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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의 출시를 막아섰던 정부의 충전 단자 통합 정책이 '강제'에서 '권고'로 바뀌면서 국내 출시에 청신호가 켜졌다.
테슬라 예약자들로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으나, 커뮤니티와 뉴스 댓글란은 정부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애플폰 인증 거부 사태 때도 그렇고 한국은 매번 이런 식이네요.
-정부 부처들이 문제예요. 평소에 대기업 돈을 얼마나 받아 처먹었으면 대놓고 이러겠어요.
-오성 아니었으면 절대 단자 통합 안 풀어줬을 듯?
-담당자가 돈 받아먹었는지 조사해봐야 합니다.
정부가 규제를 풀어주고도 욕을 먹는 이유는 발표 하루 전에 뜬 언론사 기사 때문이었다.
[허먼 인수가 신의 한 수가 되나? 오성전자, 테슬라모터스와 대규모 부품 공급계약 체결 맺어.]
대기업을 작정하고 밀어주던 정부가 다른 대기업의 개입으로 물러선 모양새가 됐으니 여론이 험악할 수밖에.
과정이 어찌 됐든, 정부의 규제가 풀렸으니 WHTS컴퍼니로선 테슬라 출시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휴, 요즘 일이 많아서 죽겠어. 진짜 몸이 축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니까?"
"저놈의 엄살은."
"엄살이 아니라 진짜 바쁘다니까 그러네."
박태식은 요 며칠 동안 계속 앓는 소릴 해댔다.
생각해보면 최근에 일이 많긴 했다. GPS와 지도, 각종 전자장비 허가를 받고, 출시 프로모션 준비, 광고 촬영, 홈페이지 새 단장, 그리고 호텔과 대형마트, 스포츠 경기장에 테슬라가 자랑하는 초고속충전기도 깔고 있었다.
"일이 없어서 심심하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정부가 이렇게 빨리 꼬릴 내릴 줄 몰랐으니까 그랬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규제를 전부 풀어버리냐."
"상대가 오성이잖아. 정부에서 발발 기는 게 당연하지."
반쯤 식은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박태식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왜?"
"참 신기하다 싶어서. 어떻게 오성 정도 되는 업체랑 떡하니 계약을 맺고 온 거야?"
"그 반대겠지."
"뭐가?"
"전기차 부문에선 우리가 갑이고 오성이 을이야. 갑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면 을이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
현시점에서 테슬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기차를 생산함과 동시에, 탑티어 기술력과 고급 브랜드라는 인지도까지 갖춘 업체였다.
그러니 오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전기차라는 분야에 한해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성이 을이라니. 음...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감이 안 나."
"네가 한국에서 쭉 자라서 그래. 한국에서 오성은 지배자지만, 해외에서 오성은 도전자거든."
"야, 누가 들으면 너는 해외에서 나고 자란 줄 알겠다?"
내가 피식 웃는 동안 박태식이 창을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를 살짝 옆으로 젖힌다.
건물 입구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인파가 옹기종기 모여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많이도 오셨네. 이런 걸 보면 한국에서 테슬라의 엄청난 인기가 체감된다니까."
사람들은 오늘 예정된 테슬라 전시장 오픈 행사를 기다리는 중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테슬라 전시장이다 보니, 테슬라 예약자는 물론이고 각종 매체의 기자와 자동차 마니아들까지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슬슬 시작해야겠네."
"아직 오픈 시간 안 됐잖아?"
"저렇게 많은 분이 기다리시잖냐. 시간을 당겨서라도 빨리 보여드려야지."
나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행사 개시를 지시했다.
통화를 마치고 약 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매장 전면을 가리고 있던 가림막이 동시에 걷힌다.
휙.
드디어 공개된 테슬라 전시장의 내부.
오픈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진다.
"와. 대박! 전시장에 공을 들였다더니 대리석으로 도배를 해뒀네요."
"때깔부터 장난이 아닙니다."
"앞에 계신 분, 잠시만 비켜주세요. 사진 좀 찍을게요."
전시장이 공개되자 대기자들은 조금이라도 앞에서 차를 보려고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시장 직원들이 수습하려 했으나 뒤에서부터 막무가내로 쏟아져 들어오니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그때,
팟.
전시장의 모든 조명이 꺼진다.
사람들이 멈칫한 가운데 전시장 중앙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백인 사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국의 테슬라 예약자, 예비 구매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테슬라의 CEO 엘론입니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엘론의 모습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한국에서 테슬라모터스의 차량을 선보일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도 우리 테슬라는 한국 시장을 최우선으로 지원할 것이며...
비록 녹화된 영상이지만 엘론이 직접 한국에 감사를 표하고 있었기에 열띤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매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영상을 아예 무시해버렸고, 전시된 테슬라 차량을 구경하기 바쁘다.
뒤늦게 매장으로 내려온 박태식도 의외라는 반응이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한국엔 엘론의 팬이 많은 거 아니었어?"
"녹화 영상이라서 감흥이 없나 봐."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영상을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엘론의 메시지 말미엔 테슬라의 향후 계획과 중대 발표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발표를 듣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듣는다 해도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통제해서 영상을 보게 해야 하는 거 아냐?"
"강제로 영상을 보게 했다간 오히려 역효과가 날걸."
"그럼 어쩔 생각이야?"
영상이라서 호응이 없으면 사람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나는 직원을 시켜서 꺼진 전시장의 불을 모두 켜게 했다.
