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이소영은 피시방에 간다던 신우혁을 따라나섰다.
매번 짓궂은 장난을 치는 그였기에, 이번에도 자신을 놀리려고 피시방 이야길 꺼낸 줄 알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전자 상가도 아니고, 컴퓨터 개발사도 아닌, 진짜 게임을 하러 가는 피시방이었다.
"소영 씨, 입구에서 뭐 하고 있어요? 빨리 들어가시죠."
"진짜 피시방에 가는 거였어요?"
"그럼 어디 갈 줄 알았습니까?"
이소영은 그의 재촉에 못 이겨서 피시방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길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그가 물어왔다.
"피시방은 처음이죠?"
"그럴 리가요. 학교 다닐 땐 자주 다녔었어요."
"오, 의외네요."
"원래 그 나이대엔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잖아요. 그게 중학생 때였으니까... 벌써 10년 전이네요."
이소영의 기억 속 피시방은 어둡고, 시끄러우며, 담배 연기가 꽉 찬 공간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기억 때문인지 피시방에 간다는 생각을 하자 본능적으로 거부감부터 밀려온다.
'대표님이 나를 피시방에 데려온 이유가 뭘까? 설마 이게 데이트는 아니겠지?'
이소영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물음표가 떠다니는 동안, 다시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중학생 때 이후에는 안 와봤고요?"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죠. 고등학교부터는 미국에서 다녔거든요."
"그럼 피시방 환경이 바뀐 걸 모르겠군요."
"바뀌다뇨? 뭐 가요?"
"보면 알 겁니다."
어느덧 피시방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앞장서서 피시방 문을 열자, 안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의 소음이 넘어온다.
"야! 야쓰오 고르지 말라고 했지! 내가 먼저 찜해뒀잖아!"
"그런 게 어디있어! 너는 제드 골라!"
"울베 쪽에 적 둘! 울베 쪽에 적 둘! 스나 조심!"
"아니, 다들 뭐해? 뒤로 빠지지 말고 화물을 밀라고! 아, 진짜. 팀운 더럽게 없네."
피시방의 어둡고 시끄러운 풍경은 어린 시절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여긴 담배 냄새가 안 나네요?"
"모든 피시방에선 금연입니다. 그래서 이젠 게임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쉬거나, 연인과 데이트하러 찾는 경우가 늘었죠."
유독 데이트라는 말에 힘을 준다. 이소영은 입을 살짝 삐죽이며 말했다.
"그래서 진짜 데이트하러 온 거 맞아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런 거지 일단이 왜 붙어요."
그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피시방 카운터로 향했다.
이미 계산이나 자리 준비는 다 해둔 건지, 이소영이 할 일은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 전부였다.
"대표님, 피시방에 왜 왔는지 진짜 안 가르쳐주실 거예요?"
"소영 씨 때문에 온 겁니다."
"끝까지 데이트 핑계를 댈 생각은 아니시죠?"
"엄밀히 따지면 데이트보다는 업무에 더 가깝겠군요."
"이게 업무요?"
그는 고갤 끄덕이고는 잔뜩 분위기를 잡으며 말을 이어간다.
"앞으로 우리 회사를 먹여 살릴 굉장히 중요한 업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 * *
초창기의 피시방이 오직 게임만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2010년대부터의 피시방은 식사와 휴식까지 가능한 종합휴게 공간이 됐다.
카페 수준의 커피 음료는 기본이고, 햄버거, 핫도그, 떡볶이, 돈가스, 제육 덮밥 같은 요리까지 주문할 수 있었다.
타닥. 탁탁. 탁.
우리 테이블에도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놓여 있다. 한참 전에 주문한 것들이지만 좀처럼 손을 댈 여유가 없다.
"대표님, 본진 쪽 도와주세요! 적들이 옆길로 돌아오고 있어요!"
"버텨 봐요. 가고 있으니까."
"안 될 거 같아요. 자꾸 힐러만 노리고 들어와요! 앗! 궁 쓴다! 안 돼!"
