도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특히 SNS에서는 매번 양측 지지자들끼리 싸워대는데. 어휴. 이걸 관리하자니 죽을 맛입니다.
-공감해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너무 와닿는 거 있죠.
퇴근 직전 시간이라 그런지, 회의는 평소보다 더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 참. 얼마 전에 힐러리 캠프에서 우리 회사를 공개적으로 저격했잖아요. 뭐라고 했더라……
-수상한 회사라고 했었죠. 페이퍼 컴퍼니라고도 했고요.
-맞아요. 페이퍼 컴퍼니. 듣고는 어이가 없더라고요. 아무리 선거가 급해도 그렇지, 멀쩡한 회사를 페이퍼 컴퍼니로 만드는 게 어디 있어요?
-분하지만 대선 기간에는 가만히 있는 게 낫습니다. 까딱 잘못했다가 낙인이라도 찍히면 곤란해집니다.
-그래도 해명은 해야죠. 이대로 있다간 우리 회사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어요?
대선 기간은 참아야 한다. 아니다. 그래도 해명 정도는 해야 한다. 해명 정도론 안 된다. 적극적으로 음해에 대응해야 한다.
팀장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회사의 신뢰성이 중요한 가상화폐 개발팀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쪽이었고, 미국 시장이 중요한 SNS 관리팀과 전기차 지원팀은 몸을 사리자는 쪽이다.
팀마다 의견이 갈리는 사인이다 보니, 최종 결정은 내 몫으로 남게 됐다.
-대표님 생각은 어떠세요?
강경파의 수장인 이소영이 물어온다. 그녀는 눈빛으로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서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나는 그녀의 눈빛을 능숙하게 흘려보내고 입을 뗀다.
“실리만 따지면 대선이 끝날 때까지는 조용히 있는 쪽이 맞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는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온건파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반대로 이소영과 강경파 팀장들은 주둥이가 나팔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악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딱 대답을 내놓으려던 차에 통화 알람이 깜빡거린다.
삐빅. 삐빅. 삐빅.
단체 채널이 아니라 개인 채널에서 연결을 요청하는 신호음이었다.
발신자는 보안팀의 수장인 넬라였다.
나는 회의 채널에 있던 팀장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그녀의 전화를 받는다.
-회의 중에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급한 일인인가 보군요.”
그녀는 고갤 끄덕거리고는 영상 옆에 이미지로 만든 그래프 표시했다.
-그래프는 보안팀에서 파악한 외부 공격 시도 횟수입니다. 저번 달까진 하루평균 160회 정도의 시도가 있었지만.
넬라가 화면을 조작하자 그래프의 길이가 길게 연장된다.
-이달 들어서 공격 횟수가 약 3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도토리코인이 유명해져서 해커들의 타깃이 된 겁니까?”
-아닙니다. 기존 공격은 도토리코인 자체를 탈취하려고 접근한 것이었다면, 이번 공격은 저희 내부 정보를 노린 접근입니다.
은행에 들어와서 금고를 노리는 게 아니라 은행 내부 정보를 노렸다고?
절대 평범한 해킹 시도가 아니었다.
-수상해서 해커들 뒤를 캐봤습니다.
“범인이 누구던가요?”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 작은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았더군요.
넬라는 해킹과 보안 쪽에서 탑티어에 속하는 능력자다. 그런 그녀가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면 상대도 보통이 아니라는 뜻.
“일반 해커는 아닌가 봅니다.”
-의심되는 쪽은 FBI나 CIA의 디지털 기술 혁신국, 아니면 중국의 국가감찰전산국일 수도 있습니다.
내부 정보를 노렸다면 정황상 중국은 아닐 테고, 미국의 정보기관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내부 정보가 털려서 가상화폐 횡령이나, 비리, 보안 취약점 따위가 드러나면 그대로 선거에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힐러리 캠프에선 우릴 작정하고 죽일 생각이었나.’
상대가 작정하고 칼로 쑤시려 드는 데 가만히 있으면, 그땐 다른 것들도 나를 호구로 보고 덤벼들 거다.
“이번 건은 확실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겠군요.”
-정보기관의 해킹 시도를 공론화할 생각이시면 데이터를 미리 준비해두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럴 땐 직접 칼로 맞받아칠 것이 아니라 우회적인 방법을 쓰는 게 낫습니다.”
