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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코인 재벌-102화 (102/174)

출소 후 코인 재벌 102화

서울이스턴 호텔의 귀빈실.

본디 조용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소지만 오늘은 예외적으로 호화로운 만찬이 올라오고 있었다.

금가루 포인트를 준 전복, 감태를 얇게 감싼 캐비어, 트러플 향이 맴도는 구운 보리새우, 제철 나물과 송로버섯, 직화 한우 갈빗살, 들기름을 곁들인 옥돔구이.

평소 같았으면 한 점씩 맛이라도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내가 손을 놓고 있어서 그런지, 마주 앉은 상대도 음식을 먹지 않는다. 덕분에 테이블에 세팅된 음식은 처음 나왔을 때 그대로 식어가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나를 이곳에 초대한 전용택이 조심스럽게 목소릴 낸다.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후…… 괜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질러서는.’

오성그룹은 정부를 상대로 광범위한 로비를 넣고 있었다.

목적은 게임에 가상화폐 도입을 풀어달라는 것.

게임에 적용된 각종 규제가 해결된다면 환영할 일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정계엔 곧 피바람이 불 거다. 이런 타이밍에 우리 이름이 오르내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마음 같아선 왜 묻지도 않고 로비를 벌였냐고 소릴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미래를 모르는 전용택은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일을 해준다고 착각을 하고 있을 터.

여기서 부연 설명도 없이 윽박질렀다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다.

“혹시 최근에 정부를 대상으로 가상화폐 관련 로비를 넣으셨습니까?”

“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전용택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행동을 떠벌이기 시작했다.

“아주 우연히 WHTS컴퍼니가 게임 산업에 진출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상화폐와 게임. 바로 그림이 그려지더군요. 하지만 바다이야기 사건 이후로 게임에 환금성 화폐 도입은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입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해결하라고 지시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돌아올 겁니다. 핫핫핫!”

내 속도 모르고 으쓱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뒤통수를 후려 갈겨주고 싶다.

그래도 웃는 놈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선의로 나선 것이니 최대한 좋게좋게 이야길 꺼낸다.

“부회장님께서 신경 써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허나, 이번 건은 저희가 직접 해결하고 싶군요.”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요. 저번 배터리 사태 때 도움을 받은 보답이라고 할까요?”

미안하지만 전혀 부담스럽지도 않고, 전혀 고맙지도 않다. 한시라도 빨리 이번 건에서 손 떼고 꺼져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나는 인내심을 끌어올려서, 다시금 좋은 말로 철회를 요청한다.

“로비는 중지해 주십시오. 저는 정치권과 엮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선 것 아닙니까. 일은 오성그룹이 처리하는 것이니 WHTS컴퍼니의 이름이 거론될 일은 없습니다.”

“게임에 가상화폐 규제 건을 로비하면 누가 요청했는지 너무 뻔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 정도 말했으면 눈치껏 물러설 만도 할 텐데, 전용택은 쇠심줄이라도 씹어 먹었는지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한번 작업에 들어가면 발을 빼기도 애매합니다. 이번 건은 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전용택 씨.”

내가 목소릴 내리깔았더니 전용택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번 정권에 구린 구석이 있다는 거, 전용택 씨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어흠. 어흠.”

전용택은 갑자기 헛기침을 반복하며 시선을 회피한다.

“이미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뒤를 파고 있습니다. 썩은 고름 덩어리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란 말입니다.”

“그래 봤자 잠시 시끄럽고 말겠지요.”

“기업의 오너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합니다.”

“최악이라고 해봤자 대국민 사과 정도 아니겠습니까?”

안일했다. 너무 안일해서 그가 가엾게 느껴질 지경이다.

곧 국민의 분노가 쌓아 올린 재판대가 세워진다. 그 재판대의 자리 중 하나는 그의 몫이 될 것이다.

“아무튼, 이번 건은 저희가 자체적으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로비는 그만해 주십시오.”

나는 더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자릴 털고 일어난다.

내가 귀빈실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 * *

오성그룹이 가상화폐 규제를 풀고자 움직인다는 소문은 증권가를 들끓게 했다.

최근에 오성은 허먼사를 인수하고 테슬라와 계약을 맺는 등의 과감한 행보를 보였기에, 또 큰 건을 터트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이번 소문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 곳은 증권가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테슬라 사태로 곤욕을 치렀었던 대현그룹 역시 오성그룹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성 놈들이 가상화폐에 투자를 많이 했으니 규제를 푸는 건 이해가 된다 이거야. 그런데 여기에 게임이 왜 들어가?”

대현의 이태석 회장이 질문을 던지자, 임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릴 냈다.

“테슬라의 최대 주주인 WHTS컴퍼니에서 게임 개발자를 대거 영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은 오성이 지원 사격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WHTS컴퍼니?”

이태석은 WHTS컴퍼니의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렸다. 테슬라를 한국에 끌고 와서 이 사달을 낸 원흉 아닌가.

“그 고얀 놈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 했거늘.”

이미 대현그룹은 WHTS컴퍼니와 테슬라를 쫓아내려고 여러 차례 압력을 행사했었다.

환경부에 보조금 축소를 요청하거나, 국토부에 인증 취소 로비도 수 차례 넣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성이 나타나서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있었다.