우린 블리쟈드에서 출시한 신작 FPS 게임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우스를 휘젓고 있었다.
"이번 수비만 하면 이기는 거 맞죠? 통로만 잘 막아봐요."
"소영 씨만 살면 이깁니다."
"이번은 진짜 안 죽을 거라구요."
이소영도 처음엔 게임할 생각이 없다고 툴툴거렸지만, 어느새 그런 말은 쏙 들어가 버렸다.
입술을 앙다물고는 열심히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안타까워하고, 기뻐했다가, 또 울분을 토한다.
"아으! 또 졌어요! 분해!"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또 패배다. 애초에 초심자인 그녀가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승부의 세계는 물렁 하지 않았다.
"게임 재미있죠?"
내가 묻자, 이소영은 갑자기 얼굴을 붉힌다. 자신이 게임에 몰입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가 보다.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면 어떨 거 같습니까?"
"유튜버들이 그러고 있는 거 아녜요? 와츠에 게임 영상을 올리고 후원을 받는 케이스도 있고요."
"그건 엄밀히 따지면 게임이 아니라 영상을 제작해서 돈을 버는 형태입니다."
"그게 아니면... 프로게이머 말곤 없잖아요."
나는 따가운 목을 축일 겸 커피를 찾았다. 얼음이 다 녹아서 밍밍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이것도 감지덕지다.
"혹시 대표님께서 그런 게임을 만들 생각이세요?"
나는 그대로 커피 빨대를 문 채로, 손가락만 동그랗게 말아서 보여준다.
"현실성이 없는 아이디어예요. 어떻게 게임만 해서 돈을 벌 수 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린 이미 비슷한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직접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을 아꼈다. 그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바로 정답을 맞힌다.
"소셜 채굴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답입니다. 게임판 소셜 채굴이죠."
게임 플레이 보상으로 가상화폐를 주는 방식은 미래에 굉장히 핫한 주제였다.
일명 P2E(Play to Earn)로 불리며 한때 메이저 게임사에서도 앞다퉈서 뛰어들던 분야였다.
인기가 한 철 유행처럼 금방 사그라들어서 흐지부지돼버렸지만.
"소영 씨 생각은 어때요? 게임판 소셜 채굴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못할 이유는 없어요. SNS 사용자에게 보상을 주듯이, 게임 플레이나 승리했을 때마다 보상을 지급하면 되는 거니까요. 다만..."
그녀는 모니터를 슬쩍 쳐다본다. 그곳엔 방금까지 플레이하던 블리쟈드사의 FPS 게임이 떠 있었다.
"게임에 가상화폐 보상까지 줘가며 키울 가치 있냐는 고민해야 봐야겠죠? 어쨌거나 게임이 SNS보다는 가치가 덜 한 건 사실이잖아요."
"게임은 소영 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돈이 됩니다. 방금 우리가 했던 게임만 해도 출시 한 달 만에 3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이소영은 깜짝 놀라서 다시 모니터를 돌아본다.
"이 게임이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만약 게임에 가상화폐 시스템을 완벽하게 녹여낼 수 있다면 더 크게 흥행할지도 모르죠."
"아..."
나는 고갤 끄덕거리는 그녀 앞에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제 계획을 실현하려면 두 가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준비물은 보상으로 지급될 가치 있는 가상화폐."
"그거라면 도토리코인이 있으니까 합격이네요."
"두 번째는 확실한 재미를 줄 수 있는 고품질 게임."
"혹시 이건가요?"
그녀는 방금까지 플레이하던 FPS 게임을 가리켰다.
"이미 완성된 게임에는 가상화폐 시스템을 넣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아직 개발 중이면서 재미있는 게임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 너무 허들이 높잖아요."
개발 중인 게임의 흥행성적이나 재미를 정확히 예측해내는 것은 전문 분석가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가능한 일을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 * *
우리는 피시방을 빠져나와서 판교 방면으로 이동했다.
