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
전용택 부회장의 기자회견으로 오성그룹 전체에 전운이 감돈다.
그의 기자회견은 이사진과 일체 상의 없이 진행된 돌발 행동이었고, 발표된 내용 역시 전량 환불이라는 초강수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오성전자는 곧장 비상대책회의를 소집, 사태 발생 1시간 만에 임원 전체가 회의장에 모이게 됐다.
"이미 300만 대나 판매된 제품을 전량 환불하라뇨?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하라면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해주려면 환불 금액도 그렇고... 회수에 들어가는 비용도 역시 만만치 않을 겁니다."
회의장엔 환불을 결정한 전용택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컸다.
어쩔 수 없는 결단이라며 옹호하는 임원도 가끔 있긴 했으나, 2조 원의 손실을 어쩔 거냐는 물음엔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기자회견을 여는 건 어떻습니까? 오전의 기자회견은 공식 입장이 아니었다고 번복하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아직 부회장님이 이사진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어도, 그분이 오성의 정통 후계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너무 답답하니까 이런 말을 해보는 것 아닙니까."
의미 없는 회의가 한 시간 정도 더 이어졌을 때쯤, 회의장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또각. 또각. 또각.
그 행렬의 선두엔 이번 사태의 중심인 전용택 부회장이 있었다.
"다들 여기 모여있었군요."
그가 자신의 상석에 앉기도 전에 임원들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부회장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자회견 못 보셨습니까?"
전용택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자 질문한 임원이 황당해서 입을 벙긋거린다.
"이슈가 생긴 기종은 전량 환불 후 폐기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내일부터 바로 진행해야 하니까, 회의가 끝나는 대로 현장에 지시 내리세요."
"부회장님, 이렇게 중대한 건을 상의도 없이 진행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미 미국 마켓에선 노트7의 판매를 중단했고, 호주, 대만에서도 추가 발주를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한데 언제 상의하고, 언제 대책을 마련해서, 언제 실행에 옮긴단 말입니까?"
"아직 개선품은 불량 통계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는 것이..."
쾅!
서류철을 책상에 내려치는 소리가 임원의 말을 틀어막았다.
"기다렸다가 해결이 안 되면요? 그땐 손실액이 더 불어날 텐데, 서 전무가 책임질 수 있어요?"
말을 꺼낸 임원은 입을 꾹 닫고서 슬그머니 고갤 돌린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번 노트 사태는 일개 임원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전용택의 머릿속에는 신우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업이 흥하든, 망하든, 모든 책임은 오롯이 오너의 몫입니다. 그러니 선택도 오너인 전용택 씨가 하는 것이 옳습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번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이유 중 하나가 허먼사를 9조 원이나 주고 인수하느라 회사에 돈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때도 내가 테슬라와 부품 계약 맺어서 수습한 거야. 이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됐어.'
전용택은 마음의 단단히 굳힌 채 몸을 일으킨다.
"제 결정에 번복은 없습니다. 노트7은 교환이 아니라 전량 환불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임원들을 쭉 둘러보고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번 환불 처리에 필요한 금액, 약 2조 원은 오성전자 주식과 도토리코인 스왑으로 마련하겠습니다."
"가상화폐에 또 투자한단 말씀이십니까?"
"투자가 아니라 자금 수혈 용도로 사들이는 겁니다."
상장 회사의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팔 땐 제약이 많지만, 가상화폐는 그렇지 않다.
원할 때 현금으로 바꿔서 썼다가,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메꿔두면 그만이다. 게다가 가상화폐는 사용처를 따로 공시할 의무조차 없었다.
"하지만 가상화폐는 아직 안정성 논란이..."
전용택은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재무 이사의 말을 자른다.
"이미 논의가 끝난 사안입니다. 만약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시면 이달 내에 2조 원을 수혈할 다른 방안을 가지고 오십시오. 알겠습니까?"
전용택은 제 할 말을 쏟아내고는 자리를 뜬다.
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는 동안, 회의장엔 40명이 넘는 임원들이 앉아 있었으나 누구도 의견을 내지 못했다.
* * *
노트7 환불 소식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300만 대나 팔린 제품을 전량 회수해서 폐기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환불 고객에게 주는 혜택이 너무 파격적이었던 탓이다.
오성전자 포인트로 환불받으면 추가 포인트 20% 지급.
거기에 가상화폐 결제를 쓰면 7% 할인까지.
노트7의 출고가가 100만 원에 달했기에 환불 포인트는 120만 원이나 됐다.
이 돈으로 오성전자의 구형 스마트폰을 사더라도 30만 원이 넘는 포인트가 남았기에, 환불 고객은 공기청정기나 청소기를 공짜로 받아 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은 단연 WHTS컴퍼니였다.
오성전자 제품을 살 때 7%의 할인금을 부담하고 있었으나, 모두가 포인트를 0원이 될 때까지 긁어서 쓰진 않는다.
적게는 몇천 원 수준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까지.
전환된 오성전자 포인트는 그대로 도토리코인 전자지갑에 남게 된다.
즉, 수백만 고객이 남겨둔 도토리코인이 전부 WHTS컴퍼니의 예치금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늘까지 포인트로 전환된 도토리코인은 6억2천만 달러입니다. 여기서 실제 사용된 비율은 92.27%로, 약 5100만 달러의 도토리코인이 지갑에 남았습니다."
아직 노트7의 회수율이 50%도 안 된다는 걸 고려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축배를 들어도 모자랄 소식이었으나, 정작 프로젝트 책임자인 이소영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저기... 이소영 팀장님?"
그녀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 중이다. 재차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녀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인다.
"예?"
"포인트 전환 관련 보고를 드렸었는데... 혹시 코멘트 하실 사항이 있으실까요?"