팟!
어둑어둑했던 실내에 불이 켜지자 전기차로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분산된다.
나는 그 틈에 전시장 중앙으로 튀어 나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WHTS컴퍼니의 신우혁입니다.
잔뜩 볼륨을 올린 마이크에서 내 목소리가 증폭된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앗! 신우혁 대표다!"
"대표님!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어주세요!"
"대현에서 인증을 막으려고 로비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대표님, 제 차는 언제쯤 나오나요? 테슬라 출고 기다리다 늙어 죽겠습니다!"
확실히 아까보단 호응이 좋다. 나는 잠시 기다려달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인다.
-제가 마이크를 잡은 이유는 한국의 테슬라 예약자, 그리고 예비 구매자분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섭니다.
내 입에서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 나오자 주변에서 들리던 재잘거림이 싹 사라진다.
-테슬라 차량을 예약하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 답답하셨을 겁니다. 기약도 없는 기다림이란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이죠.
앞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서 제가 직접 테슬라 본사에 쳐들어가서 엘론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공장을 24시간 돌려서라도 한국에 출고할 물량을 내놓으라고요.
사전 예약자들의 간절한 시선이 내게 쏟아진다.
나는 그들의 바람에 호응하듯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잇는다.
-올해 겨울부터, 한국에서 테슬라 전기차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 *
테슬라 차량의 겨울 출고 소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북미, 유럽에도 큰 화제가 됐다.
전 세계적으로 테슬라 차량의 물량이 없어서 대기가 1년이 넘어가는 판에, 한국만 출고를 당겨준다니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형 커뮤니티인 레딧부터 테슬라 출고의 불만이 쏟아졌고, SNS인 트윗, 페북에도 차례로 테슬라 문제가 오르내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엘론은 직접 한국까지 날아와서 대응책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대니얼, 한국에 먼저 물량을 풀어버리면 유럽 물량이 줄어듭니다. 그렇게 되면 유럽 예약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올해 차를 인도받는 사람은 한 줌에 불과할 테니까요."
"어떻게 한 줌일 수 있습니까. 보증금까지 납입한 예약자만 6만 명인데요. 그들 중 웃돈을 받고 팔려는 허수 계약자를 제해도 2만 명은 될 겁니다."
"제가 그것도 모르고 12월에 차를 출고하자고 했겠습니까?"
엘론은 빨리 이유를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재촉해온다.
"올해 출고 차량이 한 줌인 이유는 한국의 보조금 방식 때문입니다."
"구매 보조금 말입니까?"
"정확히는 한국 정부와 지자체에서 친환경 차를 구매할 때 주는 지원금입니다. 연말이 되면 예산이 고갈돼서 한 푼도 못 받게 되죠."
친환경 자동차 보조금은 지자체마다 다르지만 대략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 사이였다.
아무리 테슬라 전기차를 기다렸던 마니아라도 차를 겨우 한 달 빨리 받겠다고 수천만 원을 손해 볼 사람은 흔치 않을 거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12월에 출고될 차량이 전부 내년 1월에 몰린단 말입니까?"
"예약자의 99%는 내년으로 미루겠죠."
"그나마 낫긴 하다만, 음... 1월 생산분을 전부 한국으로 돌린다면 그것도 만만치 않겠군요."
"1월엔 몇 대나 출고할 수 있습니까?"
엘론은 휴대폰의 계산기 앱을 켜서 열심히 두들기다가 손가락 3개를 편다.
"넉넉하게 잡아도 3천 대가 한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니, 아깐 1월에 예약자들이 전부 몰린다면서요? 그런데 충분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전기차 보조금은 매월 지역마다 선착순으로 지원이 마감됩니다. 그러니 신청에 실패한 예약자는 출고를 미룰 수밖에 없겠죠?"
"오호라! 그렇게 되면 자동으로 출고 물량이 분산되겠군요."
엘론은 한국에 온 뒤로 처음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근심거리가 사라져서 그런지 안색이 두 단계는 밝아진 것 같다.
"다만, 아까 말씀하셨던 매월 3천 대 출고를 적어도 5월까지는 유지 시켜주셔야 합니다."
"특별히 5월인 이유가 있습니까?"
"5월이면 전국 지자체의 보조금 신청이 마감됩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물량을 쏟아내서 보조금을 쓸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조금이 고갈될 테니... 전기차 구매 수요가 사라지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이번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곳은 국내 전기차 판매량 1위인 대현이었다.
대현도 보조금을 지키려고 나름의 프로모션을 진행하겠지만, 반년을 넘게 기다린 6만 명의 테슬라 예약자를 제치고 보증금을 타내긴 쉽지 않을 거다.
"판매와 동시에 경쟁사 견제도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좋은데요?"
"마음에 드셨다면 이참에 보급형으로 개발 중인 테슬라3 모델의 예약도 받는 건 어떻습니까?"
내게서 테슬라3라는 말이 나오자 엘론은 난색을 표한다.
"그건 무립니다. 테슬라3는 아직 양산 라인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양산이 안 되면 어떻습니까. 이번처럼 예약만 미리 받자는 겁니다. 출고 시기는 내후년 상반기로 공지하고요."
"내후년 상반기면... 설마?"
그가 생각하는 설마가 맞다.
"내년은 테슬라S로, 내후년은 테슬라3로. 본래라면 대현이 가져가야 할 전기차 보조금을 우리가 싹 쓸어 담는 겁니다."