내가 직접 차를 운전하는 동안, 이소영은 태블릿으로 게임 뉴스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와... 국내 게임산업 규모가 10조 원이 넘었네요? 음악, 영화, 드라마 같은 문화 컨텐츠를 모두 합쳐도 상대가 안 돼요."
"국내는 아주 작은 시장입니다. 북미와 중국이 끼면 100조 원을 훌쩍 넘게 되죠."
"대표님께서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린 뒤에 입을 연다.
"저는 돈만 보고 게임 시장에 진출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사용자 확보가 우선이죠. 이번 건은 가상의 화폐를 사고파는데 익숙한 사용자를 대거 확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온라인 게임 사용자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가상의 게임머니나 아이템을 현금으로 거래하고 있었다.
직거래, 혹은 아이템X니아 같은 사이트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현 가상화폐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도 거부감이 덜할 것이다.
"그보다 소영 씨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괜찮아요?"
"이번 프로젝트는 가상화폐를 게임에 녹여내야 합니다. 분야가 다르니 사용하는 언어나, 프로그래밍 방식이 생소할 텐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웬만한 언어는 다 다룰 줄 아니까요. 자바나 C++, C#, 파이썬, 그리고 게임사에서 쓰는 유니티나 언리얼 엔진도 몇 번 만져봤어요."
전문용어라서 다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아무튼 자신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만약 그녀가 안 된다고 했으면 가상화폐에 빠삭한 게임개발 전문가를 구한다고 고생해야 했으리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12층 규모의 오피스텔단지였다.
이소영은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입주한 업체들의 명패부터 살피고 본다.
"업체 중에 유명한 곳은 없네요? 우리가 찾아갈 블루텍이라는 곳도 규모가 그리 크진 않나 봐요."
"국내 게임사치고는 꽤 큰 편입니다."
"그래도 중소업체보다는 아까 피시방에서 했던 게임을 만든 개발사 같은 곳이 낫지 않나요?"
그녀가 말한 블리쟈드는 스타, 워크, 디아, 와우 같은 히트작을 대거 배출한 인기 게임사였다.
여유가 된다면 블리쟈드 같은 유명 개발사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규모와 개발력, 인지도 면에서 탑티어 업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대어를 인수하려면 넘어야 할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블리쟈드를 인수하려면 기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인수가도 최소 80조는 불러야 할 겁니다."
"헛! 그렇게 비싸요?"
"그것도 저렴하게 잡은 금액입니다. 지금처럼 대박을 친 직후에는 값이 더 올라가겠죠?"
이소영은 금액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제게 그만한 돈이 있었어도 저는 블리쟈드보다 블루텍을 택했을 겁니다."
"어째서죠?"
"블리쟈드가 저물어가는 해라면, 여기 블루텍은 해가 뜨기 직전의 여명과도 같은 상태거든요."
바로 그때였다. 옆에서 껄껄거리는 중저음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신 대표님처럼 유명한 분이 저희를 고평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얼굴의 절반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인 사내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블루텍의 한석호 팀장이었다.
나는 진심이 듬뿍 담긴 미소로 그를 맞이한다.
"반갑습니다, 한 팀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아유, 당연히 잘 지내고 있죠. 대표님께서 고기를 어찌나 자주 사주셨으면, 팀원들이 대표님 언제 오시나만 목이 빠지게 기다릴 정돕니다. 하하핫."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고깃집만 계속 갔었군요. 안 되겠습니다. 오늘 회식은 대게찜으로 가시죠. 제가 좋은 곳을 압니다."
"아이고, 안 그러셔도 됩니다."
나는 반년 전부터 블루텍 인수를 염두에 두고 임직원들과 친분을 쌓고 있었다.
블루텍이 뭐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공을 들이냐고?
누적 판매량 7000만 장으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PC게임 1위.
출시 13주 만에 누적 매출 1억 달러.
스팀 동시접속자 기록 기네스북 등재.
국내 게임 업계의 전설을 써 내려갈 '배틀로얄 : 그라운드 제로'의 개발사가 바로 블루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