그녀는 한 박자 늦게 두 손을 교차로 내젓는다.
"아, 아뇨. 없어요. 나중에 다시 확인해볼 테니까 보고서는 거기 두고 가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의아함에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자릴 떠난다.
"휴... 정신 차리자."
이소영은 제 뺨을 반복해서 두들겼으나 여전히 머리는 멍한 상태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일에 집중하려고 보고서를 펼쳐 든다. 그러나 보고서의 글자가 읽히는 게 아니라 온통 검은색 먹물처럼 보였다.
관심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으니 일에 집중이 안 될 수밖에.
'이게 다 그날 있었던 일 때문이야.'
노트7 환불 소식이 있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직원들이 모여서 오성과 무슨 관계를 맺은 게 아니냐고 물었음에도,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못 해줬다.
어쩔 수 없었다. 회사 일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뒤늦게 신우혁 대표가 와서 설명을 해줬지만 그런 행위가 그녀에게 더 큰 감정의 기복을 불러왔다.
"나는 개발팀이니까 회사 경영 쪽 일은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이건 이상한 게 아니야. 자연스러운 거라고."
입으론 괜찮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으나,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응어리짐이 느껴진다.
소외감을 느꼈다. 그게 아니면 서운함일지도 모르겠다.
"몰라. 아무튼, 대표님이 나쁜 거야."
이젠 머리까지 아파온다. 바람이라도 쐴 겸, 몸을 일으키려는데, 옆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히익!"
옆엔 보안팀의 넬라가 서 있었다. 전혀 인기척을 못 느꼈기에 놀람은 배가 됐다.
"넬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그럼... 아까 내가 중얼거린 말은? 들었어? 못 들었지?"
"어떤 말? 우혁이 나쁘다고 했던 거?"
이소영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줘. 진담이 아니었어."
"어째서 우혁이 나빠? 널 무시했어? 회사 일을 안 가르쳐 줬어?"
"그런 게 아니야."
"아니면 왜 나쁜 거야?"
이소영은 숨기는 걸 포기하고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는다. 그날 있었던 일부터, 지금의 복잡한 마음까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거든. 그런데 계속 신경 쓰여서 일이 손에 안 잡혀. 대체 이유가 뭘까?"
"둘 중 하나야. 회사에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게 아니면..."
"아니면?"
넬라는 무표정하게 이소영을 위아래로 훑는다.
"우혁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면 하는 욕구."
"절대, 절대 그건 아니야."
"아닌데 왜 마음이 불편했지? 그건 우혁이 널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했기 때문이야. 특별한 대우를 받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깨달아 버린 거지."
제법 설득력 있는 말이었기에 이소영도 이번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우혁은 이미 널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
"정말이야?"
"99%. 그게 이성으로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유능한 직원으로서 그러는 건지는 몰라."
"..."
이소영이 다시 고민과 걱정의 늪으로 들어가려 하자, 넬라가 그녀를 억지로 끄집어낸다.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본인에게 직접 묻는 편이 확실해."
"내가... 그걸 어떻게 물어봐."
"힘들면 내가 대신해줄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넬라가 떠나려 하자, 이소영이 놀라운 속도로 그녀를 막아 세운다.
"아니야. 내가 할게. 제발 내가 하게 해줘. 응?"
"할 수 있어?"
"무, 물론이야. 내 일이잖아."
넬라는 자릴 뜨지 않고 이소영을 가만히 쳐다본다. 언제 가는지를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지금 바로 가라는 건 아니지?"
"한국 속담. 쇠뿔도 단김에 뺀다."
이소영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넬라는 이소영이 사무실을 완전히 떠나는 걸 보고 나서야 나직이 중얼거렸다.
"손이 많이 가는 성격."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놓칠 만큼 작은 소리였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재차 소리가 넘어온다.
똑똑.
이번은 아까보다 개미 눈물만큼 힘이 더 실린 노크 소리였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이소영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소영 씨였군요. 어서 들어와요."
나는 쥐고 있던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손님을 맞이했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
"오늘은 커피 마시러 온 게 아닌가 봅니다?"
"그... 다른 일로 왔어요."
"어떤 일입니까?"
이소영은 답을 내놓지 못하고 한동안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낼 모양이다.
나도 분위기에 맞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있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소영 씨가 이러니까 괜히 긴장되네요. 무슨 폭탄 발언 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죠?"
"폭탄 발언요?"
"예를 들면... 한동안 쉬고 싶다거나?"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다행입니다. 소영 씨가 하루라도 자릴 비우면 큰일 나거든요."
"그런 것 치곤 제가 우리 회사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적은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면에서요?"
"모든 방면에서 그래요. 가상화폐 개발 건을 제외하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수준이잖아요."
툴툴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마치, 토라진 아이를 보는 것 같다.
"그건 다른 팀장들이나 태식이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회사는 이사회를 열어서 경영방침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으니까요."
"맞는 말씀이긴 한데..."
이소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그래도... 알고 싶으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영 씨라면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정말요?"
"정말이고 말고요."
드디어 이소영의 입가에서 사라졌던 미소가 돌아온다. 내게서 이런 대답을 원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괜히 미안해진다. 회사 초창기 멤버인 그녀에게 제대로 대우를 못 해준 게 아닐까 싶어서.
'지금이라도 신경을 쓰자.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팀장들에게도.'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다.
나는 곧장 외투부터 챙겨 든다.
"말 나온 김에 같이 나가시죠."
"어딜요?"
"데이터 하러요."
"또 매장에 데려가려고 그러죠?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아요."
나는 얼른 나가자는 뜻으로 그녀의 등을 툭 두드린다.
"이번은 매장이 아니라 피시방에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