때로는 직접 칼로 찌르는 것보다 우회적으로 찌르는 칼이 더 깊이, 치명상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 * *
-이번 디트로이트 부활 프로젝트에는 다수의 기업이 참여 의사를 표했습니다. 여기엔 국내 자동차 기업도 있고, 해외의, 정확히는 중국에 공장을 지으려던 업체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자유 무역이라는 달콤한 헛소리에 우리는 속았습니다. 중국의 배만 불려준 꼴이란 말입니다. 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절대 불공정 무역을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트럼프의 연설이 한창 흘러나오던 TV가 갑자기 꺼진다.
TV를 끈 이는 선거 캠프의 주인인 힐러리였다. 그녀는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한다.
“저 늙은 광대 놈을 보면 속이 메스껍군요. 앞으로 트럼프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세요.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캠프 직원들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고는 책상을 두드린다.
그러자 앉아 있던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경청할 준비에 나섰다.
“지지율 조사 결과는 아직인가요?”
“정기 지지율 조사에서는 여전히 후보님이 5% 이상 앞섭니다. 하지만 이번 긴급 지지율 조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죠?”
직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목소릴 쥐어 짜냈다.
“후보님이 2% 뒤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정기 조사에서는 내가 5% 높았다면서요? 그런데 5일 만에 7% 차이가 난다고요? 이걸 나더러 믿으란 겁니까?”
“아, 아니 그게…….”
“뭔가 오류가 있었을 거예요. 조사기관에 전화 넣어서 확인해보세요. 다들 빨리 움직여요. 빨리.”
그녀는 애꿎은 직원들을 닦달하고 나섰다. 그러다 여론조사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이상 없음’이라는 대답을 들은 뒤에야 결과를 인정했다.
“그러니까 내가 늙은 광대에게 지지율이 밀리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히는 조사 기간에 딱 한 번 밀렸습니다. 다음 주 조사에선 또 달라질 수 있는 거고…….”
“선거가 겨우 2주 남았는데! 다음에 안 바뀌면! 그땐 어쩔 거예요?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그녀의 포효 한 방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평소에도 이런 일이 잦았었기에, 캠프 직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의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
“분석 결과나 내놔봐요. 뭐가 지지율을 이렇게 흔든 거예요?”
“트럼프 캠프에서 내놓은 디트로이트 부활 프로젝트의 영향이 큽니다.”
“그 프로젝트는 저번에 페이퍼 컴퍼니가 의심되는 회사랑 한데 묶어서 해결된 거 아니었어요?”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이상한 영상이 퍼지는 바람에…….”
“영상? 그게 뭔가요?”
말을 꺼낸 직원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서 영상을 틀어놓는다.
-헤이. 헤이. 개같이 똥통에 빠진 디트로이트가 버림받은 지 벌써 20년. 이젠 희망이 없어. 모두가 여길 떠났어. 남은 건 오직 나 같은 패배자뿐.
영상은 디트로이트 시내를 돌아다니며 찍은 랩이었다.
빠른 템포의 랩과 함께 도시 곳곳을 보여주는데, 버려진 건물과 텅 빈 도로, 문 닫은 상점들이 교차로 나타났다.
-뭣도 모르고 입 털어대는 정치인들 모두 아웃. 트럼프 너도 똑같아. 어차피 같은 속물.
-너희가 뭘 알아. 바뀌는 건 없어. 여긴 이미 끝장. 희망처럼 멍청한 단어는 젠장.
이대로 랩이 끝나는 듯하다가 다시 디트로이트 도로 쪽을 보여준다. 예전 영화로 유명세를 치렀던 디트로이트 8마일 도로였다.
-오! 씨X. 뭘 하는 거야? 건물을 부수고 있어? 이번은 진짜라고?
수백 대의 중장비들이 흩어져서 구도심의 건물을 철거한다.
그 옆엔 마커로 구획까지 처져 있었는데 구획의 팻말에는 [테슬러 공장 건설 예정지]라고 쓰여 있었다.
-엿 같은 정치인. 이번은 다를까? 이번은 믿을까? 내가 또 속을까?
그러다 영상이 휙 전환되면서 대선 토론회 영상이 나온다. 힐러리가 트럼프를 공격하는 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사기꾼입니다! 디트로이트 프로젝트는 급조한 공략을 내세워서 표를 받아보겠다는 수작질에 불과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거짓말! 사기꾼! 거짓말! 사기꾼! 거짓말!