“그것들이 또 뭔 짓거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야?”

“아무래도 게임과 가상화폐를 어떻게 합쳐서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쯧쯧.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판을 벌여? 지 애비 병수발이나 들 것이지.”

이태석은 한참이나 혀를 차다가 코웃음을 친다.

“전용택이가 손대는 일이면 잘 될 리가 없어. 돈만 잔뜩 쓰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게야.”

“전용택 부회장의 평가는 말씀하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같이 묶인 WHTS컴퍼니의 대표는 수완이 보통이 아닙니다.”

“고놈이 뭐 그리 잘났기에 그런 말이 나와?”

“WHTS컴퍼니가 발행한 도토리코인이라는 가상화폐가 있습니다. 그 코인의 시가 총액이 오성전자의 시가 총액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오성전자의 시가 총액은 대현자동차 시가 총액의 2배가 넘는다. 그런데 무시하던 가상화폐의 가치가 그에 맞먹는다고 하니 이태석은 눈이 확 뜨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도토리코인이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가상화폐라는 점입니다.”

“신생? 언제 출시됐길래?”

“작년 이맘때쯤, 그러니까 겨우 1년이 조금 넘은 셈입니다.”

출시 1년이 된 가상화폐의 가치가 오성전자에 버금간다면 앞으로 얼마나 클지 짐작이 안 됐다.

이태석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저것들은 필시 위협이 될 게야. 어떻게 해서든 못 뭉치게 막아야 해.”

그때 눈치 빠른 임원 하나가 잽싸게 방안을 제시한다.

“둘을 떼어낼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성그룹이 도움이 안 된다는 시그널을 주면 됩니다.”

“무슨 수로?”

“이번에 로비를 넣은 안건을 방해하면 어떻습니까? WHTS컴퍼니 측에서 대규모 채용까지 하며 힘을 준 사업이 좌초되면 자연히 둘 사이는 벌어질 것입니다.”

이태석은 계책을 듣자마자 이거다 싶어서 손뼉을 쳤다.

“아주 좋아. 신사업에 타격을 주고, 둘 사이에 결속까지 끊어버리니, 이게 바로 일거양득이로군.”

“마음에 드신다면 대외 관리팀에 관련 업무를 진행하라 해두겠습니다.”

“됐어.”

이태석은 의자 등받이에 깊게 묻고 있던 몸을 일으킨다.

“이번 일은 내가 직접 나서지.”

* * *

배틀로얄 그라운드 제로의 개발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다소 어수선했던 인원 배정은 정리가 끝났고, 80% 수준이었던 게임 완성도도 어느덧 베타 버전 공개를 앞둔 상황이었다.

“가장 많이 지적받았던 끼임 문제와 어색한 모션은 최대한 수정을 진행했습니다. 아직 미흡한 점도 있지만, 우선은 베타 테스트를 진행하며 차차 고쳐 나가기로 했으며…….”

회의실 단상에는 한석호 팀장의 브리핑이 한창이다.

월 45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근무 시간을 줄인 덕분에 안색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다.

창작자의 컨디션이 좋으면 결과물도 좋게 나오는 법.

나는 그가 더 나은 게임을 출시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틀로얄의 베타 버전 공개는 전체 공개보다 일부 사용자에게만 접속을 허용하는 클로즈 베타 형식이 될 예정입니다.”

한석호의 시선이 회의장의 상석에 앉아 있던 내게로 향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타 테스트를 사내에서 간단한 이벤트 전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내 이벤트면 정확히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걸까요?”

“배틀로얄 게임으로 사내 대회를 열었으면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직원들이 ‘오오!’ 하고 기대하는 목소리를 낸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군요. 다수가 동시에 전투하는 게임이니 진행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이왕이면 대회에 소소한 보상도 걸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보다 더 크게 기대에 찬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메운다.

IT 기업인지라 직원들 나이가 젊었고, 게임 관심도도 높다 보니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자, 그럼 대표님도 승낙해 주셨으니 대회의 일정과 진행 방식을 공지하겠습니다. 먼저 일정은 다음 주 수요일부터…….”

한석호는 신이 나서 대회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열정이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배틀로얄이 어째서 성공한 게임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옆으로 비서가 조용히 다가와서 휴대폰을 내민다.

“대표님, 오성그룹의 전용택 부회장 전화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했답니까?”

“그것까진 저도 잘…….”

일단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

“전화 받았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신 대표님. 저 전용택입니다.

“예,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말이죠…….

짧은 인사만 오갔음에도 평소와는 다른 기류가 느껴진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가상화폐 규제 완화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그 건은 제가 캔슬해 달라고 했을 텐데요.”

-그날 바로 지시는 내려놨습니다만 도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젭니까?”

-도중에 대현그룹이 끼어들어서 역로비를 펼쳤다고 합니다.

대현그룹이면 저번 테슬라 보조금 건으로 약이 바짝 올랐을 텐데, 이번에 복수할 생각인 것 같다.

-저희가 이대로 빠져 버리면 게임 산업의 규제가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WHTS컴퍼니의 향후 계획에 차질이 생길 거고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전용택의 목소리에서 진심으로 이번 일을 미안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주려고 나섰다가 초를 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인 나는 대현이 역로비를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나는 처음부터 국내에서 배틀로얄 게임을 출시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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