영상은 힐러리의 목소리와 얼굴을 교차로 편집했다.
그러다 점점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두 눈이 번쩍거리고 입에서는 무지개 폭포수와 날개 달린 고양이가 쏟아진다.
-나는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거짓말! 사기꾼! 거짓말! 사기꾼! 거짓말!
계속 같은 목소리가 반복되자 힐러리가 영상을 꺼버렸다.
“이게 대체 뭡니까?”
“인터넷에 이 영상이 퍼지고 있습니다. 벌써 3,000만 번이나 공유된 것이 일종의 밈처럼 된 듯합니다.”
“밈?”
“인터넷이나 SNS에서 유행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난해한 영상이지만 영상이 뜻하는 바는 확실했다.
힐러리가 사기꾼이라고 소리 지르는 동안, 트럼프는 실제로 디트로이트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
“이딴 저급한 영상을 3,000만 번이나 공유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그 머릿속을 쪼개서 들여다보고 싶군요.”
그녀는 한참이나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안 되겠어요. 우리도 캠프에서 비슷한 걸 만들어서 올려보세요.”
“후보님, 원래 인터넷 밈이라는 것은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웃긴 소리! 멍청한 SNS에서 많이 노출되면 하면 그게 곧 유행입니다. 그러니 SNS 업체에 연락해서 저딴 영상 내리고 우리가 만든 영상을 최상단에 올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까?”
그때 젊은 캠프 직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저, 저기……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뭐가 힘들단 거죠?”
“이번에 밈 영상이 올라온 SNS의 운영사가…… 얼마 전 후보님이 공격한 WHTS컴퍼니입니다.”
* * *
샌프란시스코의 테슬러모터스 본사 탕비실.
TV 앞에는 50여 명에 달하는 임직원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이면 소란스러운 것이 정상이건만, 오늘은 모두가 숨을 죽인 채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선 개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트럼프 후보가 선거인단 215명을, 힐러리 후보는 203명을 확보했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 후보가 앞서고 있군요. 정확히 몇 표를 받아야 당선입니까?
-매직 넘버라 불리는 270명을 넘어서면 사실상 당선인데요. 이번 대선은 여기 보이는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미시간이 포함된 러스트벨트 지역이 중요 접전지로 보입니다.
-미시간이면 디트로이트가 포함된 곳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번 선거에 트럼프 후보가 디트로이트에 힘을 준 만큼,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하나둘 투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직원들 입에서 환호와 탄식이 나온다. 이번 대선 결과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을 직원들도 아는 것이리라.
나 역시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용히 앉아서 선거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트럼프가 이긴다. 아니, 이겨야 한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더 흘렀을 때쯤, 접전지로 분류되던 러스트벨트 지역이 공화당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물든다.
-트럼프 후보가 매직 넘버 270명을 넘어섰습니다. 그에 반해 힐러리 후보는 겨우 208명에 불과합니다. 이제 트럼프 후보의 당선 확률은 95%로 치솟았습니다!
이쯤이면 트럼프가 승리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탕비실에 모여 있던 직원들은 대부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일부 열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은 자신이 당선되기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내지른다.
‘역사는 바뀌지 않았어. 다행이다.’
승리할 것을 알고 있었어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결과를 모르고 선거에 임한 후보들은 얼마나 떨렸을까?
-트럼프 후보님 한 말씀 해주시죠.
-어…… 음…… 좋군요. 좋아요. 그래도 상황을 더 지켜봅시다.
화면에 비친 트럼프의 얼굴에도 얼떨떨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부리나케 어딘가로 사라진다.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리려고 자리를 뜬 걸까? 아니면 시원한 콜라가 생각났을지도 모르겠다.
쿵!
갑자기 탕비실 문이 열리면서 비서가 뛰어 들어온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이었다.
“대표님! 큰일 났어요!”
워낙 다급한 목소리인지라 탕비실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여길 쳐다본다.
“무슨 일이죠?”
“저, 저, 저, 전화가.”
“침착하세요. 심호흡 한 번 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비서는 내 손에 강제로 전화기를 쥐여주며 소리친다.
“그럴 시간 없어요! 빨리 받으세요! 트, 트럼프 후보자, 아니,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전화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